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을 거부하라! - 노동 지상주의에 대한 11가지 반격
크리시스 지음, 김남시 옮김 / 이후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서울은 참 매력 없는 도시이다. 이웃 블로거 타다노부님의 말대로 사람들의 관계를 벗어나서 즐길 만하거나 사물과 대상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길러온 도시라고 보기 어렵다. 단순하게 말해 기능적인 면과 편의성 측면에서 탁월할 지 모르지만 그것 이상은 찾아보기 어렵다. 누구나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숨은 뜻은 공유하기 쉽고 말해진 것을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은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은 차갑고 인위적인 도시라는 결론은 어렵지 않게 도출된다. 그것은 서울이 아니라 도시의 일반적인 특성이라는 강변이 가능하지만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전제 조건을 가진 도시들을 비교할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끔 서울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서울의 야경 때문이다. 한강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어둠과 찬란한 불빛이 만들어내는 환상을 본다.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도시의 어둠은 네온싸인으로 인해 더욱 웅숭깊은 비밀스러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인공위성에서 촬영한 사진을 보면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의 밤은 확연하게 구별된다. 지구 전체의 모습을 살펴보면 흔히 선진국과 후진국의 구별은 더욱 확실해진다. 밤을 지워버리는 자본의 힘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인간에게 어둠은 더 이상 휴식과 안정의 시간이 아니다. 밤은 극복의 대상이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의 이야기이다. 낮과 밤은 물리적인 시간의 구분일 뿐이다. 활동 시간은 무한대로 연장되었다. 끔찍하게도 그 활동 시간은 전부 노동시간의 연장에서 비롯되었다. 자본의 유혹은 밤을 밝혀 소비를 부추긴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공부하고 일하며 즐기고 관계 맺는다. 밤은 더 이상 밤이 아닌 시간이 되어 버렸다.

  대학 신입생 시절 열심히 따라 불렀던 “일하지 먹는 자여, 먹지도 마라! 자본가여 먹지도 마라! ~~”가 떠올랐다. 옮긴이의 글 제목이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라는 도발적인 제목이다. <노동을 거부하라!>는 책은 제목부터 옮긴이의 글까지 전부 도발적이다. 노동지상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노동을 거부하라니?

  이제는 상식이 되어버린, 숭고하고 도덕적인 가치인 ‘노동’을 거부하라는 말은 헛소리로 들린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은 과연 제대로 된 상식인가? 생각의 틀을 뒤흔드는 일은 쉽지 않다. 강한 거부감이 들더라도 귀 기울여 가슴을 열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이념적 지향을 떠나 존경스럽다. 이 책은 뉘른베르크에서 활동하던 좌파 연구 그룹인 ‘크리시스Krisis’가 발간한 책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았다.

  체제 전복적인 글도 아니고 국가 변란이나 내란, 음모를 모의하는 책도 아니다. 이 책은 독일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고찰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노동하는 인간의 삶을 반성해보는 책이다. 지금까지 거론된 이론들을 점검하고 현실의 문제에 적용시키며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간과했던 ‘노동’의 문제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과연 인간은 일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국가가 모든 국민을 먹여 살려야 할까? 아무도 일하지 않는 세상이 가능하단 말인가? 꼬리를 무는 의문부호는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조금씩 사라지고 11명의 이야기는 제각각 목소리를 높이며 혹은 차분하게 다양한 문제점들을 짚어 나가고 있다. 추상적 시간의 개념, 노동의 부패, 여성들의 노동, 저임금, 강제 노동, 노동 문화 등 하나의 주제를 둘러싼 주변을 점검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새롭게 인식된다. 자본주의 너머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책을 맺고 있는 이 책은 미래를 고민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된다.

  현실을 벗어나 과거를 돌아볼 수 없고 거꾸로 미래의 모습은 언제나 현실에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구체적인 책의 내용과 이론들은 독자들의 몫일게다. 아마도 다양한 반응과 논쟁이 가능한 책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 쉽게 권할 만하지는 않다. 일단 이론적 토대를 설명하면서 현실의 문제를 점검하고 있기 때문에 만만한 내용도 아니고 쉽게 재미있게 풀어쓴 교양서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간에 맞춰 일어나 노동하고 밤에도 노동하는 인간에 대한 모습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자본주의의 시대는 또한 ‘자명종’의 시대이기도 하다. 곧 사람들을 인위적으로 조명된 ‘일자리’로 몰아가기 위해 기괴한 시그널로 잠에서 깨우는 시계의 시대인 것이다.
……
야간 노동은 흔하지 않은 예외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시간의 고문을 인간 활동의 정상적인 척도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 자본주의의 ‘거대한’ 성과 중 하나다. - P. 52

  우리는 꿈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오래된 과거처럼 저절로 눈이 떠질 때 일어나고 졸릴 때 잠을 자는 인체의 시간을 말이다. 그나저나 책을 읽다가, 부지런함이 미덕인 사회에서 발칙하게도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던 마르크스의 사위 라파르그는 왜 아내와 함께 자살했을까 궁금해졌다.

  시계가 없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 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예전보다 ‘행복’해 졌을까? 더 여유있고 즐거워졌을까? 이렇게 바쁘게 정신없이 살아가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일까? 보다 희망찬 미래를 위해서? 책을 읽는 동안 의문 부호만 늘어간다.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현실 인식이 아니라 한번도 의심없이 받아 들이고 고민없이 믿었던 상식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책을 읽고 나서도 엉뚱한 맥락으로 레닌이 이 말이 긴 여운으로 머릿속을 맴돈다.

“자신을 무엇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실지로 그것인 건 서로 다른 문제다.”(레닌) - P. 247


080730-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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