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세상 - 위기의 시대를 좌우할 열쇳말
박성민 외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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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확실성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이것을 인간의 패배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 반대라고 믿는다. - 일리야 프리고진, <확실성의 종말>

 ‘삶을 지배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행운Vitam regit fortuna, non sapientia’이라는 키케로의 말을 부정하기가 어렵다. 행운은 우연의 다른 말이 아닐까?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 모두 인과관계의 틀 속에서 해석이 가능하다면 삶은 정교한 퍼즐과 같아서 수학적 연산과 논리적 예측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물론 그렇지 않다. 세상은 불확실하고 삶은 불안하다. 우연과 행운에 기대어 사는 것이 인간이 숙명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끊임없이 예측 가능한, 안전한, 확실한 삶을 꿈꾼다. 불가능한 꿈에 도전하는 어리석음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점점 더 불안하고 피곤하다.

  인간의 역사는 이와 같은 불확실성을 줄이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리야 프리고진의 말대로 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확실성’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일지 모른다. 알 수 없는 미래, 불안한 확증은 어차피 모든 변화 가능성을 내포한 말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지배원리가 모든 불확실성을 담고 있다. 인간은 그 불확실성에 끝없이 도전해 왔지만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쪽으로 문명은 발달해 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의 삶이 예측 가능해진 것도 아니고 평화롭고 안정된 방향으로 진화해 온 것도 아니다. 세상은 변함없이 불안하며 예측할 수 없다.

  『불확실한 세상』은 현대 사회에 대한 진단이면서 과거와 미래 사회에 대한 해석이다. 열 명의 각 분야 전문가가 보여주는 ‘불확실성’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떤 원인과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독자들에게 되묻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반성이며 모르고 있는 분야에 대한 성찰이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들에 대한 지적 통찰을 위해 준비된 책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정치, 경제, 문화, 지구, 과학과 기술 분야 등 5개 분야에 각각 2명의 전문가가 ‘불확실성’을 주제로 쓴 글을 모은 책이다. 서문에 밝히고 있듯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소개한 내용을 조금 더 확대 발전시키면 한 권의 책으로도 손색이 없는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각론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들이 하나의 주제로 모여 흐르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에 ‘따로 또 같이’ 읽기 좋은 책이다. 순서나 계통이 필요한 읽기가 아니라 입체적이고 유기적인 관계를 생각하며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면서 읽어야 하는 책이기도 하다. 관련 분야에 대한 충실하고 깊이 있는 관심과 공부는 물론 독자들의 몫이다. 어찌 보면 수박 겉핥기식으로 해당 분야에 대해 제반 소개로 그칠 수 있는 단점도 안고 있다. 이런 종류의 책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오류이다. 하지만 이 책은 제한된 분량 안에서 충분한 고민과 정밀한 글쓰기를 통해 이러한 단점을 극복해 내고 있다.

정치란 '불확실'을 '확실'로 바꿔 대중들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도록 '가시거리'를 확보해 주는 기술인 것이다. 좋은 정치란 대중이 그 존재를 느끼지 못하도록 새벽에 쓰레기를 몰래 치우는 청소차와 같은 것이다. - P. 29

  대한민국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가지고 있는 혐오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국민위에 군림하고 권력집단이 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고 이권에 개입하는 협잡꾼에 불과한 정치인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정책 방향과 정권이 바뀌고 나면 또 다시 뒤집어지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시궁창의 쥐새끼만도 못한 이념 논쟁과 지역감정 부추기기로 일관하며 정책은 없고 선거의 몰이배만 있는 정치판을 보며 우리는 어떤 미래를 꿈꾸고 어떤 세상을 예상할 수 있겠는가.

  한국 사회에서 아마도 가장 불안한 분야가 정치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 책은 정치에서 출발한다. 박성민은 “사회가 개인의 감정이나 판단 혹은 도덕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움직여야 미래를 안정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라고 밝히고 있는데 공감이 가는 말이다. 우리의 정치 현실은 양지로 나온 조폭과 유사하다.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공천 여부가 결정되고 지역색이 뚜렷하며 소신도 정책도 없이 오로지 당선가능성만을 점친다. 선출직 정치인의 경우 당연한 현실이겠지만 상식도 없고 자신의 말고 행동이 끊임없이 모순되는 정치인들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정치를 외면하고 현실을 부정한다.

  『야성적 충동』, 『블랙스완』, 『넛지』 등 최근 경제학의 ‘불확실성’에 주목한 많은 책들을 토대로 한 박종현과 최정규의 글은 정확하고 날카롭다. 우리에게 정치보다 훨씬 피부에 와 닿는 경제현실은 ‘불확실성’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고 실감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분야이다. 리스크와 불확실성에 대한 저자의 용어정리를 살펴보면 왜 사람들의 경제행위가 논리가 아닌 감정과 직감에 의해 결정되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의외로 구멍이 많은 존재이다. 수많은 지식과 논리로 무장하고 있는 것 같지만 세상을 변화시키고 움직이는 힘은 여전히 감정과 직관에 의한 판단일지도 모른다.

리스크(주사위 도박)란 무엇이 일어날지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그 확률 분포를 알고 있는 경우를 지칭하는 용어임에 반해, 불확실성(주식 투자)이란 일어날 개연성은 있으나, 그 확률 분포를 알지 못하는 경우를 지칭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 P 92

실물 자산이나 금융 자산에 투자를 하거나 직장을 바꾸거나 결혼을 고려하는 등의 불확실한 상황에서 논리가 아닌 '감정'과 '직감이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 P 93


  문화뿐만 아니라 전지구적인 불확실성은 환경, 과학, 기술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그래서 광우병, 유전자 조작 식품(GMO) 등 예측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지만 우리의 불안은 오히려 증폭될 뿐이다. 석유의 고갈, 지구 온난화 등 과학과 환경 분야의 불확실성은 오히려 고조하고 있다.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지속적으로 나아졌다고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손 놓고 앉아 당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강양구의 말대로 사랑과 우애 그리고 연대를 직접 실천하는 길만이 인간의 길이다.

  세상은 불안하고 불확실한 곳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그 불확실성에 대한 원인과 결과를 살펴보는 일은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불확실한 세상을 확실한 세상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불안을 덜어주고 함께 손잡고 걸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확실한 방법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조금 더 가까이, 그리고 냉정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삼과 세상을 바라보자. 함께 걷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조금은 위안이 되고 덜 불안할 것이다.

불확실한 세상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가장 큰 선물은,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잠시 잊고 살았던 사랑, 우애, 연대 등의 가치를 떠올리고 직접 실천할 수 있는 기회이다 - P.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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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 문학과지성 시인선 373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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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일찍 쓰련다. 찬란했다고.

차가운 물의 명백함을, 물이 들어 지워지지 않는 그 격렬한 시간들을 차마 어떻게 마주한 것인지. 균형이었는지. 전부였는지. 그러므로 조금 미리 쓰련다. 당신도 찬란했다면 당신 덕분에 찬란했다고.


  한 편의 시와 다르게 한 권의 시집을 읽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와 무게로 다가온다. 한 편의 시는 낱낱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지만 한 권의 시집은 전체 의미를 드러내는 유기체와 같이 시인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 긴 호흡으로 풍부한 소리를 내는 교향악과 같다. 한 편의 시가 기교를 뽐내는 독주와 같다면 한 권의 시집은 다양한 인물 군상을 드러내는 대하소설과 같다. 그래서 한 시인의 시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집을 읽고 또 그 다음 시집을 읽으며 변화 과정을 살펴보는 즐거움을 맛보아야 한다.

  창비에서 나온 『바람의 사생활』과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찬란』은 시세계의 차이와 변화보다 시간의 흐름과 출판사의 이미지가 달라졌을 뿐인 것 같다. 예전에 참여와 순수 문학을 대표하던 출판사의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특성이 모호해진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이병률의 새 시집 『찬란』은 시집 뒷면의 시인의 시작노트처럼 우리들 삶의 ‘찬란’에 대해 적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너무 이르다고 해서 찬란하며 너무 늦었다고 해서 찬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찬란은 생의 매순간마다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에 대한 헌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찬란’은 언제였을까? 매순간 찬란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어느 한 순간, 지나고 나면 그 때가 찬란했음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눈에 뭔가 들어가 있다. 괜히 필요하지도 않은 눈물을 흘렸고 그것도 모자라 인공 눈물까지 샀다. 병원은 커다란 안경을 통해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유리 조각이 박혀 있다고 했다.

- ‘내가 본 것’ 중에서

  시는 지독히 주관적인 영역의 문학이다. 그래서 시인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도 하고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눈에 박힌 유리조각은 알지 못한다. 우리는 누구나 타인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고 생각하지만 손톱만한 자신의 실수도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다. 스스로 삼가고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동일한 사건과 사물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기억은 더욱더 그러하다. 내가 본 것은 내 안에서 다른 일과 사물과 사건이 된다. 그래서 내가 본 것은 언제나 불안하기만 하다. 나와 타인을 믿을 수 없는 것은 인간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내 눈과 기억과 판단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눈은 ‘내가’라는 수식어가 주는 의미를 다시 확인하게 한다. 주관적 판단과 사물에 대한 감각을 어떻게 표현하더라도 그것이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주관이 아니라 객관적 정서와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안

혹시 이 안에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안에 있다
안에 있지 않느냐는 전화 문자에
나는 들킨 사람처럼 몸이 춥다

나는 안에 살고 있다
한시도 바깥인 적 없는 나는
이곳에 있기 위하여
온몸으로 지금까지 온 것인데

문자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혹시 여기 계신 분이 당신 맞습니까

나는 여기 있으며 안에 있다
안쪽이며 여기인 세계에 붙들려 있다

나는 지금 여기 있는 숱한 풍경들을 스치느라
저 바깥을 생각해본 적 없는데
여기 있느냐 묻는다

삶이 여기에 있으라 했다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이 있다. 사람은 그렇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나는 안에 있는 사람이다. 끝없이 밖을 지향하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안이 편하고 좋다. 밖에서 안을 지향하는 사람도 있고 밖에 있는 것을 만족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안’이 있고 ‘밖’이 있다. 우리가 어디서 삶의 의미를 찾고 ‘당신’을 찾을 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안의 세계가 진정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느 순간 ‘찬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생이 찬란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당신의 모든 생이 찬란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려고 한 것은 아닐까? 오월의 녹음은 눈이 부시다. 창 밖의 나무들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도 찬란하고 눈부신 햇살은 더더욱 찬란하다. .내 생의 찬란함, 아니 우리 모두의 찬란함을 위하여 이병률의 시집 한 권과 작은 마음의 여유를 준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싶은 밤이다.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 중략 ……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 ‘찬란’ 중에서



100514-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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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8 제너시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7
버나드 베켓 지음, 김현우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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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문제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담아낼 수 있느냐에 따라 소설은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의 범위를 넘어선다. 때로는 『소피의 세계』처럼 철학이 소설의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하고 서사 구조를 빌어 다양한 형식의 학문 영역이 융합되기도 한다. 그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이 펼쳐진다는 것은 소설의 재미가 갖는 매력 때문이다. 어찌됐든 소설은 여전히 사람과 삶에 대한 가장 깊은 고민과 통찰을 제공한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와 역사가 보여주는 다양한 이야기를 변주하며 현실과 미래를 조망하기도 하고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기도 한다. 따라서 모든 소설은 인간의 삶이며 역사이고 미래이다.

  미래 사회를 다룬 고전으로 올더스 헉슬리의『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1984』 등을 들 수 있다. 쥘 베른의『지구속 여행』은 SF 소설의 고전으로 손꼽을 만하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실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제시하는 데 소설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다. 얼마든지 상상하고 창조하고 파괴할 수 있는 세계가 바로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가의 창조력 상상력은 『해저 2만리』처럼 미래를 예견하고 과학의 발달을 선도하며 인간의 삶을 짐작할 수 있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이 멀지 않아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이성적 존재인 인간의 지식과 과학기술은 끝없는 문명의 진보를 초래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변함이 없다.

  네덜란드의 작가 버나드 베켓의 소설 『2058 제네시스』는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들을 쏟아낸다. <공각기동대>가 보여주는 인간과 인공지능 로봇의 미래사회 때문에 두려움은 물론 혼란스런 의문들을 가진 적이 있다. 충격적이기까지 했던 기억이 수많은 영화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지만 근본적인 질문에는 답이 없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기계의 차이가 단순히 뼈와 살과 피로 구분할 수 있는가. 과학적 경계를 넘어 존재론적 의문들에 대해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 소설은 독특한 형식과 깊이 있는 내용으로 이런 문제들에 대한 독자들의 깊은 고민을 요구하고 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를 미래 사회에 실현했다는 발상이 재미있는 소설이다. <허생전>의 ‘빈섬’이나 <홍길동전>의 ‘율도국’과 유사한 유토피아가 건설된 미래 사회는 행복할까? 세상과 단절된 후 신분과 계급에 맞게 완벽한 시스템 속에 갇힌 사람들의 삶은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을까? 작가는 가상의 유토피아를 만드는 일에는 서툴다. 서양의 고전철학에서 그 이상을 가져와 플라톤의 이데아를 실현하는 듯하지만 시스템을 감독하고 통제하고 지배하는 자들의 세계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음모와 함정을 숨기고 있다.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은 완전할 수 없고 어둠과 그림자가 있게 마련이다. 완벽한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그곳은 어쩌면 영원히 인간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복잡하고 완벽해 보이는 시스템에도 균열이 일어나며 그 작은 틈은 나비효과를 가져온다.

역사는 우리에게 음모이론의 무용성을 보여줍니다. 복잡한 것은 실수를 낳게 되고, 그런 실수 속에 편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 P. 49

  이 소설은 철저하게 대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험관과 아낙시맨더의 대화는 단순한 외화에 불과하다. 학술원에 들어가려는 아낙시맨더의 준비와 사유의 틀은 결국 전체 시스템의 균열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소설은 끝난다. 극적인 반전과 서스펜스를 즐기기 위한 소설이 아니다. 결론을 말한다고 해서 재미가 반감되는 것도 아니다. 이 소설은 시스템에 도전하는 아담과 인공지능 로봇 아트가 주인공이다. 둘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야말로 이 소설의 팽팽한 긴장의 끈이다. 인간과 로봇의 차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아담의 입을 통해 작가는 인간이 이룩한 이성과 합리적 제도 그리고 조직과 시스템을 움직이는 거대한 권력과 음모에 대해 이야기한다. 과연 무엇을 위해 어디까지 개인을 희생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전체주의에 대한 반성에 앞서 개인의 삶과 행복의 의미를 묻고 있는 듯하다. 철학적,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한 성찰과 논쟁으로 이 소설을 읽을 수도 있겠지만 단순하게 행복이란 무엇인지, 인간의 삶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부호로 읽어도 좋다. 물론 정답은 없다.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른 생각을 가지고 생의 목적과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공통분모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역시 시간이 흐르면, 행동은 습관이 되고, 습관이 이성을 조금씩 몰아내, 결국 이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죠. 아담은 자기 머리를 믿지만, 결국 마음을 따릅니다. - P. 113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따라가는 존재가 인간이 아닐까? 작가는 이성보다 감성을, 논리보다 직관을 인간의 본능적 도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모두가 공감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창밖에 연녹색 이파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작가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며 인간에게는 인간의 길이 있는 법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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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법을 만나다 - 예술의 자유와 법의 구속을 말한다
박홍규 지음 / 이다미디어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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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예술은 삶의 갈등이라는 동일 현상을 함께 다루고, 위대한 예술 작품은 법이 지향해야 할 인권의 신장을 지향한다. 그런 예술이 우리에게 없는 것은 예술가들의 사고와 경험 및 시야가 좁기 때문이고, 사회 전반의 지적 수준과 폭, 법치가 후진성을 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인권의식이 낮은 탓이다. - P. 44

  우리 사회에서 예술가는 정치가나 법률가의 역할과 활동범위보다 좁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예술가들에 대한 비난과 냉소를 넘어 모욕에 가깝다. 자유롭게 사유하고 활동할 수 없는 사회적 상황과 역사적 맥락을 탓하기 이전에 기존 질서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몸짓이 부족했다는 점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생각과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적어도 예술은 네모난 틀에서 벗어나 규범과 기존 질서에 의문을 던지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미적 성취를 이뤄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본능적으로 미의식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지만 순수한 미적 감동은 오로지 자연과의 조화로움에서 기인한다. 순응적 질서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이끌어 내는 안일한 역할은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닐까. 기술이 아닌 예술은 모방이 아닌 창조여야 하며 새로운 질서와 낯선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는 완고한 질서와 규범이 자리 잡고 있으며 예외적인 일탈 행동과 틀에서 벗어난 생각을 좀체로 용납하지 않는다. 마치 학교교육처럼. 하지만 예술가는 바로 이런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무질서한 세계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따라서 법과 예술은 상충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다. 박홍규의 『예술, 법을 만나다』는 화해할 수 없는 둘의 관계를 조망하는 책이다.

  『예술, 정치를 만나다』에서 예술가도 사회를 떠나 살 수 없는 정치적 인간임을 확인한 저자가 이번에는 전공인 법과 예술의 관계를 파헤친다. 평소 폭넓은 인문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나의 주제를 꼼꼼하게 짚어나가는 저자 특유의 솜씨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예술과 법의 충돌을 이야기한다. 자유분방해야 하는 예술과 빈틈과 오차를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법은 한 이불을 덮을 수 없다. 법과 예술의 행복한 만남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의 목적은 예술과 법의 조화로움을 추구한다. 두 세계는 불행하게 만났고 지금도 여전히 서로의 영역에 대한 이해 부족과 자신의 영역에 대한 고집으로 불편한 관계일 수밖에 없다. 이 불편한 공존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저자가 가진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이 책을 단순히 예술과 법의 충돌과 화해에 그치지 않고 즐거운 예술사, 폭넚은 인문학의 성찬으로 만들고 있다.

  프롤로그에서 정의의 여신상과 법의 정의를 일갈하고 1, 2장에서 법과 예술의 행복한 그리고 불행한 만남을 역설한다. 이후에는 영화 속에 나타난 법의 모습을 살펴본다. 인권과 영화, 재판 영화는 물론 현실에서 법으로 금지된 영화에 이르기까지 현실의 법과 영화 속의 법을 함께 돌아본다. 그리고 호메로스에서 괴테, 19세기, 20세기 문학과 법을 살펴본다. 음과 법, 미술과 법은 물론이다. 이렇게 크게 영화, 문학, 음악, 미술과 법의 관계를 고찰하는 동안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예술이 인간을 떠나 존재하기 힘들 듯이 인간과 가장 멀고도 가까운 법 또한 예술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결국 인간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사는 존재이고 예술은 그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법은 예술의 영원한 주제이면서 인간의 존재 양상을 살피는 도구가 된다. 현실적으로 억압의 도구가 되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며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부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과 법의 관계를 살피고 억압과 구속의 고리를 끊고 어두운 이면을 드러낼 수 있는 것 또한 예술의 중요한 역할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한없이 자유로운 사회를 꿈꾼 예술가가 없듯이 법과 질서를 통해서만 행복한 사회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조화와 균형은 기준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재단한다. 그것이 예술이든 법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술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유희 본능에서 출발한다. 일차원적인 욕망을 통제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법은 그 무분별하고 이기적인 욕망을 제한한다. 그래서 어쩌면 서로 다른 얼굴을 한 두 세계가 공존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두 세계는 끊임없이 서로를 욕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유와 구속의 화려한 이중주, 위험한 줄타기가 바로 예술과 법이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아닐까 싶다.

법학이란 기본적으로 어떤 다툼에 어떤 법을 적용하는 기술에 불과하다. 말자면 컴퓨터의 키보드 같은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 기술을 사용하기 전에 가져야 될 가치 판단의 능력이다. 그런데 그 판단 능력은 법학이라는 기술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이 다루는 여러 현상에 대한 공부로부터 얻어질 수 있다, - P. 168

그래서 저자는 법을 이렇게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단한 권력을 가진 법률가들에게 던지는 통렬한 자기 반성의 촉구가 아닐 수 없다. 기술자가 아니라 인간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존엄을 가지려면 법학 지식이 아니라 그 법이 다루는 인간과 현상에 대한 깊은 고뇌와 폭넓은 지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한민국의 만연한 법치(?)의 정신을 진정한 법의 역할과 권리로 착각할 지도 모른다.

 “모든 규칙, 모든 규범은 죽음을 낳는다.”(앙소르) - P.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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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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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 [食口]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

가족 [家族]
1 부부와 같이 혼인으로 맺어지거나, 부모·자식과 같이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집단. 또는 그 구성원. ≒처노(妻孥) .
2 <법률> 동일한 호적 내에 있는 친족.

  가족이 친족으로 이루어진 폐쇄적 집단이라면 식구는 끼니를 함께하는 열린 개념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는 말은 생면부지라도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확인되는 순간 모든 관계의 룰을 넘어서는 것이 한국적 전통의 가족이다. 살을 부대끼며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 곧 식구이고, 식구가 곧 가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식구가 곧 가족인지도 모르겠다.

  사회학적으로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일부다처에서 일부일처로 변화한 것은 권력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아직도 지구상에는 모계사회나 일처다부제가 존재하기도 하지만 문명국가의 가족제도는 대체로 일부일처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박현욱은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현대사회의 일부일처제에 대해 재치 있게 의문을 던졌다. 앞으로 가족의 개념이 어떤 형태로 달라지고 그 의미가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21세기가 되어도 한국적 개념의 가족은 견고한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아니 어쩌면 불안한 사회일수록 경쟁적 관계의 사회질서가 강화될수록 가족의 유대는 더욱 공고해질지도 모른다.

  독일의 사회학자 퇴니스가 분류했듯이 가족은 자발적이고 의도적인 목적이 개입된 집단이 아닌 공동사회에 해당한다. 이해관계를 떠나 오로지 혈연관계로 이어져 분리될 수 없는 관계로 치부되는 것이 한국적 개념의 가족이다. 따라서 입양, 재혼, 혼외정사 등에 의해 새롭게 결합된 가족의 경우 한국인의 정서로는 온전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천명관은 이런 예민한 문제로부터 『고령화 가족』을 온전한 가족으로 만들어냈다.

  사십대 후반의 화자인 나는 관객을 배신했다는 평가를 받은, 철저하게 망해버린 영화를 만든 실패한 영화감독이다. 스튜어디스 출신 아내와 이혼하고 신용불량자가 되어 칠순이 넘은 어머니에게 돌아가지만 오십대 초반의 전과자 백수 형이 먼저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면서 남긴 보상금으로 마련한 연립주택에 이혼하고 중학교에 다니는 딸을 데리고 돌아온 여동생이 결합하면서 다섯 식구가 완성된다. 뒤늦게 다시 모인 형제들은 서로의 상처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전처 자식인 형과 어머니의 불륜으로 얻은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이 이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제각각 말할 수 없는 상처와 신산스런 고통을 맛본 가족들이 다시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묻기 전에 ‘밥벌이의 지겨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족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려 한 것은 그저 통속적이고 특별할 것 없는 우리들의 삶의 단면이 아닐까.

하지만 인생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법이다. 지루한 일상과 수많은 시행착오, 어리석은 욕망과 부주의한 선택……인생은 단지 구십 분의 플롯을 멋지게 꾸미는 일이 아니라 곳곳에 널려 있는 함정을 피해 평생 동안 도망다녀야 하는 일이리라.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해피엔딩을 꿈꾸면서 말이다. - P. 45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기대하는 것처럼 우리 삶의 해피엔딩을 꿈꾼다. 그것을 희망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은 영화와 다르다. 작가는 그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지루한 일상, 수많은 시행착오, 어리석은 욕망과 부주의한 선택을 이 소설의 곳곳에 배치한다.

  찌질한 인간의 향연이라고 할 만한 인생 막장 드라마와 같은 소설을 읽는 내내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가족이라는 이름의 중심에 선 어머니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어머니의 존재는 이 소설에서 ‘밥’으로 대변된다. 먹이는 일에 목숨을 거는 듯한 모습에서 우리는 평범한 어머니를 읽게된다. 가족으로 묶일 수도 없는 3남매의 연결고리가 되어 한 가족을 이끌고 살아온 어머니를 통해 형제들은 각기 또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 마치 생의 출발과 종착역 같은 어머니의 모습은 이 소설에서도 여전히 따뜻함의 원천이 된다.

  더불어 『고래』에서 보여주었던 거침없는 상상력과 영화 스토리 같은 사건 전개 걸쭉한 입담과 구라 솜씨는 소설의 흡입력으로 작용한다.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는 인생에 대해 우리는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된다. 삶의 의미와 가족에 대해.

나는 언제나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고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 P. 286쪽

  생의 마지막 순간에 얻지도 못하고 말 깨달음은 아닐까. 항상 미래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 모든 순간과 과정이 바로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사실을 언제쯤 인정하게 될지 모르겠다.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인 삶이 아니라 즐겁고 행복하게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인생을 위해 다시 한 번 주변을 돌아볼 일이다. 가족을 넘어 우리 모두의 행복한 삶을 위해!


10050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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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레인보우의 관심사는 저출산, 고령화, 인플레이션, 은퇴, 연금. 모두 연관되어 있습니다.
    from 낚시질은 이제 그만!!! 레인보우의 보험 뽀개기 2010-05-20 13:50 
    레인보우의 관심사는 저출산과 그리고 고령화입니다. 저출산의 문제와 고령화의 문제는 어떤것이 먼저라고 할 것없이 밀접한 연관성이 있고 해결방안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포스팅을 저출산과 고령화로 설정하고 왜 저출산과 고령화가 레인보우의 관심사인지는 부족한 글솜씨로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유 저출산/고령화 문제는 저 개인적인 문제를 떠나서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를 야기할까요? 먼저 저출산으로 인한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인구재앙은 이미 소리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