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돌아올 현실이 존재하는 한 여행은 영원히 모든 사람들에게 꿈이며 환상이고 향수이고 추억이다. 정착 생활 이전의 인간 생활은 정처없는 ‘떠돎’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근원적으로 ‘저기-멀리’를 동경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인간은 그렇게 생래적으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환상과 그리움을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리 안에 유목적 유전자가 존재한다고 말이다.

  빅토르 위고는 사람을 세 종류로 분류했다.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못난 사람, 어느 곳에 정착하든 그곳이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고향은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하는 유목적인 사람이 그것이다. 물론 위고는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떠나는 사람을 가장 상급의 인간이라고 평가했다. 근원적으로 정착과 이동의 모순과 역설 속에서 인간의 역사는 도약과 좌절을 거듭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역사는 민족 간의 이동이나 머물지 않으려는 인간들의 충돌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여행과 사뭇 동떨어진 이야기로 들리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어쩌면 이렇게 끝없는 동경과 그리움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떠나고 싶은 욕망과 안주하고 싶은 욕망은 늘 부딪힌다. 안전의 욕구와 호기심은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인간의 삶에 팽팽한 긴장감을 주기도 한다. 이동의 자유를 제한했던 시대와 국가를 기억한다면 여행에 대한 동경과 자유와 행복은 더욱 소중하게 여겨진다.

  소설가 김연수의 <여행할 권리>는 산문집이다. 대한민국, 그러니까 우리의 현실 밖에서 생활하면서 겪고 느낀 산문집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여행’과는 거리가 좀 있다. 잠시 현지를 돌아보는 이야기나 스치듯 낯선 곳의 감상과 여정을 적어놓은 책이 아니다. 물론 그런 부분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독일과 중국, 미국, 일본을 통해 길어 올린 작가의 내면의 풍경들이다. 각국에 체류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감각적으로 그리고 특유의 유머러스한 문체로 밝고 경쾌하게 표현된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 혹은 곤혹스러움을 재미있고 편안하게 풀어내고 있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책이다.

  일정 기간 체류하면서 적어나간 글들은 다양한 사유의 흐름을 보여준다. 문학과 역사에 대한 아픈 성찰도 엿보이고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사소함에 대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세상에 넘쳐나는 수많은 여행 관련 책들 속에서 단순히 작가이기 때문에 이 책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을 선택하는 독자들은 김연수를 좋아하거나, 소설가의 눈에 비친 것들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거나, 낯선 세계에 대한 막연한 이야기를 좋아하거나 아니면 그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 같다.

  훈츈, 밤베르크, 버클리, 옌지, 룽징, 토오쿄오 그리고 서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김연수의 종횡무진 여행기는 얼굴을 웃음을 띠고 편안하고 간편한 복장으로 나서는 기분이다. 심각하고 사색적인 풍경도 아니고 우울하고 반성적인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사물과 풍경들에 대한 관찰과 흥미가 아니라 사람과 문학, 역사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색다른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읽어 낸 큰 장점은 유머와 편안함이다. 자칫 가벼움으로 흐를 수도 있지만 다져진 내공과 문장이 힘이 차고 넘치지는 않는다. 적절한 수준에서 조절되고 독자들 입장에서 문안하게 읽어낼 수 있을 정도는 된다.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의 기록으로 혹은 이국적인 사람들과 낯선 곳에 관한 감상 차원에서 읽혀질 수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다소 산만한 감은 지울 수가 없다. 편안한 주제로 묶어 내기는 했지만 장소나 방법의 일관성은 없다. 자유롭고 편안한 느낌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마지막에서 발언하고 있는 ‘우리에게 오직 질문하고 여행할 권리’가 있다는 도발적인 주장이 책 전체에서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지는 못하다.

  소설가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여행의 조건과 권리가 우리에게 주어지지는 않는다. 일반적인 관점과 방법과는 거리가 먼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다. 색다른 ‘여행’에 관한 관점으로는 훌륭하게 읽힐 수 있지만 그렇게 만만하거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일상적인 여정과 색다른 것을 제시하는 책들 사이에서 이 책은 나름의 재미와 독특함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어찌되었든 김연수의 글은 읽을 만하고 그의 문장들은 나를 즐겁게 한다. 낄낄거리며 술 한 잔 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작가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즐겁다. 어쩌랴 상상은 자유고 현실은 구속이니.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냐가 문제다. 어떤 술을 마시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마시느냐가 중요하듯이 말이다. 어디를 가든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람마다 다르고 즐기고 바라보는 방법도 제각각이다. 집을 중심으로 반경 1km이내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굳이 여행을 통해 확인 할 필요는 없다. 아, 그것도 나름의 방법인가?

  내일은 매주 돌아오는 토요일이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돌아오는 시간이다. 요일과 무슨 없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고 ‘일탈’하는 날임에는 틀림없다. 김연수의 말대로 오직 질문하고 여행할 권리를 포기하고 사는 건 아닌지 한번 쯤 확인해 보는 건 어떨까 싶다. 떠나고 남는 것도 일종의 습관이므로.


080530-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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