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 창비시선 286
문인수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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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나의 장면과 인상을 풀어내는 능력, 간결한 언어로 응축시켜내는 힘은 저절로 길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인수의 시들을 읽으면서 세월의 힘과 삶의 무게, 그것을 바라보는 예리한 시선에 감탄하다. 수천년 아니, 수만년 동안 지속되어 온 인간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생은 한마디로 정리될 수 없다. 어차피 찰나의 인상에 불과하다. 나는 물론 우리들 모두의 삶은 그렇게 지리멸렬하지만 무엇가를 찾으려는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욱 어렵다. 모든 것을 손에서 놓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장면들을 바라보려는 것도 또다른 욕심일까?

  세월의 골을 따라 존재의 무게감을 느낄 수 있는 문인수의 <배꼽>은 만만치 않은 중량감을 느끼게 한다. 가벼움의 시대, 키취 세대를 즐기던 90년대를 넘어 이제는 우리 시대를 무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이념도 실존도 더 이상 시가 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건 아닐까? 항상 책 속에서 길을 잃고 끝없는 질문 속에서 허덕인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바람부는 날 길가에 떠 다니던 검은 비닐봉지를 바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입구도 출구도 모른 채 바람을 잔뜩 머금고 일방적으로 질주하는 바람의 맹렬함 덕분에 하늘로 날아 오를 수 있었던 비닐봉지에게 묻는다.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을 향해 떠올랐다가 힘없이 가라앉는 것이냐고.

비닐봉지

차들이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연신 치고
달아난다. 비닐봉지는 힘없이 떴다 가라앉다 하면서
찢어질 듯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지만 도통
소리가 없다. 연속으로 들이닥치는 무서운 속력 앞에, 뒤에, 두둥실
웬 허공이 저리 너그러운지.

누군가의 발목에서 떨어져나온 그림자, 그늘인 것 같다. 과거지사는 더 이상 다치지 않는다. 이제
적의 멱살도 박치기도 없는 춤,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또 잔뜩
바람을 삼킨다. 대단한 소화능력이다. 시장통,
거리의 밥통이다. 금세 홀쭉하다.


  때로는 우연에 기댈 때도 있다. 박태환처럼 뚜렷한 목표와 결승점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물에게 온몸을 내맡기고 전력을 다해 손이 닿는 순간 이제 그는 어디로 가야할까? 경쟁도 없고 확인된 적도 없는 싸움을 계속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지. 그래서 거리의 밥통은 금세 홀쭉해지는 것인지.

배꼽

외곽지 야산 버려빈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한다.
전에 없던 길 한가닥이 무슨 탯줄처럼
꿈틀꿈틀 길게 뽑혀나온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마당에 나뒹구는 소주병, 그 위를 뒤덮으며 폭우 지나갔다.
풀의 화염이 더 오래 지나간다.
우거진 풀을 베자 뱀허물이 여럿 나왔으나
사내는 아직 웅크린 한 채의 폐가다.

폐가는 이제 낡은 외투처럼 사내를 품는지.
밤새도록 쌈 싸먹은 뒤꼍 토란잎의 빗소리, 삽짝 정낭 지분 위 조롱박이 시퍼렇게 시퍼런 똥자루처럼
힘껏 빠져나오는 아침, 젖은 길이 비리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은 있다. 태초에 탄생이 있으니 소멸이 있고 삶이 있으니 그 종착역은 죽음이 될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 앞에 우리는 조금 겸손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부리며 산다.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는 세월’이 얼마나 많은가? 아니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절망의 종착역이 희망은 아니다. 희망을 담보로 절망이 찾아온다면 견딜만 하겠지만 절망은 또 다른 절망으로 치닫고 희망은 그저 생을 유지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신기루에 불과할 때가 더 많다. 헛된 희망 고문으로 환상 속에 현실을 방기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도 그것조차 없다면?

  우리 모두는 도망자가 되는 것이다.

도망자

밤새 눈 내려덮였다.
저 일격이 날 때려눕힌 것일까
세상 모든 길, 길을 풀고 돌아가버렸다.

일생이 전면, 불문에 붙여진 것 같다.
사라진 기억들이 삼엄하다.

누가 또 밖에 나가고 싶으랴,
나가고 싶지 않으랴.

낯선 곳에서 창을 열고 멀리 내다보는
흰 복면의 죄, 말없다.


  사라진 것을 우리는 ‘기억’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라진 기억’은 모순이다. 하지만 삼엄하긴 하다. 하늘은 먼저 가을을 예감한다. 지상의 뜨거운 열기를 비웃듯 뭉게 구름은 한가롭고 푸른 하늘은 여유있다. ‘낯선 곳에서 창을 열고 멀리 내다보는’ 여유를 찾아 헤매는 것이 우리들의 먼 미래의 희망이다. 아닌가? 여전히 말없이 그것을 내다 볼 밖에.

  손에 잡힐 듯이 눈앞에 떠 있는 흰 구름이 소리도 없이 사라지고 다른 모습으로 헤어졌다 다시 만난다. 목적 없이 그렇게 흘러가는 아주 오래된 기억이 배꼽이다. 생의 근원이며 절망의 출발이고 다시 돌아가야 할 침묵의 바다이다. 가만히 내 배꼽을 들여다본다.


080810-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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