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 표절 - 문학과 예술의 전통적 연대기를 전복하여 무한히 확장된 독서의 세계로 빠져들다 패러독스 3
피에르 바야르 지음, 백선희 옮김 / 여름언덕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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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모든 표절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새롭다는 것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창조한다는 순수한 의미뿐만 아니라 기존의 것을 변형하거나 재구성하는 것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새로움을 포함한다. 특허와 실용신안으로 새로움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에 비해 예술품에 대한 권리는 모호하기만 하다. ‘표절’에 대한 논란은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분명한 기준과 잣대가 모호하다. 비슷한 것과 그대로 인용한 것의 차이는 보는 사람의 시각과 관점에 따라 다르게 판단될 수밖에 없다.

예술 작품에서 표절은 앞선 시대의 작품을 베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거꾸로 미래의 누군가를 표절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상식적으로 웃어버릴 수 있는 이야기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는 사람이 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책으로 기발하고 탁월한 견해로 찬사를 받았던 프랑스의 인문학자 피에르 바야르가 이번에는 『예상 표절』이라는 책을 내 놓았다. 피에르는 ‘예상 표절’이라는 낯선 개념을 통해 상식을 뒤집는다. ‘읽지 않는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래의 어떤 작품을 표절할 수 있다는 발상은 장난스런 발상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책은 넌센스 퀴즈를 위한 혹은 사소한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볼테르의 셜록홈즈의 모험담을 표절했다거나 모파상이 프루스트를 표절했다고 주장은 구체적인 작품들의 장면을 인용한다.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의 선후 관계를 전복적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견해는 진지하고 구체적이다. 전통 표절과 구별되는 예상 표절은 쌍방 표절이라는 개념까지 도입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은 단순히 시간의 선후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작품에 대한 경외감은 아닐까?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당대의 흐름과 기법 혹은 연속적인 문학사의 흐름에서 벗어나 독특함에 대한 상찬으로 볼 수는 없을까?

미래를 예측하고 상상하는 능력을 갖춘 작가만이 ‘예상 표절’의 흐름에 동참할 수 있다면 존경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전통적인 의미의 표절이 비곤한 상상력과 부도덕함의 상징이라면 예상 표절은 오히려 창조적 상상력과 미래 지향적인 작가 정신에 대한 넉넉한 평가를 받아 마땅한 것은 아닐까 싶다. 시대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작가는 그런 의미에서 예상 표절이라는 기발한 개념으로 문학사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미래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시간의 복잡한 굴곡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려 깊은 문학 교육의 으뜸 역할 가운데 하나여야 할 것이다. - 피에르 바야르, <예상 표절>, 190쪽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히 ‘표절’ 자체에 대한 낯선 해석이 아니라 연대기적 서술에 의존하고 있는 문학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평가에 있다. 입체적이고 낯설게 바라볼 수 있다면 문학사는 단순히 작가와 작품의 시대적 흐름이나 영향관계를 직선적인 흐름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신선한 방법에 의해 재구성될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문학사는 단순한 문학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의 작품이 태어나고 독자에게 전달되고 소비되는 과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피에르 바야르의 숨은 의도는 바로 이러한 전복적 책읽기 - 문학사에 입체적 구성에 대한 시도는 아니었을까?

한 권의 책이 말을 거는 행복한 소수가 될 이 특혜 받은 수신인들을 언급하면서 스탕달은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동시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높이 평가할 줄 아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었다. 그렇게 그는 한 작가가 다른 시대들과 더불어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자기 시간의 제약으로부터 해방될 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암시하고 있었다. - 피에르 바야르, <예상 표절>, 193쪽

스탕달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저자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스탕달은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동시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높이 평가할 줄 아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었다’는 말은 바로 예상 표절에 대한 저자의 찬탄을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한 작가가 다른 시대들’ 즉 미래의 어느 시대에 탄생할 작품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시간의 제약’을 벗어났다는 것은 한 작가와 작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며 새로운 평가를 위한 기준이 될 법하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문학뿐만 아니라 인접 예술 분야나 철학과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입체적으로 그 의미를 살펴야 한다. 피에르의 ‘예상 표절’은 이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기준과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 재미있는 발상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또 다시 어떤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새로움을 전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피에르 바야르는 계속해서 주목할 만한 작가가 되었다. 그의 책도 미래의 누군가를 ‘예상 표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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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 참을 수 없이 궁금한 마음의 미스터리
말콤 글래드웰 지음, 김태훈 옮김 / 김영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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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발상의 전환. 참 쉬운 것 같지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도 아니고 그렇게 쉽게 길러지는 능력도 아니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고는 훈련과 노력만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시각과 폭넓은 사유가 필요하지만 꾸준한 독서와 명상, 넉넉하고 여유 있는 마음과 즐겁고 유쾌한 생각들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지금 벌어지는 현상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이해가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내일을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반성과 성찰의 시간은 과거에 대한 미련이나 현재의 불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투자이며 삶의 방향과 목적을 새롭게 설정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은 바보처럼 굴러가기도 하지만 정교한 틀과 빈틈없는 이해관계로 얽혀있기도 하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생각이 서로 다르고 원인과 결과에 대한 평가도 제각각이다. 그 다양한 견해와 관점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자세히 살펴보자. 말콤 글래드웰은 이 작은 생각의 차이에 대해 명확하고 분석적인 사고를 요구한다.

『아웃라이어』를 읽고 『블링크』를 읽은 다음 말콤 글래드웰의 근작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를 보면서 말콤 글래드웰이 왜 팔리는 작가인가를 다시 확인했다. 비즈니스와 경제에 관한 수많은 책들 가운데 저자의 책들이 빛을 발하는 것은 발상의 전환 때문이다. 자기계발과 경제경영에 가장 근접한 분야를 이야기하지만 접근 방식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상품 가치를 높이고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치열하고 냉정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거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비법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잘못된 생각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한다.

저자의 목소리는 높고 강하지 않다. 편안하게 들어줄 수 있을 정도만 흥분하고 자신있게 설득할 수 있을 만큼만 주장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저자의 탁월한 능력은 정확하고 방대한 자료조사와 사실에 근거한 주장 때문이라는 1차적인 이유 이외에도 다양한 사례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방식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과 관점으로 세상을 재단한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에서 출발해서 자신의 생각과 왜, 어떻게 다른지 고민해보면 답은 어렵지 않게 구해질지도 모른다. 개를 사로잡는 달인의 몸짓을 통해 그가 개의 어떤 생각과 몸짓을 읽어내는지 궁금한 게 아니라 거꾸로 개가 도대체 무엇을 보았는지 궁금해 하는 태도가 바로 저자의 가장 큰 장점이다.

외골수, 선구자, 마이너 천재들부터 이론과 예측의 그리고 진단, 인격과 성격과 지성에 대한 이야기를 묶은 이 책은 하나의 주제를 향해 정교하게 써내려간 단행본이 아니라 여기 저기 발표한 글들을 묶어 놓은 책이다. 다소 산만하고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지만 다양하고 색다른 느낌의 글들을 색다르게 엮어 읽는 맛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행복은 우리가 얼마나 인간의 무한한 다양성에 맞는 방향으로 나아갔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이 말은 때로 우리가 익숙한 것을 즐기는 데서 행복을 찾는다는 사실을 잊게 맞든다. - 말콤 글래드웰,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86쪽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지만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품고 있는 타인의 생각에 대한 의문이다. 왜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에서 시작해서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알고 싶은 인간의 충동과 본능 속에 숨겨진 비밀은 무궁무진하다. 단순히 심리학이나 생물학적 본능으로 확인할 수 없는 수많은 원인들을 생각해 보는 것이 저자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아닐까 싶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그 무한한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그 존중에 걸맞는 이해와 적응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발상의 전환, 네모난 틀을 깨는 사고, 패러다임의 이동 등 어떤 이름으로 표현하든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 조금 달라질 수도 있고 조금 더 행복해질 수도 있다는 자각!

사람들은 오늘도 비슷한 어제를 살고 있을 것이다. 아마 내일도 오늘과 비슷하리라.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또는 내가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인지에 대한 작은 고민에서 새로운 삶은 시작된다. 변화 가능성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실천하고 부딪치고 또 다시 도전하며 새로움에 대한 갈증을 채워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고정관념의 틀을 가지고 있는가. 그 틀을 벗어나는 데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이 책은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아니 말콤 글래드웰의 다른 책들과 함께 늘 새롭고 신선한 삶의 태도를 요구하는 것 같다. 『블랙 스완』의 저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이야기에서 언급한 것처럼 동일한 패턴이나 예측 불가능성은 어쩌면 한 이불을 덮고 다른 꿈을 꾸는 남녀의 모습과 같다.

우리의 삶이 그러하다. 동일하게 그리고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는 듯 하지만 상상할 수 없는 다양성과 구체적 변화 속에 놓여 있다. 다만 그것들은 어쩌면 모두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삶의 불가해함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불안해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하게 견디고 있는 것이리라. 누구나 알고 있는 것 같은 그 차이들 속에 숨겨진 비밀의 문을 찾아내는 것이 저자의 보이지 않는 속삭임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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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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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를 결정하는 건 스피드?

1994년 10월 21일 아침 7시 40분경에 성수대교가 무너져 내리고 교각만 남은 장면을 TV에서 처음 봤을 때 황당함. 이듬해 1995년 6월 29일 붕괴된 삼풍 백화점의 처참함. 곧이어 1997년 IMF로 상징되는 한국 경제의 몰락.

우리는 혼란스런 근현대사에서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로 치장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어왔다. 하지만 밥은 먹고 살자는 생존을 넘어서 경주마처럼 돈벌레로 살아온 것은 아닌가 싶은 깊은 반성의 시간을 가진 적이 없다. 해방과 6.25로 이어지는 치열한 생존 경쟁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밟고 일어서야했으며 무엇보다도 삶의 목표와 철학적 성찰이 없었다. 거창한 이념이나 궁극적인 지향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박하게 내 아이들과 우리들의 미래는 이래야 한다는 공동체의 가치관이나 삶의 질에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아온 것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는 것이 곧바로 대한민국의 번영과 발전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이렇게 혼란스럽고 급변하는 상황에서 친일파가 그대로 우리 사회의 기득권이 되고 각종 이권을 선점하며 권력과 명예를 거머쥐는 뼈아픈 현대사가 전개된다. 시작부터 잘못 꿰어진 단추를 바로 잡으려니 이제는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지 60년이 넘었지만 이제는 그 정통성마저 부정하는 시도가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악취를 풍기는 수구 보수 세력은 철지난 이념 논쟁으로 공공연하게 온 국민을 협박한다. 21세기에 벌어지는 부끄러운 대한민국의 현실을 돌아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인간이라는 어느 역사가의 말대로 우리는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금방 잊어버리고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이제 발전의 속도와 차이가 아니라 발전의 방향과 질적인 면을 살펴야 할 때이다. 무한 경쟁 시대에서 살아남는 일이 중요했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통해 이념의 허망감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우리들의 모습이 크게 달라졌다고 보기 어렵다. 씨줄과 날줄처럼 정교하게 얽혀있는 우리의 삶은 시간과 공간의 축을 따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들며 자연스럽게 현상에 대한 원인을 찾고 결과를 예상하기도 한다. 역사가 그러하듯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지금-여기’의 삶은 오래된 미래일 뿐이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는 일은 추억을 더듬는 감상적인 행위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는 가장 기본적인 성찰이다.


숨가쁜 근대화의 파노라마, 그 빛과 그림자

황석영의 『강남몽』은 자본주의 상징인 백화점이 대한민국 강남 한복판에서 붕괴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일이 연이어 벌어졌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다음 해에 백화점이 무너졌다. 천박한 자본주의와 부패 사슬로 얽힌 건설업이 빚어낸 참극이었다. 이 소설은 백화점에 콘크리트 더미에 깔린 유한 마담 박선녀의 삶을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일제시대 일본군의 첩자 노릇을 하던 김진의 삶도 파란만장하다. 부동산과 강남 개발에 편승하여 투기 자본의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심남수까지 보태지면 대한민국의 현재를 보여주는 대표적 개인이라고 할 만하다. 거기에 조직폭력의 보스로 등장하는 홍양태가 가세한다.

정치와 경제는 분리될 수 없으며 더구나 우리의 삶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제 2의 이인국 박사 같은 ‘김진’은 신산스런 근현대사의 상처이자 아픔이다. 선악의 기준으로 김진과 박선녀, 심남수와 홍양태를 손가락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황 논리로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견뎌온 세월에 대한 아픈 성찰의 시간을 갖자는 것이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옷은 처음부터 다시 채워야 한다. 하지만 역사를 어찌 그리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는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한 편의 소설이 시대에 물음을 던지고 과거의 시간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우리 근현대사를 성찰하는 무거운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황석영의 『강남몽』은 최소한 우리 시대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강남’이라는 신화에 대한 근원을 파헤치고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한 편이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되느냐의 문제는 소설의 기본이다. 인터넷 연재라는 새로운 생산과 수용방식으로 독자와 만났던 소설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이제는 보편적인 방법이 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색다르게 바라볼 필요도 없지만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독자들의 흥미와 요구에 부흥하고 창작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독자들의 반응을 살폈을 작가의 속내를 상상해 본다.

가볍고 흥미진진한 단막극처럼 각 장의 주인공을 내세운 점이나 요정과 지하경제, 폭력세계 등 자극적인 요소들의 사적 전개 과정을 그린 점 등은 독자들의 호기심에 충분히 부흥했다는 면에서 성공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근대화 과정에서 펼쳐진 발전의 이면이 아니라 소설적 재미를 위한 양념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의 궁극적인 목적이 우리 사회의 아픈 성장과정을 그린 대한민국의 성장소설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누구나 겪는 ‘성장통’이라고 치부하기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너무 많다. 아니 어쩌면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가 나아갈 공동체의 가치와 대한민국이 만들어가야 할 문화에 대한 반성은 지난 시간을 통한 지금 이 시대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우리 소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를 이제는 트위터에서 종종 만난다. 얼마 전에 트위터를 시작한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는 이유는 시대의 흐름을 쫓기 때문이 아니라 형식과 틀을 벗어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책임의식 때문이다. 함께 더불어 호흡하고 울고 웃는 작가야 말로 이 시대가 원하는 젊음이 아닌가. 나이를 무색케 하는 작가의 자유분방함과 열정이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강남몽』을 이번 휴가에 챙겨야 할 배낭 속 필수품으로 권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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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기업 이야기
권은정 지음, 손문상 사진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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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부터 고민을 했지요. 소수 엘리트만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게 과연 정상인가? 많은 평범한 이들도 스스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입니다. 진보건 보수건 엘리트 의식이 강하지 않습니까?” - 원주의료생활협동조합 최혁진 전무이사, 107쪽

인생은 불공평하고 세상은 냉정하다. 어느 정도 세상을 살아본 사람들이 쉽게 내리는 평가이다. 하지만 이기적인 세상이 살만한 이유는 모두 자신의 잇속만을 차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 그 욕망의 노예가 되어 더 많은 이익과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권력과 더 높은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은 진정 행복할까?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욕망의 크기가 작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나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작은 이해와 배려 그리고 나눔을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새삼스럽게 깨닫는 일이 누구에나 중요하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이타심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정책과 실천으로 극복해야 하는 우리들의 의무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게으름, 무능력의 차별적 시선으로 그들을 평가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일하지 않고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 하는 계층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은 일할 의지가 있어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거나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사회적 기업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한 자활기회의 확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 기업과 달리 삶의 공간으로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교량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기업은 불가능할까?

사회적 기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주주의 이윤 극대화가 아니라 나눔과 배려를 선택하고 고객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아름답고 착한 기업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성공회대학교의 사회적기업 연구센터와 함께 사회적 기업가들을 만나고 인터뷰한 『착한 기업 이야기』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대안과 희망을 제시한다. 아무리 승자독식시대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신자유주의가 최종 승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매일 확인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할 때 우리의 삶은 불행해지고 방향과 목적을 상실한 채 경쟁과 불안,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괴로울 뿐이다. 사회적 기업은 몇몇 사람들의 노력과 실천으로 이제 작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정책적 지원이 이루어지고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간다면 우리 사회의 대안적 기업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막 시작 단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싹을 틔우고 민들레 홀씨처럼 점점 확산되어 가는 사회적 기업의 과거와 현재를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물론 그 안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인터뷰 형식으로 사회적 기업가들을 찾아 나선다. 자치 은행, 생활협동 조합, 생활병원, 장애인 오케스트라에서 건설회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놀라운 실천과 변화를 소개한다. 우리 생활 주변에서 사라진 공동체를 되살리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노력과 실천이 부족할 뿐이다. 전태일 열사의 동생 ‘참 신나는 옷’의 전순옥 대표로 시작된 이야기는 ‘사랑의 손맛’ 백미선 대표의 이야기로 끝난다. 틈새 시장에서 사회적 기업의 아이디어를 얻은 사람들, 지역 사회와 함께 하는 사회적 기업가들, 대안적 세계관을 현실로 옮긴 사회적 기업가들은 특별히 이타적 유전자가 발달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우리들의 이웃이며 생각을 실천에 옮긴 사람들일 뿐이다. 나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 행복해야 진짜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이 책은 자본주의의 우월성과 경제 논리를 가르치면서 그것이 어떤 사회적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그 대한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훌륭한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부자와 빈자의 이분법적 사고 방식으로 사람을 구별하는 세상은 정상이 아니다. 살맛 나는 세상, 모두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우리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는 믿음을 버리지 말자. 이 책에 소개된 사회적 기업가들 뿐만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을 배려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소수인 사회가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되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떤가.

경영학과 경제학을 전공하고 싶다는 많은 청소년들이 바로 이런 기업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대한민국을 꿈꿔본다. 학교에서 가르칠 것이 너무 많아 가르치지 않는 것일까? 암기용 지식은 아주 작고 사소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을 얻는 데 우리는 얼마나 더 큰 비용을 지불하고 실수를 반복해야 하는 것일까? 경제 교과서 대신 이 책을 한 번씩 읽게 하는 것은 어떨지 선생님들에게 묻고 싶어졌다.


100627-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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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이야기의 이론과 해석
최시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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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인간 군상들의 삶을 보라.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본다면 매일매일 시점이 다른 시트콤을 보게 될 것이다. 태어나고 죽고 다치고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낳고 학교에 입학하고 졸업을 하거나 이별하며 잠 못 이루고 미친 듯 달리며 행복하게 미소짓고 맛있게 먹으며 슬퍼하고 기뻐하며 화내고 울부짖고 싸우거나 병들고 떠나거나 사라진다. 소설은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를 담아내는 가장 방대하고 익숙한 갈래의 문학이다.

이야기는 역사와 더불어 가장 오래된 인간의 본능적 욕구에 닿아있다. 서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편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야기를 만들고 듣고 전달한다. 사실이든 허구이든 가리지 않고 이야기가 가진 매력은 영원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야기는 ‘소설’이라는 문학의 한 갈래 안에 포섭되어 있다. 스토리텔링은 단순히 어느 갈래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 드라마, 만화, 게임 등 수많은 분야에 응용되고 확대 재생산 된다. 하나의 창작물은 다양한 형태의 미디어로 재탄생하며 매체가 갖는 특성 때문에 오히려 신선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어쨌든 시대를 막론하고 이야기 즉 서사의 힘은 막강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 특히 ‘소설’을 읽는 힘에 대해서는 소홀한 것이 사실이다. 학교에서 시험을 치르기 위해 불이 나게 외웠다가 까먹었던 소설의 이론을 알고 모르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물이나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정확하고 냉정한 판단 능력이 필요하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그저 재미있게 스토리만 읽어낼 수도 있다. 아니 대부분 그렇게 소설을 소비한다. 하지만 조금 더 꼼꼼하게 그리고 천천히 소설을 음미하는 방법은 없을까?

소설에 관한 이론서를 읽는다고 해서 소설이 더 재미있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어두운 밤에 정원을 산책하는 것보다 밝은 빛을 따라 길을 걷는 것이 더 많은 꽃과 나무와 풀들을 보게 된다. 인물과 갈등이 소설을 읽는 중심 축이다. 물론 인물들이 엮어내는 사건이 본격적인 소설의 흐름을 형성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작가가 창조한 인물의 성격과 핵심 갈등이 소설의 뼈대를 형성하게 된다. 이것을 드러내기 위한 사건들이 배열되고 적절한 시공간 배경과 다양한 장치들이 마련된다. 하나의 완벽한 구조물이 형성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협력해야 하는 것처럼 소설은 각 부분과 요소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복잡하다고 해서 좋은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구성과 인물만으로도 인상적이고 깊은 감동을 주는 단편이 있는가 하면 수많은 등장인물과 복잡한 사건 전개가 이루어지는 데도 지루한 소설이 있기 마련이다. 소설의 재미는 사건의 독특함이나 신선함에서 올 수도 있지만 인물의 성격, 배경에 대한 치밀한 묘사, 유려한 문체, 유기적이고 정교한 구성 등 다양한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교향곡과도 같다. 작가의 능력은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완전하게 탄생시키는 창조자이거나 조정자로서 보이지 않는 손을 움직이는 능력에 달려 있다.

독자에게 소설을 읽어주는 서술자는 작가와 또 다른 소통자의 역할을 한다. 한 편의 소설이 탄생되고 그것이 독자에게 어떻게 전달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작가의 것이 아니라 소설을 읽어야 하는 독자들의 몫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렇게 많은 소설들을 읽고 또 읽으며 울고 웃는다. 그렇다면 과연 소설을 읽는 목적이 ‘재미’만을 위한 것일까?

소설을 읽는 과정은 그것을 쓰는 과정을 닮았는데, 실제로 독자는 눈으로 읽고 있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자처럼 종합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을 하여, 마음속으로 자기 이야기를 쓰기도 한다. - 최시한, <소설, 어떻게 읽을 것인가>, 22쪽

모든 책읽기가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소설은 소설 속의 허구적 인물의 삶을 관찰하며 나를 돌아보고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그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을 쓰는 과정을 닮아있다는 소설 읽기의 과정에 관한 최시한의 지적은 적확해 보인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을 돌아보고 내 삶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소설을 읽는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특별한 교훈과 성찰을 담아내야 하는 것이 소설은 아니지만 적어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소설을 읽는 것은 어쩌면 나를 읽는 일이고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읽는 일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즐거움만을 위한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지 않을까.

이론을 통해 소설의 즐거움을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이 책에서 전하는 이야기들은 일반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효용가치가 있다. 소설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깊이 있게 분석해야 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조금 더 자세하게 그리고 정밀하게 읽고 싶은 독자라면 어려움 없이 새로운 시각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우리에게 익숙한 소설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오발탄’, ‘역마’, ‘눈길’ 등 다양한 한국소설을 통해 소설의 기본 구조와 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어 이해하기 쉽다. 소설을 분석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 아닐지 모르지만 충분히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는 필요한 이야기들이 아닐까 싶다. 보지도 못하고 지나가는 길가의 풀꽃과 나무위의 새들을 살펴보듯이 길을 가면서도 충분히 경치를 즐기는 일은 가능하다. 이 책은 그렇게 우리에게 사건 너머의 소설읽기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소설을 읽는 독자의 기본자세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새겨본다.

독자의 기본 자세. 첫째, 스스로 읽어야 한다. 둘째, 인간과 삶의 모습을 깊이 느끼고 생각하며 읽어야 한다. 셋째, 작품 자체의 질서와 논리에 충실하게 읽어야 한다. - 최시한, <소설, 어떻게 읽을 것인가>, 24쪽 
 

100625-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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