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없는 원숭이 - 동물학적 인간론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김석희 옮김 / 문예춘추(네모북)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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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 입는 원숭이들은 오늘도 안녕하신가? 인간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말로 들리는 이 인사가 흑인들의 “What's up?"처럼 지구 인류 문명에 대한 통렬한 풍자로 들릴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은 지나친 비관주의일까?

  어떤 어려움과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생존해 왔으며 진화하고 있다는 믿음은 굳건하다. 교에 기대든 과학기술에 의존하든 이 믿음은 영원히 유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구의 역사에서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리 낙관적이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잠시 빌려 쓰는 행성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못하는 종족이 멸종하지 않고 지속되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193종의 원숭이와 유인원 가운데 유일하게 털이 없는 원숭이인 인간에 대한 본질은 무엇일까?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불가능하다고 전제한다면 데즈먼드 모리스의 <털없는 원숭이>는 인간에 대한 주관적 해석에 불과하다. 그러나 동물학이라는 학문적 관점에서 인간을 하나의 동물로 간주하고 관찰하자면 문명사에서 위치를 지워버려야 한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관점을 가지고서는 이 책을 읽을 필요조차 없다.

  결국, 언어를 사용하며 정교한 손을 사용할 줄 알며 이성이 발달했다는 몇 가지 특성을 제외하고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털없는 원숭이에 불과하다는 평가는 정확해 보인다. 1967년에 출판될 당시의 논란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 자체가 인간에 대한 모독이며 신성 모독이라는 평가는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무너뜨린 것 같은 한 동물학자의 도발적 발언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들의 본질이다.

  21세기에 <털없는 원숭이>를 털없는 원숭이는 숭고함을 느낀다. 아무리 미사여구와 화려한 수사로 포장해도 인간은 한 마리 원숭이에 불과하다. 본능에 내재한 숨겨진 동물적 속성들은 당연한 것이면서도 충격적인 사실들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우리는 숲에서 도대체 몇 발짝이나 벗어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인간에 대한 필독서 1위에 오를 만하다. 지금까지 인간의 영혼 혹은 지적 영역에서 다루어진 우리들의 본질이 여지없이 무너진다. 동물학적 인간론은 너무나 적나라하고 솔직하며 기발하고 자극적이다. 독창적인 관점과 놀랄만한 호기심으로 인간을 관찰하고 있는 듯 한 이 책은 비범한 종인 인간의 모든 것을 해부한다.

  인간의 편견은 무섭다. 문화와 종교, 관습과 규범들에 의해 사회가 유지된다고 하지만 비판적 관점 없이 살다보면 털 있는 원숭이들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된다. 저자는 편견이라는 거인의 잠을 깨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시도하는 용기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놀랍기만 하다. 무자비한 진보를 외치며 친척 동물들을 모조리 파괴하고 심지어 같은 인간끼리도 이유 없이 학살하는 유일한 종에 대한 반성은 이 책 영역 밖의 일이지만 생각의 갈피는 끝없이 뻗어나간다.

  기원, 짝짓기, 기르기, 모험심, 싸움, 먹기, 몸손질, 다른 동물들과의 관계 등 전체 8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권 <인간 동물원>과 3권 <친교 행동> 등 3부작으로 마무리 된 이 시리즈는 철저하게 인간을 동물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또 다른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그 내용과 관점은 인간에 대해 고찰한 어떤 책보다 그 한계를 뛰고 넘고 있다.

  지구의 역사를 12시간으로 본다면 인류의 역사는 11시 59분에 시작됐다는 비유는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짧은 시간동안 그만큼 비약적으로 진화한 인간에 대한 고찰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어떤 분야에서 어떤 관점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최근 진화생물학에 대한 관심으로 데이비드 버스의 <욕망의 진화>라는 걸출한 역서를 만난 적이 있지만 이 책을 놓쳤더라면 크게 후회할 뻔했다.

  현대 사회의 복잡한 관계와 긴장감 속에서 인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고 싶은 사람은 천천히 이 책의 책장을 넘겨보아야 할 것이다. 심리학에 대한 관심만큼 진화론의 관점에서 인간의 본질적인 측면에 대한 호기심은 지속될 것이다. 보다 솔직하고 다양한 관점의 책들이 여럿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의 내용만큼 직접적이고 정확하지는 않을 것이다.

  명불허전名不虛傳.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정받은 책들은 헛된 이름만을 전하는 법이 없다. 수많은 책들 속에서 옥석을 가리고 탁월한 저서들을 골라내고 소화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할 수가 없다. 쉽지 않고 만만치 않지만 안목은 저절로 생기지 않고 읽는다고 모두 내것이 되지는 않는다. 왜, 어떻게,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본다.

  한 마리 털 없는 원숭이는 오늘도 스스로가 원숭이인 줄도 모르고 꾸역꾸역 뭔가 머릿속에 집어넣기 위해 책장을 넘기고 있으며 죽음의 길로 걸어가는 그 허망한 생이 지속되고 있다. 시니컬한 비관주의로 인도하는 책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이 책을 읽고 난 아주 사적인 상념일 뿐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아주 좁은 관계들을 돌아보고 주변의 모든 인간들을 털 없는 원숭이의 관점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있다.

우리에게는 다행히도 어린 시절의 창의성과 호기심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어른들이 많다. 이들이야말로 인류가 계속 진보하고 팽창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이다. - P. 168

08110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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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 창비시선 292
고은 지음 / 창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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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50년쯤 쓰면 어떤 기분이 들까? 연필을 들면 저절로 시가 써질 것만 같으다. 모든 언어가 조화를 부려 종이에 펜을 대는 순간 막힘없이 자유롭게 배열될 것만 같으다. 고은의 50주년 기념 시집을 읽으며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부터 시를 쓴 사람에 대한 경의로움에 젖는다.

  시간은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한다. 그리고 여백을 남길 것이다. 모든 관계와 모든 사물들을 무화無化시킨다. 신작 시집 제목은 그래서 <허공>일까?

빈 공간에 그려내는 절제된 언어의 진경은 예사롭지 않고 나이를 넘어 그의 전성기가 어디인지 독자들을 당황스럽게 한다. 고은이 보여주는 시는 지금부터까 아닐까?

추억 하나

사랑이든
사랑의 밑창
미움이든
그것 뛰어넘어서

너 거기 허공에 대고
총을 쏘아보았어?

나는 열일곱살 때 용케 살아남아
미 육군 이탈사병 오웰의 M1소총으로
허공
거기 대고
세 발
네 발 연발로 쏘아보았어

허공은 적이 아니더군
그 총알들 어디로 갔을까
오 킬로미터쯤
육 킬로미터쯤 갔을까
가는 동안의 직선이 포물선으로 바뀌어
끝내
검불 하나도 건드릴 힘 없이 툭 떨어질 때
거기가 내 저승일까 어디였을까

아직도 나 이승의 은산철벽(銀山鐵壁) 여기 줄곧 처박혀 있어


땅끝

해남 땅 끝에 왔습니다
살아온 날들
잘못 살아온 날들도 함께 왔습니다

천근의 회한 내버리고
여기 술 먹은 밤 파도소리에 먼저 온 누구의 이승이 혼자 떠 있습니다


  추억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 사랑도 미움도. 시간 속에 녹슬어 버린 기억의 편린들을 더듬어보는 老詩人에겐 무엇이 보였을까? 경험한 것 이상은 쓸 수 없는 것이 작가의 한계라지만 사유의 진폭은 직접 경험을 뛰어 넘어 환상과 상상의 공간을 오가기도 하고 생각의 갈피들을 헤집고 다니기도 한다.

  고은의 시는 땅끝에서 다시 하늘로 날아오른다. 술 먹은 밤 파도소리를 들어 본 사람은 지난 날들과 회한에 대해 고개를 끄덕여 줄 것이다. 단정한 시들이 뿜어내는 조용한 목소리는 듣기 좋게 공명된다.

갈망

혼간 허울 바람에 날리는 영광들의 한 생애 얼룩졌다
번뇌들
맹신들
다 두고
여기 왔다

서해 저녁 밀물 앞에서 한동안 나는 올데갈데없다.


밤비 소리

천년 전 너는 너였고
천년 후 너는 나이리라 어김없으리라

이렇게 두 귀머거리로

너와 나
함께 귀 기울인다

밤비 소리


  자연에 몰입하는 노년의 일반적 경향으로는 볼 수 없다. 선시처럼 의미의 충돌과 비약이 없고 가볍거나 즉흥적이지 않다. 깊은 사색의 결과이며 언어 이전의 세계와 마주하는 느낌이다. 손에서 놓여난 모든 욕망들, 삶과 죽음들 속으로 천천히 산책하고 싶어진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아니어도 좋다. 가랑잎에 부대끼는 낮은 곳으로 흘러드는 모든 물소리, 소리들. 바다에 모이자는 약속들일지도 모르겠다. 한 편의 시는 끝없는 상상의 세계로 혹은 환상의 나라로 이끌어 주는 동화의 나라가 되기도 한다. 내게.

후배에게

국가는 섬세할 수 없단다 국가는 그냥 왈패란다
그럴수록 문학은 섬세해야 한단다
자네 문학이
행여나
떠밀리고 떠밀려
변방 읍내 호프집에 처박히게 될지라도
낙담 말게

더더욱 외따로 고개 저어 섬세하고 섬세할 노릇일세

장차 그 섬세함의 장관이라니


  고은의 작은 문학론은 그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국가가 왈패라면 문학은 섬세함이라는 단순한 언명이 깊이 울린다. 문학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고은이 보여준 이력들은 묵언으로 보여준다. 그가 노벨상 후보에 오르든 말든 중요한 것은 그의 시를 읽는 것이다. 세간에 관심은 노벨상이 아니라 그의 시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죽음’, ‘여생’, ‘무한’을 골랐다. 이쯤 되면 시인도 생의 황혼에 대해 죽음과 허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탐욕과 허욕으로부터 자유롭고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는 두려움의 끝에 대해 가만가만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시인은 자유를 얻었을까?

죽음을 보며

오랜 두려움 끝
이제 두렵지않다
오전의 하늘에 없던 구름이 슬쩍 와 있다
구름 밑
산이 간다
산 밑
산그늘이 간다
그동안 내가 나에게 목숨 바쳤다

정말이지
죽음은 남이 아니다 아니구말구


여생

감히 고백하건대
저는 안이 아닙니다
밖입니다
저는 이 나라 안의 고아가 아닙니다
무한 밖의 미아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무한

이 무한가능 하염없는 백지 없이는
저의 여생 하루도 한나절도 숨막혀 살 수 없습니다
탐욕이 아닙니다
허욕이 아닙니다
절절히 현실 뒤켠 아스라이 백척 낭떠러지입니다


  나는 자주, ‘하늘’을 바라보며 ‘자유’에 대해서 생각한다.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생기는 것인줄도 모른채 반편이처럼 자유에 대해 늘 고민한다. 자유는 어떤 상태나 상황이 아니라 완전한 무애無碍의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자유롭다는 의식조차 없어진 마음의 상태가 가능한지 모르지만 50년쯤 시를 쓰고 나면 혹여 그런 상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 보았다. 고은의 詩와는 무관하게.


081028-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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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가 되는 삶들 -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 What's Up 4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새물결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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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을 소비의 과정으로 보면 참 재미있다. 무엇인가 사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그것을 버리고 또 사기 위해 땀나게 돈을 번다. 또 사서 버리고 또 사고 버리고……. 지구를 빌려 쓰는 인간에게 무한한 특권이 부여된 적이 없으나 오만한 인간은 오늘도 땅 속은 물론 바다 속까지 샅샅이 훑어내고 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살고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먼 미래에 대한 전망들이 난무하지만 오늘의 소비 욕망을 절대로, 멈출 생각은 없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익숙한 생활 패턴 속에서 문제점을 발견하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고 소비는 또 다른 소비를 부르고 욕망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어찌할 것인가? 지금 이대로의 삶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까? 지구는 인간을 위해 영원히 무한한 화석 에너지를 공급하고 인간은 자연을 정복했으니 지배할 수 있을까? 지속 가능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계속 되어야 한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전우익 선생이 살아 생전에 TV 인터뷰 하는 장면을 우연히 본 적이 있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를 통해 선생이 말씀 하셨던 이야기들을 우리는 얼마나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은 인간 종족의 사회생활에 대한 통렬한 자아비판서이다. 삶의 방향과 목적에 대한 수많은 질문과 대답 속에서 보다 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저자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조망한다. 매우 우울하고 슬픈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 때문에 가슴이 서늘하다. 어디쯤 가고 있는지 우리 삶의 조감도를 볼 수 없어 답답할 때 이 책은 유용한 안내서가 될 듯하다. 그 효용가치를 다 하고 쓸모없는 것을 우리는 쓰레기라고 부른다. 세상에 널려 있는 쓰레기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우리가 쓰레기라고 분류하는 것들 중에 정말로 쓰레기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없을까?

  현대성(modernity)에 기초한 철학적 성찰로부터 출발한 이 책은 인간의 삶을 조망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앞서 언급한 일상생활의 쓰레기와 무관하다. 생산과 소비적 측면의 인간을 비난하거나 생태학적 관점에서 쓰여진 책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놀랍게도 인간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난민을 비롯한 최하층 계급에 속해 현대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쓰레기’로 비유하고 있다. 제목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들 이웃들의 삶을 보여주는 듯하다. 도심 재개발과 뉴타운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 난민수용소에서 철저하게 분리된 채 넘어설 수 없는 장벽 안에서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로 ‘쓰레기가 되는 삶들’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현대 사회 정보의 쓰레기부터 인간 쓰레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쓰레기’들에 관한 비참한 이야기가 낱낱이 고발된다. 우리는 쓰레기가 되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지만 과연 개인의 노력만으로 가능한지 의심스럽다. 저자의 진단은 모더니티에서 추방된 사람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예측이 아니라 그 과정을 파헤치고 있다. 질서 구축 과정이 만들어내 쓰레기, 경제 발전이 만들어낸 쓰레기, 지구화가 만들어낸 쓰레기로 대별하여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데 결국 쓰레기가 하나의 문화가 되어버린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What's up?" 시리즈의 하나인 이 책은 “별 일 없었지?”라는 미국 흑인 노예제도의 폭력성에 대한 비극적 증언에서 출발한다. 안부 인사라고 하기엔 공포스럽다. 이 말이 이제는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비정규직을 포함한 고단한 삶의 형태를 아우르는 말이 되고 있다. 감시와 처벌 속에 몸부림 치고 있는 우리에게 법의 준수와 제도적 안정이라는 말로 준엄한 심판을 내리고 있는 현실적 모순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연대와 우정이라는 가치로 폭력적 제도의 정당성을 깨트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모른척 외면할 수는 없는 일들이 일상화되어가고 있다. 내 한 몸 아무 일 없기를 바라다가는 나를 포함한 모두가 “What's up?"이라고 아침 인사를 해야 할 날이 멀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린스펀이 20년간의 경제 정책의 실수들을 고백하고 있지만 그 책임과 결과를 개인에게 돌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고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더더욱 암울하기만 하다.

  긍정적인 시선과 내일의 희망을 삶의 가치로 삼아야 한다는 원론적인 사탕발림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움직임들이 드러나야 한다. 실천적 지식인과 행동하는 대중들이 연대하지 않는 한 견고한 현실의 벽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점진적 변화든 급진적 개혁이든 목표와 방향을 잃고 헤매는 우리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가공할 만한 두려움으로 미래 사회가 진행될 것이라는 경고와 진단은 언제나 있어왔다. 비판적 관점과 문제점을 드러내는 방식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내어 놓으라고 외치고 싶을 때가 많다. 답답한 상황이 지속되어도 원인을 모르고 참담한 결과를 확인하고서야 다시 시작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한 사람의 견해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What's up?"이라는 인사말이 사라진 세상을 꿈꾸어야 한다. 이 책에서 인용한 폴 발레리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스스로의 생각을 다른 이의 표현을 따라 이해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힘부터 길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


081026-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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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 웹 2.0에 접속하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18
강원택 지음 / 책세상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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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곧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다른 말일 것이다. 지배와 피지배 개념으로서 인간의 특징을 정의하는 말일 수도 있고 수평적 개념으로서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수직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말일 수도 있다. 사회적 관계를 정교화하고 법과 제도가 개입되어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제도가 정치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인간은 한 순간도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모든 행위가 정치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는 현실 생활과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정치인들의 행위를 통해서나 신문이나 방송 등 언론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선거 행위를 통해 실제 생활 속에서 우리가 정치인들을 만들어내지만 스스로 만들어가는 참여 행위가 아니라 간접적이고 대의적인 수단으로 이용되기 때문에 선출된 정치인들의 행위를 굳게 믿어야하는 상황이 대부분이다. 생업에 종사하다 보면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다. 왕정이나 군주정을 통해 민주정이 자리를 잡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정치가 멀게만 느껴진다.

  한국 정치의 일천한 역사를 돌아보면 국민들의 참여와 의식은 더욱 소극적이며 수동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당 정치가 자리 잡지 못하는 있는 우리의 현실은 계보 정치나 지역에 기반을 둔 토호 정치가 맹위를 떨쳤고 정책 중심의 정치가 아니라 인물 위주의 정치가 자리를 잡고 있다. 어떤 정부나 정당이 집권을 해야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 이 사람이라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정치는 국민을 위한 봉사라는 생각보다 권력이며 자본이라는 믿음은 여전히 굳건해 보인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의 의식이 발달해 가면서 한국의 정치는 일대 혁신을 맞이한다. 그 주역은 바로 인터넷이다. 웹 2.0 시대를 맞이하여 바야흐로 한국 정치는 진일보 했으며 그 위험서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목소리와 직접 민주정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 놓았다. 인터넷은 이제 우리의 현실 생활은 물론 멀게만 느껴지던 정치까지도 각 가정까지 파고 들었다.

  그 출발은 물론 2002년 대선이었다. 노무현의 당선은 불가능해 보이던 현실 정치의 벽을 넘어 선 축제처럼 여겨졌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노무현의 최대 업적은 ‘당선 그 자체’에 있는 지도 모른다. 월드컵의 열기와 효선, 미선을 위한 촛불 집회를 거쳐 노무현의 당선으로 마무리된 현상들은 21세기의 새로운 변화를 예감했다. 그것은 참여와 소통 그리고 연대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었다. 국민들의 열망과 달리 참여 정부가 보여주었던 실망스러움은 접어두고라도 개혁과 변화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믿음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2008년 대한민국의 정치가 어떠하든, 경제라는 실체가 불분명한 괴물의 모습이 어떠하든 웹 2.0 시대의 한국인들은 과거의 정치 형태와 권력자로서 정치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미 정치 권력은 ‘시장’이 아니라 ‘시민’에게 넘어 왔다고 믿고 싶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힘이다.

  강원택의 <한국 정치 웹 2.0에 접속하다>는 바로 이러한 한국의 정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서다. 인터넷을 통해 대의민주주의의 단점들이 어떻게 보완될 수 있는지 살펴본다. 인터넷을 통한 참여의 한계와 문제점들은 당연히 지적될 수 있다. 하지만 변화하는 정치 환경에서 웹 2.0에 대한 현재와 미래는 결코 가볍게 취급할 수 없는 대상이 되었다.

  이 책에서는 의제 설정의 민주화, ‘대중의 지혜’, 선거와 프로슈머 유권자라는 핵심 개념들을 알기 쉽고 간단하게 진단하고 있다. 한국 정치의 진화를 위해서 법과 제도를 살펴보고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과연 한국 정치는 진일보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정치 행위에 참여하는 네티즌의 참여와 선거를 통한 정치 행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쉽게 정치인들을 욕하고 안주삼아 씹어대지만 내가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지는 반성하지 않는다.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내 생각이 과연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이기적 욕망인지 대다수를 위한 방법인지 깊이 고민하지 않을 때가 많다. 누구나 그렇다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한 정치 지형의 변화를 쉽게 기대할 수만은 없어 보인다. 그곳에도 소수의 활동가와 다수와 눈팅족과 무뇌충의 저항들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건전하고 올바른 방향으로만 모든 사람들이 질주할 수는 없어도 현재 상황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내 행동에 대한 책임은 분명하다. 어쩌면 세상은 소수의 정치인이나 권력가, 자본가에 의해서 굴러간다는 패배의식에서부터 변화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서 있는 여기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반성과 작은 실천들이 모여야 한다. 그것이 웹 2.0시대를 열어가는 우리들의 바람직한 모습은 아닐까 싶다. 정치는 정치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웹의 영역을 확장하고 즐거운 놀이의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변화는 시작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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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자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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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울한 환상과 성적 자극들이 모여 빚어내는 회색빛 소묘.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는 최근의 내 감정 상태만큼 극도로 불안하고 우울한 무채색으로 가득하다. 그 원인은 차치하고 내면의 풍경을 드러내는 방식과 현실에서 발현되는 모습들이 무성영화 시대의 흑백필름을 보는 듯했다. 우엘벡의 이 소설이 낳은 수많은 논란은 지극히 당연하다. 누가 이 소설의 의미를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끝없이 복잡한 미로를 찾아 헤매는 사람은 출구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어 오히려 행복할 것이다. 마음의 갈피 사이로 난 오솔길들, 상처 난 길섶의 들풀들, 흐린 하늘 아래 비추는 한 줄기 해살과 같은 형언할 수 없는 이미지와 숨결들이 배어나오는 소설이었다. 어떤 작품이든 마찬가지겠지만 독자의 감정이 이입되거나 영혼이 투영되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고개를 끄덕이며 동경한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다양한 효과를 나타내고 상반된 평가를 받기에 충분할 것 같다.

  작가의 말대로 이 책은 삶의 대부분을 20세기 후반기에 서유럽에서 보낸 한 남자의 이야기다. 최고 수준의 생물학자 미셸 제르진스키가 실종된다.

그리하여
오늘 처음으로,
우리는 옛 시대가 어떻게 종말을 고했는지 돌이켜보고자 한다.


  는 말로 프롤로그가 끝나면서 한 남자가 이야기는 시작된다.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를 대표하는 이 인물은 기독교로 설명될 수 없는 시대정신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20세기 말의 특별한 인물 유형을 보여준다. 아버지가 다른 미셸의 형 브뤼노는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통해 자라난 아이가 아니다. 동생 미셸 또한 한 어머니에게서 서로 다른 아버지의 아이들이 태어났으니 평범하다고 볼 수 없는 삶을 예고한다. 그들 형제는 만나게 되고 서로의 생을 위로하기도 하고 바라보기도 하며 고독과 우울 속에서 생을 버텨낸다.

  어린 시절 기숙사에서 당한 브뤼노의 모욕도 그토록 사랑했던 아나벨을 잡지 못하는 미셸도 결국 다른 몸에 숨어 있는 두 개의 영혼처럼 보였다. 그들이 드러내는 삶의 방식은 우리에게 너무도 낯설다. 68세대와 그들의 공동체 그 안에서 벌어지는 허위의식과 개인의 부조리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남겨준다. 길가에 떨어진 동전 지갑을 줍듯 탄핵사태에 대한 반발과 분노로 국회의원이 된 386들의 정치 행태가 떠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색적인 소설이다.

  적확한 심리 묘사와 내면 풍경은 기막힌 묘사와 적절한 어휘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오힐 냉정하고 객관적인 사실들을 건조하고 냉랭한 목소리로 독자에게 뱉어내듯 한다. 프랑스 소설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들로 기억될 것이다. 우엘벡이 의도적으로 논란을 예고했는지 알 수 없으나 성적인 부분에 대한 묘사나 등장인물의 취향뿐 만 아니라 그 원인과 삶의 과정들이 때론 불편하게 때론 어색하게 소설 속에 녹아 있다.

  한 인간에게 있어 고통이란 숙명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잘 견디지 못하고 극한적인 반응을 드러내기도 한다. 자살을 하기도 하며 과장된 목소리로 울부짖기도 한다. 그러나 섣불리 그만큼의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비교가 불가능하며 실존적 고민의 깊이는 개인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아픔과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우리는 오히려 연민을 느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거 회상과 현재의 삶을 연결시키는 연대기적 서술에 의존하면서 미래 사회까지 진단하는 이 소설을 쉽게 규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통해 보여준 미래 사회를 이 소설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 탁월한 예지력은 이 소설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는데 재미있는 것은 1998년에 출판된 이 책의 미래는 불과 몇 달 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10년 만에 커다란 기술의 진보나 생물학적 변화를 예고 했다기 보다는 현대 사회의 패러다임 자체가 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시인으로 데뷔한 작가라고 하는 데 읽어 본 적이 없으니 뭐라 말 할 수는 없지만 서사와 사건 중심의 소설이 아니라 섬세한 개인의 내면 묘사, 때때로 과거의 기억을 들추는 건조한 목소리가 오히려 읽는 사람을 답답하게 만든다. 땀과 태양이 엉겨 붙은 바람 한 점 없는 바닷가의 적막감. 작가는 이 소설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독자는 소설의 한 복판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당장 책장을 덮고 시원한 맥주를 목구멍에 들어붓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이 이 소설의 백미다.

  이 책은 시간의 모래 속에 사라져갈 우리 모두에게 경의를 바친다. 우리의 삶이 어떤 형태로 이어질 것인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한 인간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서 그 삶의 결들이 보여준 무늬들을 통해 짐작해 볼 수는 있다. 제르진스키가 사라진 곳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아보는 것이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우엘벡이 무엇을 보려주려 했든지 이 책은 내게 고통과 우울의 진한 페이소스를 안겨주었다. 자, 이제 밤하늘을 향해 기지개나 한 번 켜볼까?


08102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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