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 - 역사 교과서를 찢어버려라
임지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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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도 마찬가지지만, 역사에 관한 책을 읽기 전엔 항상 버릇처럼 제목을 한참 들여다 본다. 누군가 어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야기의 목적과 방법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듯이 역사도 마찬가지다. 세계사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면 어떤 목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먼저 확인해야 한다. 대략 갈 길을 짐작하고 거리와 방향을 알고 출발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과 많은 차이가 난다.

임지현의 책이라면 일단 방향과 목적이 보이는 듯하다. 뻔한 이야기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어떤 내용으로 그곳에 이르기 할 것인지 궁금해진다. 표지에는 이미 ‘새로운 세대를 위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고 ‘만들어진 역사, 국사와 세계사 교과서를 찢어버려라’는 도발적인 문구가 눈길을 끈다. 다소 자극적이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니 놀랄 것은 없다. 다만 얼마나 설득력 있는 이야기와 정교한 논리로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일 뿐.

이 책은 저자의 딸에게 보내는 형식의 역사 이야기를 역사 속 인물들에게 보내는 형식으로 각색한 것이다. 말하자면, 임지현의 『세계사 편지』는 자와할랄 네루의 『세계사 편력』의 형식을 빌려 온 것이다. 형식이야 어찌됐든 책의 내용과 깊이가 누구에게나 읽힐 만큼 훌륭하다.

어떤 사람들의 자유는 다른 사람들의 노동과 희생을 먹고 자란다. - 임지현, 『세계사 편지』, 머리말

비교역사문화연구소를 만들어 본질적인 역사인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만들어진 역사로서의 민족주의와 국사의 해체를 주장해 온 임지현은 이 책을 통해서도 세계사를 관통하는 편협한 역사인식에 반기를 든다. 19명의 문제적 인물을 등장시켜 말을 건네는 역사학자의 마음을 헤하려 볼 수 있는 책이다. 그들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하지만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들을 토대로 사건을 재해석하면서 독자들을 설득하는 것과 다름없다. 청자를 누구로 상정하든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접근 방식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에드워드 사이드, 『예수살렘의 아이히만』의 저자 한나 아렌트는 물론 김일성과 박정희 그리고 공자에 이르기까지 세계사의 결정적 장면에서 잊지 못할 인물들을 선정했다. 그 면면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저자의 역사적 관점과 이 책의 의미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간단한 인물에 대한 소개와 그 뒤로 이어지는 저자의 편지는 독자에게 새로운 즐거움과 독특한 방식의 역사 이야기를 전해준다.

형식은 내용을 규정한다. 이러한 편지 형식은 일단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장점이 있다. 화석화된 인간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이고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물론 주된 내용은 독자들을 위해 객관적인 사실을 토대로 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접근 방법이다. 저자 특유의 관점이겠으나 비판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을 만한 일들을 회고한다. 일관된 방식으로 역사적 인물들의 잘못을 꾸짖거나 현재의 관점으로 아쉬움을 드러내는 방식은 아니다.

저자는 해박한 세계 역사에 대한 지식과 명료한 해석 능력을 갖추고 있다. 비교 연구가 가능하려면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그것은 이 책을 통해 그리고 저자가 써 내려간 편지의 행간을 통해 독자들이 찾아야 할 것이다. 각각의 인물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독자들은 제 3자의 관점을 취하게 된다. 독자에게 직접 서술하는 방식이 아니라 특정한 독자를 염두에 둔 글이기 때문에 책을 읽는 독자들은 다른 사람의 편지를 훔쳐 보는 느낌으로 조금 더 객관적 관점을 갖게 된다.

지나 간 역사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가정법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도 없다. 그것은 그저 현재의 관점으로 지나 간 시간을 돌아보는 하나의 방법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다양한 방법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다 보면 새로운 사실이 보이고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지금-여기’에 서 있는 우리들의 삶이 결국 과거의 연장선이고 미래의 거울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세계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이제 대학생이 되어 버린 딸 ‘희주’에게 역사 공부를 하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책을 맺는다. 나도 ‘내’가 서 있는 곳을 파헤쳐 본 후 과거를 돌아봐야겠다. 현재를 알지 못하고 내가 서 있는 곳의 뿌리와 근본을 알지 못한 채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지금, 바로 여기를 똑 바로 알지 못할 바에야 역사를 공부하지 말라는 역설적인 책 『세계사 편지』는 그래서 더욱 정밀한 역사 공부의 출발로 삼아야 할 것 같다.

너와 상관도 없는 먼 과거를 파헤치기보다는 우선 ‘네가 서 있는 곳을 파헤쳐라.’ 공식적 역사를 부정하고 밑으로부터 살아 있는 역사를 갈구했던 맨발의 스웨덴 역사가 스벤 린드크비스트의 주장이다. 그러니 지금까지처럼 ‘역사 공부’ 하지 말거라. - 임지현, 『세계사 편지』, 희주에게, 3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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