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 표절 - 문학과 예술의 전통적 연대기를 전복하여 무한히 확장된 독서의 세계로 빠져들다 패러독스 3
피에르 바야르 지음, 백선희 옮김 / 여름언덕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모든 표절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새롭다는 것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창조한다는 순수한 의미뿐만 아니라 기존의 것을 변형하거나 재구성하는 것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새로움을 포함한다. 특허와 실용신안으로 새로움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에 비해 예술품에 대한 권리는 모호하기만 하다. ‘표절’에 대한 논란은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분명한 기준과 잣대가 모호하다. 비슷한 것과 그대로 인용한 것의 차이는 보는 사람의 시각과 관점에 따라 다르게 판단될 수밖에 없다.

예술 작품에서 표절은 앞선 시대의 작품을 베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거꾸로 미래의 누군가를 표절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상식적으로 웃어버릴 수 있는 이야기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는 사람이 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책으로 기발하고 탁월한 견해로 찬사를 받았던 프랑스의 인문학자 피에르 바야르가 이번에는 『예상 표절』이라는 책을 내 놓았다. 피에르는 ‘예상 표절’이라는 낯선 개념을 통해 상식을 뒤집는다. ‘읽지 않는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래의 어떤 작품을 표절할 수 있다는 발상은 장난스런 발상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책은 넌센스 퀴즈를 위한 혹은 사소한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볼테르의 셜록홈즈의 모험담을 표절했다거나 모파상이 프루스트를 표절했다고 주장은 구체적인 작품들의 장면을 인용한다.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의 선후 관계를 전복적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견해는 진지하고 구체적이다. 전통 표절과 구별되는 예상 표절은 쌍방 표절이라는 개념까지 도입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은 단순히 시간의 선후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작품에 대한 경외감은 아닐까?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당대의 흐름과 기법 혹은 연속적인 문학사의 흐름에서 벗어나 독특함에 대한 상찬으로 볼 수는 없을까?

미래를 예측하고 상상하는 능력을 갖춘 작가만이 ‘예상 표절’의 흐름에 동참할 수 있다면 존경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전통적인 의미의 표절이 비곤한 상상력과 부도덕함의 상징이라면 예상 표절은 오히려 창조적 상상력과 미래 지향적인 작가 정신에 대한 넉넉한 평가를 받아 마땅한 것은 아닐까 싶다. 시대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작가는 그런 의미에서 예상 표절이라는 기발한 개념으로 문학사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미래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시간의 복잡한 굴곡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려 깊은 문학 교육의 으뜸 역할 가운데 하나여야 할 것이다. - 피에르 바야르, <예상 표절>, 190쪽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히 ‘표절’ 자체에 대한 낯선 해석이 아니라 연대기적 서술에 의존하고 있는 문학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평가에 있다. 입체적이고 낯설게 바라볼 수 있다면 문학사는 단순히 작가와 작품의 시대적 흐름이나 영향관계를 직선적인 흐름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신선한 방법에 의해 재구성될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문학사는 단순한 문학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의 작품이 태어나고 독자에게 전달되고 소비되는 과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피에르 바야르의 숨은 의도는 바로 이러한 전복적 책읽기 - 문학사에 입체적 구성에 대한 시도는 아니었을까?

한 권의 책이 말을 거는 행복한 소수가 될 이 특혜 받은 수신인들을 언급하면서 스탕달은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동시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높이 평가할 줄 아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었다. 그렇게 그는 한 작가가 다른 시대들과 더불어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자기 시간의 제약으로부터 해방될 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암시하고 있었다. - 피에르 바야르, <예상 표절>, 193쪽

스탕달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저자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스탕달은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동시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높이 평가할 줄 아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었다’는 말은 바로 예상 표절에 대한 저자의 찬탄을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한 작가가 다른 시대들’ 즉 미래의 어느 시대에 탄생할 작품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시간의 제약’을 벗어났다는 것은 한 작가와 작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며 새로운 평가를 위한 기준이 될 법하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문학뿐만 아니라 인접 예술 분야나 철학과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입체적으로 그 의미를 살펴야 한다. 피에르의 ‘예상 표절’은 이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기준과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 재미있는 발상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또 다시 어떤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새로움을 전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피에르 바야르는 계속해서 주목할 만한 작가가 되었다. 그의 책도 미래의 누군가를 ‘예상 표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100709-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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