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 - 학벌없는 사회
학벌없는사회 외 지음 / 메이데이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지난 9월 2일(목)에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시행하는 수능 모의평가를 치렀다. 11월 18일에는 한국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시험인 수능이 기다리고 있다. 이십년의 삶과 남은 생에 대한 낙인이 되어버릴 단 한 번의 시험. 이 시험 성적이 대학과 전공을 결정하고 비이성적인 대한민국 학벌사회의 시작을 알린다.

대한민국의 교육은 수능이 정점이다. 수능이 중요한 이유는 대학의 서열화 때문이며 대학의 서열화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포기하고 학벌위주의 사회구조가 탄탄하게 기득권을 유지해 온 탓이다. OECD국가 중 유일하게 전국민의 85%가 대학에 진학하는 나라, 대학을 졸업하지 않으면 사회적 인식, 취업, 임금, 결혼 등 삶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전 생애를 걸쳐 개인의 노력과 능력여하에 따라 삶이 달라질 수 있는 게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학벌에 의해 인생의 상당부분이 결정되는 현상에 대해 이제 사람들은 무감각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오로지 공부 또 공부를 외친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무한도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비교적 성적이 우수하여 작년에 모 여대 신방과에 입학해서 즐겁게 대학생활을 시작한 한 여학생이 수능원서를 쓰고 잠시 들렀다. 1학기를 마치고 휴학했으며 이번에 수능을 다시 보는 이유가 학교를 바꾸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멍하니 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똑똑하고 밝은 성격이었던 그 아이는 반수를 하는 특별한 이유도 목적도 없다. 전공이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고 할 일도 많고 벌써 방송국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즐겁게 한 학기를 마쳤다고 했다. 읽고 있던 ‘학벌없는사회’의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는 책을 가져와 보여주자. 손사레를 친다. ‘선생님 또 시작이세요’라며 웃는다. 그저 열심히 하라는 말을 뒤로 한 채 교무실을 떠나는 그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억울하면 출세해라, 현실을 인정해라, 그래봐야 나만 손해다, 당신 자식 문제면 달라진다, 서울대 콤플렉스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학벌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과연 그런가. 국민들은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학을 못나와서 무식하고 능력이 부족했다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플라톤의 말대로 이상국가를 실현할 수 있었던 서울대 철학과 출신의 김영삼 대통령은 우리에게 IMF를 선물했다. 논리의 비약일 수 있겠지만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우리 사회를 얼마나 멍들게 하고 있는지 온몸으로 확인하면서 21세기를 맞았지만 현실은, 사람들의 의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근대 사회에서 출생이라는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인간의 신분이 정해지듯이, 현대 한국 사회는 수능이라는 단 한 번의 기제로 신분이 나뉜다. 신분의 형성이 일회적이지 다차多次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학벌문제는 상당히 전근대적인 양상을 띤다. - P. 186

김상봉 교수를 처음 만난 책 『도덕교육의 파시즘』은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대한민국의 학교 그리고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에게 교육자체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는 책이었다. 그가 주체가 되어 만든 ‘학벌없는사회’가 외치는 구호는 대충 사는 사회, 하향 평준화된 사회, 노력과 경쟁이 없는 무기력한 사회가 아니다. 과정과 절차, 능력과 기회에 따라 언제든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상식과 합리가 지배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68 혁명이후 대학에 번호를 붙여 대학의 서열화를 무너뜨린 장본인은 고등학생들이었다. 혁명적 변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대한민국의 카스트제도가 무너질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이 책은 제도권 학교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이고 황폐한 입시경쟁교육은 교육이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학교를 그만두고 떠나는 아이들이 매년 7만명이 넘는 나라 대한민국. 그들은 과연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오늘도 하루에 평균 1.8명의 청소년이 자살하는 나라 대한민국. 오늘은 또 누가 아파트 옥상이나 베란다에서 뛰어 내리는가.

지금 이대로의 ‘학교’를 버리고 점수와 가격 입시경쟁과 시장경쟁, 졸업장과 상표를 혼동하는 나라에서 교육의 시장화 정책을 거부해야 하는 이유를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경쟁의 논리 위에 교육을 편입시키고 있는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이 정상인가. 오로지 ‘내 자식’만 경쟁에서 이기면 된다는 생각으로는 절대 아무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사교육의 천국, 공교육의 붕괴, 이 모두 문제의 정점에는 학벌주의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학벌은 현대판 신분제이고, 학벌타파는 실제상 권력투쟁과도 통한다. 달리 말하면, 학벌은 특정 학벌의 인맥이 만들어낸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점수가 곧 인간의 능력’이라는 무지막지한 폭력적 허위의식을 간파할 필요가 있다. 점수, 그것도 수능 점수, 단순한 점수가 아니라 소수점까지도 환산되는, 그리고 그 점수의 공개 여부가 문제가 되는, 나아가 그것 때문에 법정공방이 벌어지는, 이런 해괴한 일들은 모두 학벌 이데올로기에 침윤해 있는 우리의 자화상인 것이다. - P. 195

교육은 한 가정에서 벌어지는 혹은 학교의 울타리 안에서 매일 반복되는 행위가 아니다. 우리의 미래이며 삶의 본질이고 목표이다. 학벌을 정점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간단히 풀릴 문제가 아니다. 대학의 서열화, 수능 점수 위주의 신입생 선발, 학벌위주의 채용관행 등 어그러진 자화상을 들여다보는 일은 가장 시급한 우리사회의 질병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꿈 꿀 권리조차 빼앗긴 것 같다. 아이들의 이기적인 욕망과 치열한 경쟁의식, 나눔과 배려가 결여된 성공에 대한 열망은 어른들의 자의식이 반영된 거울이다. 행복은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지만 행복해지는 법도 가르쳐주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환경도 마련해주는 것이 우리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 이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출발점이라는 사실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제 대한민국 1%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루저가 되어야 하는 무한 경쟁시대, ‘학벌없는사회’는 행복한 대한민국의 시작이다. 이것은 수월성 교육의 포기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출발이고 지속적인 노력과 다양한 능력이 요구되는 공정한 사회를 전제로 한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이 책은 즐겁고 행복한 공부, 공정하고 합리적인 경쟁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할 것을 우리 모두에게 요구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명한 사람들은 저 먼 곳의 행복이 아니라 지금 이곳의 행복을 즐기고 누리라고 가르친다. 행복은 먼 곳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현재를 포기하고 있다. 권력을 잡아야, 돈을 많이 모아야 우리는 자신과 가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정말 그럴까? OECD국가들 중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길지만 가장 불안하고 위험해서 교통사고율이나 암 발생률이 높고 자살율도 높은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 P.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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