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 창비시선 286
문인수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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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나의 장면과 인상을 풀어내는 능력, 간결한 언어로 응축시켜내는 힘은 저절로 길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인수의 시들을 읽으면서 세월의 힘과 삶의 무게, 그것을 바라보는 예리한 시선에 감탄하다. 수천년 아니, 수만년 동안 지속되어 온 인간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생은 한마디로 정리될 수 없다. 어차피 찰나의 인상에 불과하다. 나는 물론 우리들 모두의 삶은 그렇게 지리멸렬하지만 무엇가를 찾으려는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욱 어렵다. 모든 것을 손에서 놓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장면들을 바라보려는 것도 또다른 욕심일까?

  세월의 골을 따라 존재의 무게감을 느낄 수 있는 문인수의 <배꼽>은 만만치 않은 중량감을 느끼게 한다. 가벼움의 시대, 키취 세대를 즐기던 90년대를 넘어 이제는 우리 시대를 무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이념도 실존도 더 이상 시가 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건 아닐까? 항상 책 속에서 길을 잃고 끝없는 질문 속에서 허덕인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바람부는 날 길가에 떠 다니던 검은 비닐봉지를 바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입구도 출구도 모른 채 바람을 잔뜩 머금고 일방적으로 질주하는 바람의 맹렬함 덕분에 하늘로 날아 오를 수 있었던 비닐봉지에게 묻는다.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을 향해 떠올랐다가 힘없이 가라앉는 것이냐고.

비닐봉지

차들이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연신 치고
달아난다. 비닐봉지는 힘없이 떴다 가라앉다 하면서
찢어질 듯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지만 도통
소리가 없다. 연속으로 들이닥치는 무서운 속력 앞에, 뒤에, 두둥실
웬 허공이 저리 너그러운지.

누군가의 발목에서 떨어져나온 그림자, 그늘인 것 같다. 과거지사는 더 이상 다치지 않는다. 이제
적의 멱살도 박치기도 없는 춤,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또 잔뜩
바람을 삼킨다. 대단한 소화능력이다. 시장통,
거리의 밥통이다. 금세 홀쭉하다.


  때로는 우연에 기댈 때도 있다. 박태환처럼 뚜렷한 목표와 결승점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물에게 온몸을 내맡기고 전력을 다해 손이 닿는 순간 이제 그는 어디로 가야할까? 경쟁도 없고 확인된 적도 없는 싸움을 계속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지. 그래서 거리의 밥통은 금세 홀쭉해지는 것인지.

배꼽

외곽지 야산 버려빈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한다.
전에 없던 길 한가닥이 무슨 탯줄처럼
꿈틀꿈틀 길게 뽑혀나온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마당에 나뒹구는 소주병, 그 위를 뒤덮으며 폭우 지나갔다.
풀의 화염이 더 오래 지나간다.
우거진 풀을 베자 뱀허물이 여럿 나왔으나
사내는 아직 웅크린 한 채의 폐가다.

폐가는 이제 낡은 외투처럼 사내를 품는지.
밤새도록 쌈 싸먹은 뒤꼍 토란잎의 빗소리, 삽짝 정낭 지분 위 조롱박이 시퍼렇게 시퍼런 똥자루처럼
힘껏 빠져나오는 아침, 젖은 길이 비리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은 있다. 태초에 탄생이 있으니 소멸이 있고 삶이 있으니 그 종착역은 죽음이 될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 앞에 우리는 조금 겸손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부리며 산다.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는 세월’이 얼마나 많은가? 아니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절망의 종착역이 희망은 아니다. 희망을 담보로 절망이 찾아온다면 견딜만 하겠지만 절망은 또 다른 절망으로 치닫고 희망은 그저 생을 유지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신기루에 불과할 때가 더 많다. 헛된 희망 고문으로 환상 속에 현실을 방기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도 그것조차 없다면?

  우리 모두는 도망자가 되는 것이다.

도망자

밤새 눈 내려덮였다.
저 일격이 날 때려눕힌 것일까
세상 모든 길, 길을 풀고 돌아가버렸다.

일생이 전면, 불문에 붙여진 것 같다.
사라진 기억들이 삼엄하다.

누가 또 밖에 나가고 싶으랴,
나가고 싶지 않으랴.

낯선 곳에서 창을 열고 멀리 내다보는
흰 복면의 죄, 말없다.


  사라진 것을 우리는 ‘기억’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라진 기억’은 모순이다. 하지만 삼엄하긴 하다. 하늘은 먼저 가을을 예감한다. 지상의 뜨거운 열기를 비웃듯 뭉게 구름은 한가롭고 푸른 하늘은 여유있다. ‘낯선 곳에서 창을 열고 멀리 내다보는’ 여유를 찾아 헤매는 것이 우리들의 먼 미래의 희망이다. 아닌가? 여전히 말없이 그것을 내다 볼 밖에.

  손에 잡힐 듯이 눈앞에 떠 있는 흰 구름이 소리도 없이 사라지고 다른 모습으로 헤어졌다 다시 만난다. 목적 없이 그렇게 흘러가는 아주 오래된 기억이 배꼽이다. 생의 근원이며 절망의 출발이고 다시 돌아가야 할 침묵의 바다이다. 가만히 내 배꼽을 들여다본다.


080810-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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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 이덕일의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
이덕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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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을 나는 ‘신념’에서 찾는다. 먹이와 생존에 대한 본능이 해결된 이후의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목숨을 걸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어쩌면 다른 의미의 ‘행복’일 수도 있다. 조선 후기의 소론 강경파였던 아계 김일경은 경종을 독살했다고 믿은 영조에게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고 외쳤다.

  물론 그 결과는 참혹했다. 경종에게 충신이었으나 영조에게는 역적이 되어 그의 자식들마저 절멸됐다. 연좌제의 전통은 끔찍하기만 하다. 그것을 알면서도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고 외칠 수 있었던 한 인간의 고뇌 혹은 고집은 ‘신념’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리라. 가족의 입장에서 다르게 보일 수도 있으나 역사적 관점에서 그와 같은 행동과 입장들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단순히 그들이 불행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대에 도전했던 사람들은 한 두명이 아니지만 우리 역사에서 그들의 행적을 돌아보는 일은 현실을 돌아보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누구나 말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시대에 도전하는 맑은 정신과 피 끓는 외침을 듣기는 더욱 어렵다. 백가쟁명의 시대에는 오히려 사람들이 영웅을 기다린다. 파시즘은 일종의 마약처럼 사람들을 유혹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6%의 지지, 강남 3구의 지지를 딛고 우뚝 선 강남교육감을 모시고 살아가는 시대에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세상이 어떻게 변하기를 바라는 걸까?

  그래도 세상은 돌아간다. 당장 나의 이익과의 관계만을 계산하는 것이 시대정신인가? 교육에 의해 계급은 재생산되고 그 체제는 더욱 교묘하게 공고히 굳어진다.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내 삶에는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엉뚱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나름의 가치와 판단대로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시대는 그렇게 흘러왔고 그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에 의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씩 변화하기도 했다. 혁명을 경험하지 못한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에게 혁명을 꿈꾸었거나 시대를 거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반면교사가 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에게 익숙했던 역사이며 바로 오늘 다시 되돌리려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다. 이덕일의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는 ‘시대에 도전하라’는 말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시대에 도전했던 사람들의 행적은 아프게 읽히고 반성적으로 돌아보아야 할 현실의 문제만 남긴다.

  주로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시대정신’에 저항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분야별로 묶은 이 책은 먼저 중국에 항거한 사람들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북벌을 주장하고 주자학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 중 양명학자 정제두가 인상 깊었다. 발해를 우리 역사에 편입시킨 유득공도 눈에 띤다. 정치 체제나 종교적인 문제로 자신을 버렸던 사람들, 사회제도나 신분제도에 도전한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이 책은 역사적 지식의 편린들을 머릿속에서 끼워 맞춰야 하는 불편함은 감수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이들이 주장했던 시대적 진실들이 과연 역사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그것이 훗날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역사 서술의 방법과 관점에 대한 동의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저자도 가끔 우리의 역사 교과서를 언급, 인용하고 있다. 그것이 아니라고.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지식의 문제를 넘어 관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 소개된 사람들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개인적 용기를 넘어 사회적 진실이 되었을 때 역사의 흐름에 작은 변화가 생기는 법이다.

  책은 끊임없이 얽히고 교통하며 조화를 이루고 간섭한다. 바로 이전의 책에서 보았던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는 이 책 3부의 제목으로 쓰였다. 4부의 제목 ‘내가 가면 길이 된다’는 당연히 노신을 떠오르게 한다. 어떤 분야의 책이든 합종연횡 되어 지식의 네트워크가 형성될 수 있기를 바라지만 만만치는 않다. 하나의 연결고리가 아니라 거대한 덩어리로 떠다니기도 하고 기억의 저편으로 가물가물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너무 소략하여 에피소드나 일화의 형식으로만 전해지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는 이 책의 한계이기도 하다. 여러 사람을 소개하고 있어 두루 살펴보는 즐거움을 위해 하나는 희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겠지만 엮이고 묶이는 의도와 방법을 따라가며 읽는다면 이덕일의 책은 나름대로 계통과 흐름을 따라 갈 수 있어 편리하고 재미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080805-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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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을 거부하라! - 노동 지상주의에 대한 11가지 반격
크리시스 지음, 김남시 옮김 / 이후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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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참 매력 없는 도시이다. 이웃 블로거 타다노부님의 말대로 사람들의 관계를 벗어나서 즐길 만하거나 사물과 대상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길러온 도시라고 보기 어렵다. 단순하게 말해 기능적인 면과 편의성 측면에서 탁월할 지 모르지만 그것 이상은 찾아보기 어렵다. 누구나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숨은 뜻은 공유하기 쉽고 말해진 것을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은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은 차갑고 인위적인 도시라는 결론은 어렵지 않게 도출된다. 그것은 서울이 아니라 도시의 일반적인 특성이라는 강변이 가능하지만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전제 조건을 가진 도시들을 비교할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끔 서울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서울의 야경 때문이다. 한강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어둠과 찬란한 불빛이 만들어내는 환상을 본다.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도시의 어둠은 네온싸인으로 인해 더욱 웅숭깊은 비밀스러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인공위성에서 촬영한 사진을 보면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의 밤은 확연하게 구별된다. 지구 전체의 모습을 살펴보면 흔히 선진국과 후진국의 구별은 더욱 확실해진다. 밤을 지워버리는 자본의 힘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인간에게 어둠은 더 이상 휴식과 안정의 시간이 아니다. 밤은 극복의 대상이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의 이야기이다. 낮과 밤은 물리적인 시간의 구분일 뿐이다. 활동 시간은 무한대로 연장되었다. 끔찍하게도 그 활동 시간은 전부 노동시간의 연장에서 비롯되었다. 자본의 유혹은 밤을 밝혀 소비를 부추긴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공부하고 일하며 즐기고 관계 맺는다. 밤은 더 이상 밤이 아닌 시간이 되어 버렸다.

  대학 신입생 시절 열심히 따라 불렀던 “일하지 먹는 자여, 먹지도 마라! 자본가여 먹지도 마라! ~~”가 떠올랐다. 옮긴이의 글 제목이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라는 도발적인 제목이다. <노동을 거부하라!>는 책은 제목부터 옮긴이의 글까지 전부 도발적이다. 노동지상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노동을 거부하라니?

  이제는 상식이 되어버린, 숭고하고 도덕적인 가치인 ‘노동’을 거부하라는 말은 헛소리로 들린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은 과연 제대로 된 상식인가? 생각의 틀을 뒤흔드는 일은 쉽지 않다. 강한 거부감이 들더라도 귀 기울여 가슴을 열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이념적 지향을 떠나 존경스럽다. 이 책은 뉘른베르크에서 활동하던 좌파 연구 그룹인 ‘크리시스Krisis’가 발간한 책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았다.

  체제 전복적인 글도 아니고 국가 변란이나 내란, 음모를 모의하는 책도 아니다. 이 책은 독일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고찰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노동하는 인간의 삶을 반성해보는 책이다. 지금까지 거론된 이론들을 점검하고 현실의 문제에 적용시키며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간과했던 ‘노동’의 문제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과연 인간은 일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국가가 모든 국민을 먹여 살려야 할까? 아무도 일하지 않는 세상이 가능하단 말인가? 꼬리를 무는 의문부호는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조금씩 사라지고 11명의 이야기는 제각각 목소리를 높이며 혹은 차분하게 다양한 문제점들을 짚어 나가고 있다. 추상적 시간의 개념, 노동의 부패, 여성들의 노동, 저임금, 강제 노동, 노동 문화 등 하나의 주제를 둘러싼 주변을 점검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새롭게 인식된다. 자본주의 너머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책을 맺고 있는 이 책은 미래를 고민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된다.

  현실을 벗어나 과거를 돌아볼 수 없고 거꾸로 미래의 모습은 언제나 현실에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구체적인 책의 내용과 이론들은 독자들의 몫일게다. 아마도 다양한 반응과 논쟁이 가능한 책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 쉽게 권할 만하지는 않다. 일단 이론적 토대를 설명하면서 현실의 문제를 점검하고 있기 때문에 만만한 내용도 아니고 쉽게 재미있게 풀어쓴 교양서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간에 맞춰 일어나 노동하고 밤에도 노동하는 인간에 대한 모습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자본주의의 시대는 또한 ‘자명종’의 시대이기도 하다. 곧 사람들을 인위적으로 조명된 ‘일자리’로 몰아가기 위해 기괴한 시그널로 잠에서 깨우는 시계의 시대인 것이다.
……
야간 노동은 흔하지 않은 예외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시간의 고문을 인간 활동의 정상적인 척도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 자본주의의 ‘거대한’ 성과 중 하나다. - P. 52

  우리는 꿈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오래된 과거처럼 저절로 눈이 떠질 때 일어나고 졸릴 때 잠을 자는 인체의 시간을 말이다. 그나저나 책을 읽다가, 부지런함이 미덕인 사회에서 발칙하게도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던 마르크스의 사위 라파르그는 왜 아내와 함께 자살했을까 궁금해졌다.

  시계가 없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 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예전보다 ‘행복’해 졌을까? 더 여유있고 즐거워졌을까? 이렇게 바쁘게 정신없이 살아가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일까? 보다 희망찬 미래를 위해서? 책을 읽는 동안 의문 부호만 늘어간다.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현실 인식이 아니라 한번도 의심없이 받아 들이고 고민없이 믿었던 상식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책을 읽고 나서도 엉뚱한 맥락으로 레닌이 이 말이 긴 여운으로 머릿속을 맴돈다.

“자신을 무엇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실지로 그것인 건 서로 다른 문제다.”(레닌) - P. 247


080730-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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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이크로 소사이어티로 간다 - 세상의 변화를 읽는 디테일 코드
팔란티리 2020 지음 / 웅진윙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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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티비를 보지 않는다고 하지만  평일 9시와 일요일 12시가 되면 티비를 켠다. MBC 9시 뉴스, 출발 비디오 여행 때문이다. 그런데 평일에는 이제 더 이상 뉴스를 안본다. 처음에는 답답했지만 이젠 견딜만하다. 1시간이 여유로워졌고 뉴스를 보며 받는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어 정신 건강이 좋아졌다. 조간 신문만으로 답답할 때가 있지만 굳이 네이버나 다음 뉴스를 기웃거리지 않고 오마이 뉴스 등 인터넷 매체도 기웃거리지 않은 지 한참 되었다. 그래도 살만하다.

  세상에 진실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믿었던 모든 것들은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졌고 다가올 미래는 늘 불안하기만 하며 현실은 모래 위에 지은 성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그래도 환상이나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건 게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정작 자신은 90이 넘을 때까지 살다가 죽은 쇼펜하우어의 권유대로 자살을 선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의 모습과 미래에 대한 호기심은 떨쳐버릴 수 없는 유혹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그에 대한 무수한 분석들이 난무하고 혜안을 가진 지식인이나 종교인에게 기대기도 한다. 때로는 앨빈 토플러와 같이 탁월한 미래학자에게 기대기도 하고 신내림을 받은 무속인을 찾기도 한다. 그러한 노력은 오늘도 내일도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NHN이 만든 오픈 네트워크형 연구조직 NORI(New Media Open Research Info-Net)의 쳇 프로젝트 그룹인 ‘팔란티리 2020’은 인터넷을 비롯한 매체환경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네트워크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의 삶의 변화를 주시하고 있다. 토론 연구 그룹의 성과물을 담아낸 <우리는 마이크로 소사이어티로 간다>는 개인의 정체성과 프라이버시, 지식의 변화상을 비롯해서 구너력과 경제활동, 놀이문화, 예술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변화를 조망하고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연구 그룹의 구성원들이 현직 교수라는 것은 이 책의 최대 단점으로 보였다. 학문적 관점이나 객관성을 확보하고 싶은 의도는 충분히 이해되지만 현실 감각이 떨어지고 이론적 토대와 인과관계의 해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현실을 읽어내는 탁월한 감각과 시대를 앞서가는 능력을 검증 받을 수는 없지만 시도나 의도만큼의 성과를 읽어내기는 어려웠다.

  일곱 개의 키워드를 잡아 낸 일이나 그것을 풀어내는 발랄함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먼저 ‘나는 몇 개인가?’는 개인의 정체성에 대해, ‘여기가 너희 집 안방이냐?’를 통해 프라이버시를, ‘네가 아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를 통해 지식의 개념을, ‘클릭의 경제학을 읽어라’에서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나는 논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게임과 현실의 관계를, ‘누구나 파워 게임의 승자가 될 수 있다’를 통해 현대 사회의 권력을, ‘당신도 앤디 워홀이 될 수 있다’에서는 현대예술에 대해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대 사회를 가로지르는 중요한 키워드를 통해 시대를 읽어내고 트렌드를 잡아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미래를 내다보는 돌’이란 뜻을 가지니 고대의 신석 이름에서 빌려온 ‘팔란티리’는 2020년을 내다보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이 욕망은 특별한 목적과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다. 물론 현재 상황에서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려는 것은 당연한 준비이자 기득권자들의 여유로 여겨질 때도 있다. 10년 후에도 우리가 돈을 잘 벌 수 있을까? 어디가 돈 되는 곳일까? 상대방의 의도를 비하하자면 이쯤 되겠다. 사람들의 의식과 변화의 흐름을 읽어내는 일은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초석이 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NHN은 산학 협동의 이름으로 미래 사회의 아젠다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 의도가 순수하고 선한 것일지라도 결과까지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이 책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KT나 현대자동차와 맞먹는 10조원의 자산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네이버나 한게임 사용자들은 알지 못한다. 아니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것은 없다. 다만 이렇게 비대해진 조직과 어마어마한 수익구조를 지닌 기업이라면 그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작고 사소한 힘이 큰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사회를 예감했다면 뉴스 편집과 정치적 스태스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 좋다. 네트워크 환경은 빛의 속도로 변해 갈 것이고 누구든, 언제든, 어디서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상이 펼쳐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 힘의 원천과 근원이 되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한 관심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인문人紋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기업의 철학과 역사 의식은 지속가능한 경영의 초석이 된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진리는 단순하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예민한 촉수를 뻗쳐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들이 지향해야 하는 것을 찾아내고 제시할 수 있을 정도의 기업을 사람들은 원하게 될 것이다. 녹색은 생명이며 희망이며 자연이고 환경이다.

  시뮬라시옹의 시대에 구현해내는 시뮬라크르들은 어쩌면 완벽한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끝없이 고민하며 미래를 구현해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과제이며 ‘팔란티리 2020’이 고민하는 주제가 될 것이다. ‘지금-여기’가 아니라 ‘내일-거기’를 알고 싶다면 과거와 현재를 통해 먼저 변화의 흐름을 읽어내기 보다 변화의 주체들에 대한 관심과 길 안내가 필요하다.

  앞서 질펀하게 흘려놓은 고민들은 개인이든 기업이든 시민단체든 정부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의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의 해법은 제각각이고 바라보는 관점 또한 상이하다. 그것들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는 더더욱 난망스럽다. 어쨌든 한 기업의 시도와 노력은 일단 가상하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이러한 노력과 연구는 지속되어 마땅하고 그 결과물과 소통과정은 열린 체계로 지평을 넓혀가야 할 것이라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래야 식상한 표현이 ‘보다 더 나은 미래’가 펼쳐질 것이 아닌가?


080728-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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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명랑'의 코드로 읽은 한국 사회 스케치
우석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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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회를 바라보는 눈은 그 사회의 구성원 수만큼 많다. 우석훈의 책을 계속해서 읽고 있었다.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읽고 <직선들의 대한민국>을 거쳐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를 통해 최근의 생각들을 일괄하고 있다. 기획 의도와 내용상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앞의 두 책과 구별되지만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때는 함께 묶여도 무관하다. 잡지나 신문 등에 실린 칼럼과 비평문을 모아 낸 모음집이니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흐름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사회적 이슈들을 다루었던 민감한 문제들과 정부 정책이나 경제, 사회 문제를 통해 노무현 정부 시절을 돌아보는 추억담처럼 읽힌다. 벌써! 이제 이명박 정부가 아닌가. 책을 읽는 동안 격세지감을 느낀다. 작년에 출판된 책이 1년 만에 아련한 추억처럼 읽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책에 실린 내용이 그 이전에 쓰인 글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앞서기 때문일 것이다.

  잇달아 한 사람의 책을 읽다보면 행간에 숨은 정보들을 많이 읽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밝히지도 않은 나이와 이력들 그리고 그간의 행적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교묘하게 얽혀 마치 퍼즐을 맞춰 전체 그림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맛본다. 개인적인 호기심이 아니라 그의 생각과 사유 방식들이 어디에서 발원한 것인지, 어떤 과정과 경로를 통해 지금에 이르렀는지, 앞으로 그의 행동 방식과 관심사까지 두루 살펴 볼 수 있다.

  이것은 한 개인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우석훈의 글을 통해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현주소이다. 대단한 문학적 감수성을 숨기고 지극히 냉철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일찍이 관료 사회에서 공무원들과 국제 기구에서 일했던 경험들이 우석훈으로 하여금 현실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사회와 개인을 보다 미시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유의 틀을 제공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우석훈의 글들은 탄탄하고 매력적이지는 않지만 솔직하며 합리적이다. 그래서 계속 읽힌다.

  사람들의 술버릇 중에 같은 말을 반복하는 사람이 있다. 중언부언 - 곁에서 듣는 사람에게 이것만큼 괴로운 것도 없다. 우석훈의 이야기 중에는 이렇게 중복되는 부분도 있다. 세 권의 책을 짧은 기간 동안 읽어서 그런 느낌 일 수도 있지만 이것이 술주정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생태와 환경 그리고 평화로 요약될 수 있는 거대 담론들은 실제 현실 속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야 하는지 구체성을 담보하지 못해 조금 답답한 면이 있기는 하다. 책의 목적과 기능이 개별적인 사례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할 목적과 방향에 대한 희망이나 합의가 부재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21세기가 훌쩍 넘어섰다. 20세기에 넘어온 사람과 넘어오지 못한 사람을 분류하는 ‘인물열전’ 부분은 경제학자 우석훈이 아니라 인문학자 우석훈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박노자와 진중권에 대한 평가 강금실과 김지하에 대한 비판은 우리 시대를 가장 선명한 눈으로 바라보는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석훈은 목하 열애중이다. 대한민국을 사랑한다고 하면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거부할 것이고 동북아 중심국가론을 주장하는 손학규와 김지하와 한통속으로 몰아갈 염려가 있겠지만 녹색환경과 생태 경제학이라 불릴 만한 일관된 관심과 주장은 평화 경제학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된다. 이름이 거창하고 그럴듯해서가 아니라 우석훈이 주장하는 미래는 분명 희망의 메시지가 전해지고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우리는 최소한 그렇게 선명하고 밝은 미래를 그리며 이 사회를 만들어가고 경제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위정자들은 최소한 그만한 청사진과 철학적 신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둡고 암울하다. GNP 2만불 혹은 3만불이 대한민국의 지향점이어야 할까? 숫자놀음에 불과한 단순한 경제지표를 볼모로 우리 모두는 부나비처럼 제 날개가 타오르는지도 모르고 달려드는 것은 아닐까? 1% 혹은 10%를 위한 정책을 하위 50%가 지지하고 열광하는 이유를 우석훈은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빌헬름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탁월한 저서에서 이 비합리적인 정치 성향에 대해 ‘성정치학’이라는 분석틀로 이론화했다. 다양한 분석들이 적용되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조중동의 기사를 자신의 신념으로 믿고 있는 대다수 비규정규직과 세입자들이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래의 희망과 비전이 분명하지 않고 사회적 타협이나 지향이 일치하지 않는 사회는 불안하기만 하다.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명랑’이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을까? 우석훈은 스스로를 ‘명랑 좌파, C급 경제학자’라고 명명한다. 우울하고 비관적인 전망이 미래를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비합리적인 낙관과 막연한 믿음,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환상은 현실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절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모두 함께 움직일 수 있는 구심점, 공동의 이익을 위한 접속 코드가 필요하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찾고 접속하고 현실을 재편하려는 작은 노력과 실천들이 필요하다. 매우 명랑하고 즐겁게 말이다. 세상은 즐거움으로 가득한 곳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내가 즐실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실천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석훈의 외침은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메아리 없는 아우성이 아니라 멀리서라도 작고 힘찬, 수많은 울림들을 하나로 모으는 확성기가 될 것이라고 믿고 싶다.


080725-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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