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384
권혁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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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모든 순간들을 즐길 수는 없다. 우리는 힘겨운 순간을 지나고 환희의 기쁨을 맛보며 평온한 일상을 보내기도 한다. 아무도 미래를 예측할 수도 없고 결과를 알 수도 없어서 인생을 부조리극에 비유하는 지도 모른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고 운명은 순간순간의 인간의 목을 조른다. 4월 훈풍에 꽃은 피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변덕이 죽끓듯한다. 또 다시 봄이 찾아오고 시간은 물처럼 흘러가고 그러는 동안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더 많은 이야기들이 우리의 귀를 더럽히고 떠나갈 것이다.

권혁웅의 『소문들』은 뒤틀린 인간의 마음과 생각들, 세상의 수많은 소문들이 난마처럼 뒤엉켜 있다. 아니, 그 뒤엉킴은 내가 세상을 보는 눈인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시를 통해 통렬한 풍자와 시원스런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한다. 아름답고 섬세한 감수성을 드러내는 일만이 어찌 시의 전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의 삶이 그렇지 않은데…….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말이 있으니 이를 무족마(無足馬)라 한다 인적 끊긴 지 오래인 인가의 굴뚝을 끌어안고 살다가, 성체가 되면 지붕 위를 뛰어다니며 긴 혀로 수염에 붙은 침이나 귓속의 귀지를 핥아 먹는다 한 마리에 천 냥이나 하는 귀한 짐승이어서 특별히 이 짐승 기르는 일을 업으로 삼은 자를 말전주꾼이라 부른다 - ‘소문들-짐승’ 중에서

허허실실의 진이 개무시진이다 팔문금쇄진에는 휴(休) 생(生) 두(杜) 경(景) 사(死) 경(驚) 개(開)라는 여덟 출구가 있다 이 가운데 개문으로 적을 유인한 후에 도륙하는 진이 개무시진이다 적군이 이진에 빠지면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바닥없는 절망에 이르게 된다 - ‘소문들-진법(陳法)’ 중에서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소문들’ 연작은 전통적인 언어유희의 방법을 차용하며, 시대를 이야기한다. 이 시대가 아니었다면 쓰여지지 않았을 시가 아프게 다가온다. 시공을 초월해서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시만큼 당대를 이해하고 현실을 담아낸 시는 우리에게 깊은 사색의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에게 시는 무언가. 여전히 현실 속에 감추어진 속살을 드러내고 생의 이면을 들춰내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문학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살아가면서 부대끼는 수많은 일들은 정리되지 않은 채 흘러가고 그 흐르는 시간의 갈피 사이사이에 숨은 의미를 생각해 보는 일이 필요할 때 우리는 시를 읽는다. 권혁웅은 이 시집을 통해 정제된 언어와 섬세한 감수성에 기대지 않는다. 비틀고 뒤엉킨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짚어내고 시대와 현실을 뒤먹인다.

그의 심장은 목덜미 어디쯤에 있었다

언덕 위에는 기나긴 논증처럼 모텔이 서 있었다
고개를 돌렸을 때
그것은 한쪽 눈이 가느다란 빚쟁이로 보였다
구름을 대출하는 자, 선이자를 떼고
강물에 기댄 자, 지류 하나를 끌어다
제 믿음의 보증을 세울 테지만
나는 신품성사(新品聖事)도 회상도 없이
사랑하는 자의 피가 먹고 싶어서
그 사람을 당뇨 환자로 거기에 세워두었다
설탕에 켜켜이 재워둔 사람이란
인연에 대해 오래 생각하는 사람이거나
쏟아져 얼룩으로 남은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그는 사례의 하나로 불려 나와
다음 증명에서 부정될 테지만 아무것도
추증(追增)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자의 심장이 목덜미쯤에서
펄떡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잠은 태지(胎紙)처럼 얇아져 뒤척이다가
구겨질 거라 생각했다
언덕이 복리이자처럼 부풀어
그가 잠든 곳을 가리고 있었다

자본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 간 자리는 치유하기 힘들다. 우리의 삶은 매일매일 경쟁과 이기심으로 가득하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렇지만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고 위로하지는 말자. 인간의 삶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지만 그것이 모든 일의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하고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인간의 도리가 아닌가.

시원한 바람이 불고 청명한 달이 비치는 것 같은 담박한 인품은 시대를 초월하여 빛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때로는 시대의 ‘광풍(狂風)’ 앞에 온몸을 던질 줄 아는 기개와 어떤 상황에서도 초연할 수 있는 초연함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죽음은 모든 인간의 숙명이다. 비갠 후, 교교한 달빛 아래 맑게 빛나는 한 잔의 술을 떠올려 본다. 사위는 적막하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바다라면 또 어떤가. 권혁웅의 시는 혼탁함을 오히려 청아한 목소리로 걸러내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읽혔다.

광풍제월(光風霽月)
죽은 할아버지를 배웅하러 갔다가
할머니는 초승달에 온몸을 다 긁혀서 돌아왔다
십이지장처럼 표면적을 넓힌 할머니,
표정 없는 표정이 십 리에 걸쳤다

머리를 들어낸 자리에서 새어 나오는 한숨은
바람 소리도 흉내 낼 수 있다네
독방 안에서 촘촘하던 월명(月明)이여 폐활량과 병목 구간에서 잠간씩 빛나던 담배와 자차분한 늦은 식사여 시든 젖꽃판이 부르던 원왕생이여

저기 칠성판을 타고 할머니 강을 건너시네  

- '기록 보관소 C구역' 중에서


110403-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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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
박홍규 지음 / 필맥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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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서양의 철학자는 지금의 우리들과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지식과 학문의 상대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들의 생애와 사상은 오롯이 박제된 철학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며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는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는 철학자들을 우리는 외면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후에 모든 철학의 근간이 되어 수많은 해석과 분석을 낳았다. 동양의 공자와 맹자 그리고 노자처럼 문제적 철학자들의 사상은 세계를 바라보는 창문의 역할을 했으며 인류 역사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해왔다.

그러나 세계의 철학사는 그들의 재해석에 머물러있다는 비판을 가하는 사람도 있다. 과연 그런가? 인류의 지난한 역사, 과학문명의 발달은 새로운 세계와 인간에 대한 끝없는 의문을 가져왔고 그것을 해명하는데 노력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과 자본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아직도 왜곡되고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자명한 현재적 삶이 되었지만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사람들의 희망은 여전히 미래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

사상적 은사 중 한 사람이 되어 준 박홍규의 『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는 또다시 기존의 질서와 관성적 사고에 제동을 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이며 서양철학의 중심축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디오게네스와 견준다는 사실 자체를 통념상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저자는 디오게네스를 ‘자유’의 철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예속’의 철학자로 선언하며 그들의 철학을 비판적 시선으로 꼼꼼하게 분석한다.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필요한 것을 묻자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비키라고 말한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스스로를 개에 비유했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 정의,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철학자다. 두 사람은 삶의 방식과 후대에 미친 영향이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 그래서 저자의 비교는 다소 억지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대표적 저작을 통해 디오게네스의 철학을 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뚜렷한 흔적을 남긴 철학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의 목소리는 선명하고 두 철학자를 비교하는 동안 우리가 간과했던 부분들을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열풍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시대의 ‘정의’에 대해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하는 것이 아닐까? 한 사회가 지향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합의되지 않은 채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고 경쟁하고 오로지 ‘돈’이 꿈이 되어버린 시대의 비애는 단순히 감상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시민으로서 행복을 추구하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근본적인 고민은 윤리 시간에 외운 철학자들의 사상을 암기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저자의 고민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여전히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살아가야하는 시민의 슬픔이 묻어 있다. 포스터에 쥐, 불온한(?) 사상이 적힌 책, 나와 다른 생각과 주장들 때문에 잡혀가는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야 하는 아픔으로부터 이 책의 고민은 시작된다. 민주주의의 원류로 이해되는 폴리스의 사회와 정치 그리고 그 시대의 사상가들을 살펴보고 디오게네스의 삶과 사상을 복원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인물을 탐구하고 그의 국가, 정의, 정치에 관한 사상적 근원을 탐구한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두 철학자를 비교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관점에서 당대를 비판하고 당대의 사상으로 현재를 고찰한다. 하나의 사상은 특별한 엘리트의 창조적 산물이 아니다. 사회와 역사적 존재로서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통해 만들어지는 하나의 세계 해석 방법이다. 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아테네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달랐고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해석이 달랐다.

비교될 수 없을 것 같은 두 철학자가 비교되는 것은 그들의 사상이 보여주는 간극만큼이나 현실세계의 비극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서양철학사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디오게네스에 대한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저자는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에 대한 오해와 숨겨진 그의 철학사상을 밝히는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 『소크라테스 두 번 죽이기』, 『플라톤 다시보기』, 『그리스 귀신 죽이기』 등을 통해 보여준 것처럼 우리 굳게 믿고 있는 지식과 사상에 대해 의심을 가져보자는 것이다. 이미 잘 알려진 사실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온 것들이 과연 모두 진실일까?

2,500여 년을 거슬러 저자와 함께 시간여행을 하다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을 돌아보게 된다. 짐작도 가지 않는 시간동안 인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서양의 철학자들과 그들의 사상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우리들의 삶을 성찰하는 일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의무는 아닐는지.

110327-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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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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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는 거짓말을 일삼고 몸은 과장을 좋아한다. 눈빛은 정직하다. 눈빛은 거짓말을 못한다. 속이려고 해도 속여지지가 않는 것이 눈빛이다. 눈빛을 읽으면 진실과 가까워진다. 눈빛을 읽어야 한다. - P 15

전 인류의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아우슈비츠는 어쩌면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 20세기에 벌어진 대량 학살과 인종청소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어떤 말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을 남기고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존재의 탐구가 책읽기를 통해 가능하지 않겠지만 오늘도 여전히 수많은 작가들은 인간을 탐구한다. 그것이 문학이고 역사이고 철학이 아닐까 싶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천운영의 『생강』을 읽는 동안 가슴이 미어졌다. 왼쪽 가슴 아래께서 시작된 통증은 온몸으로 퍼졌고 순간순간 전율했다. 작가는 얼마나 큰 아픔 속에서 이 소설을 만들었을까.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천운영의 ‘첫 소설’처럼 느껴졌다. 이 소설은 우리 문학이 잃어버릴 수도 있는 사회 현실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접근이다. 역사적 진실에 대한 웅숭깊은 고뇌가 문학이라고 믿는 독자라면 마땅히 읽어야만 할 것이다.

이근안은 경기도경찰청 공안분실장이던 1988년 12월 24일 국민회의 김근태 의원을 비롯한 숱한 사람들을 고문한 고문기술자라는 사실이 밝혀진 뒤 잠적할 때까지 16차례에 걸쳐 표창을 받으며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그 후 10년 10개월 만인 1999년 10월 28일에 자수했고 지금은 대한예수교장로회 목사가 되었다. 이근안이라는 괴물을 탄생시킨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책을 읽는 내내 끝없이 이어지는 의문과 자괴감이 숨통을 조이는 것 같았다.

작가는 고문 피해자의 시선으로 이근안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근안 자신을 서술자로 선택했다. 그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일을 기억한다. 10년 다락방에 숨어 사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만드는 고문기술이나 피해자가 당한 고통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체험은 문학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을 것 같다.

작가적 상상력을 극대화할 수 없다면 애초에 이근안의 입장에서 이 소설이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심리를 읽어내고 공포를 극대화하는 그의 능력(?)은 이 소설의 중심축을 이룬다. 작가는 악마의 탄생과정을 통해 집단 무의식과 인간성의 바닥에 대해 고민한다. 우리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소설의 주인공 ‘안’이 도피생활을 시작할 무렵 갓 대학에 입학하는 신입생 딸 ‘선’이 등장한다. 선이 서른이 될 때까지 아버지의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 이 소설의 또 하나의 축이다. 아버지와 딸.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면서 이 소설은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객관화한다. 타인의 고통이 내 것일 수 없는 한계가 ‘선’의 한계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다락방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을 통해 ‘안’을 은폐한 후 드러낼 수 없는 개인과 타인, 가족과 사회의 문제를 폭로한다. 행간을 건너뛰는 섬세한 심리묘사, 아내와 딸을 통해 인간의 삶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이 소설은 우리 사회가 걸어온 길에 대한 부끄러움을 드러낸다. 망가진 육체와 유폐된 영혼이 빚어내는 참담한 비극은 인류의 역사가 반복해온 가장 통렬한 분노이다.

악마의 발톱은 여전히 유효하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역설한 악의 평범성은 우리 안에 내재한 놀라운 본능이 아닐까. 역겨움을 넘어 무기력한 슬픔에 빠뜨리는 주인공 ‘안’은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 아마 그것이 작가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아닐까 싶다.

『바늘』, 『명랑』, 『그녀의 눈물 사용법』을 통해 천운영은 인간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과 보이지 않는 심연을 탐구해 왔다. 『생강』을 통해 나는 천운영이라는 작가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김치를 먹다가 잘못 씹어버린 생강처럼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생강처럼 잘근잘근 씹어먹었으면 좋겠다. 눈 내리는 3월의 검은 밤이 서럽도록 아름다운 희망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


110324-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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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행복하라
비노바 바베 지음, 사티쉬 쿠마르 엮음, 김문호 옮김 / 산해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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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교사는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 그의 곁에서 스스로 배울 뿐이다. 태양은 누구에게도 자기 빛을 주지 않는다. 다만 만물이 그 빛을 받아 스스로 자라갈 뿐이다. - P. 31

한 문장에 꽂혀 책을 찾아 있는 경우가 많다. 고미숙의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을 읽다가 한참 동안 멍하게 들여다보았던 문장이다. 늘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분명한 문장으로 만났을 때의 기이한 느낌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 가르치지 않는 교사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 말은 지식이 아니라 온몸으로 삶을 가르치는 교사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교과서 밖의 삶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있고 그것을 행동에 옮겨 실천하는 교사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몰라서 학교에 오는 아이는 없다. 객관적 사실을 판단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뒤에 숨은 진실을 깨닫고 스스로 생각하며 판단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과정이 교육이다. 태양은 스스로 빛난다. 만물이 그 빛을 받아 스스로 자라는 것처럼 잠재적 교육과정을 통해 가르치지 않아도 배우는 학생들이 있어 교사는 늘 그들을 두려운 법이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를 만나 비폭력 사회 변혁 운동에 뛰어든 비노바 바베의 『버리고, 행복하라』는 오늘 하루를 경건함으로 가득 채워주었다. 그것은 내 삶에 대한 엄숙함이었고 일반적이고 익숙한 것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였다.

영적인 지도자로 추앙받는 저자의 이야기를 담아 사티쉬 쿠마르가 엮은 이 책은 ‘교육, 권력, 정의, 평화, 자아’의 다섯 개 주제로 이루어져 있다. 얄팍한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영혼의 찬물을 끼얹는 울림이 있는 책이다. 사람들은 보통 종교에 기대어 산다. 불안한 미래와 현실적 고통, 사후 세계에 대한 공포가 만들어낸 안식처가 될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 존재인 인간에게 영혼이란 무엇인지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욕망에 충실한 존재가 아니라 영혼의 안식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삶을 고민해 본적이 있다면 버리자,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불가능한 삶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21세기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실천 항목을 제시할 수는 없다. 다만 한 인간의 삶을 통해, 그리고 그의 목소리를 통해 나의 모습을 돌아 볼 수는 있다.

보편타당한 삶의 원칙과 태도는 시공을 초월해서 깊은 울림을 준다. 그것은 종교를 초월하며 인종과 민족의 범위를 넘어선 자리에서도 빛을 발한다. 비노바 바베는 종교를 앞세우지 않는다. 절대자의 말씀이나 권위를 빌리지 않고 온몸으로 실천하고 자신의 행동으로 말하기 때문에 더욱 경건해 보인다. 토지헌납운동을 통해 우리의 삶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성찰하게 한다. 누군가의 소유가 될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소유하고 있다. 비노바 바베는 묻는다. 그것이 가능한 삶인가.

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교육 분야는 구름처럼 허망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교육의 현주소를 돌아보게 한다. 현실 적용 문제를 떠나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공교육의 현실이다. 우리는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배우기 위해 그리 오랜 시간동안 학교에 다니는 것일까.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 우리의 삶을 성찰해 보자. 사람들은 많이 가지고 싶어하며 경쟁에서 이기길 원한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즐기라는 섬뜩한 문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책상위에 붙여놓은 아이들을 바라볼 때마다 부끄럽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

이 땅의 교사와 학부모들이 새겨들어야 할 만한 잠언들이 곳곳에 숨어있는 이 책은 거시적인 안목으로 현실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우리의 지향점이 어디인지 고민해 볼 수 있는 책이다. 비노바 바베 혹은 그 어떤 영혼의 안내자의 말이라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책은 아이들에게 독이 될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경고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삶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면, 내 생의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는 책이 아니라면 독서를 권할 이유가 없다. 창밖에 멀리 시선이 가는 날,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게 되는 날 비노바 바베의 말에 귀 기울여 보자.

우리는 아이가 독서를 통해서 지식을 얻는다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상 독서는 지식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독서는 우리를 현실세계와 갈라놓는 장막과도 같은 것이다. - P. 39


11032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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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곤, 행복한 학교 유쾌한 교육 혁신을 말하다
김상곤.지승호 지음 / 시대의창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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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konkim 야자보충이 실질적인 자율과 선택으로 전환되어 오랫동안 꿈꾸며 싸워왔던 정상적인 학교의 모습을 찾아갑니다. 다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된다는 훈데르트 바서의 말이 사무치는 밤입니다. 감회가 새롭습니다. 감사합니다.

트위터를 뒤적여 3월 7일에 김상곤 교육감에게 보낸 메시지를 찾아냈다. 3월 한 달 모든 담임선생님이 각 교실에 남아 모든 아이들이 자율학습을 하지 않으면 직무유기라고 생각하고 학생들에게 공부를 시키지 않는 비난이 대한민국의 보편적인 인문계 고등학교의 모습이었다. 회유와 협박에 가까운 반강제 자율학습 때문에 떠들고 엎드려 자는 학생들이 생기고 감독을 강화하기 위해 더 많은 선생님들이 학교에 남아 학생들을 감시해야 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대해 아무리 문제를 제기해도 고쳐지지 않았던 오래된 관행과 견고한 편견의 벽.

그러나 이제 변화가 시작되었다. 스스로 선택한 아이들의 자율학습은 감독이 필요 없을 정도다. 당연한 일이지만 각자 필요한 만큼 조용히 공부를 하면 감독이 아니라 관리만 조금 필요할 뿐, 조용하고 진지한 분위기는 감독 선생님들의 책장 넘기는 소리가 미안할 정도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토머스 페인이 말한 것처럼 ‘상식’과 ‘인권’은 반드시 현실이 된다고 믿는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담임을 신청했지만 2학년부장 업무를 맡게 되었다. 교장, 교감 선생님의 임명권을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마땅히 거절할 만한 불합리한 결정도 아니라서 어울리지 않는 일을 2년째 하고 있다. 나이 들어 학생들이 싫어할 때까지 담임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상황에 따라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작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힘겹게 고민하고 싸우지 않아도 이제 자연스럽게 야간자율학습과 방과후 수준별 특기적성, 일명 보충수업이 실질적으로 자율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원칙적으로 자율학습이었으나 자율학습은 담임선생님과 학생들 사이의 가장 큰 마찰과 갈등요인이었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물결이 도도해도 학교에서는 내 돈을 내고 내가 듣고 싶지 않은 수업을 억지로 들어야하는 보충수업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과 커다란 변화의 물결은 민주적이고 상식적인 결정이 가능한 학교를 만들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나아갈 미래 사회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이다. 단편적으로 보편적 복지에 대한 논란이나 무상급식에 대한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 어떻게, 왜’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교육문제는 결국 동시대인들이 지향하는 미래의 목표이며 꿈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우리들의 미래라면 그 아이들이 자라서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았으면 좋을까 생각해보자. 어렵지 않은 답이 나오지 않는가. 그런데 왜 우리는 교육문제에 대해 자꾸 이기적인 욕망이나 정치적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는가.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의 『김상곤, 행복한 학교 유쾌한 교육 혁신을 말하다』는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할 미래의 ‘교육’ 문제를 전망할 수 있는 책이다. 김상곤이라는 개인의 발자취, 경기도교육감이라는 역할을 통해 우리 사회의 미래를 고민해 보자.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을 이끌어내고 있는 인터뷰는 지승호 특유의 성실하고 치밀한 사전 준비와 사람과 세상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있다. 인터뷰를 통해 상대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깨고 본격적으로 흥미 있게 한 사람을 탐구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 것은 개인적으로 지승호 때문이었다. 그의 책들을 읽어오면서 느낀 것은 한 개인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서 그러한 사회적 존재가 탄생하게 된 사회, 역사적 맥락이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비춰보는 거울의 역할을 하는 그의 인터뷰는 세상을 통찰하는 프리즘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인터뷰를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자기만의 색깔과 영역을 확보한 지승호의 이야기는 언제든 들어야할 이야기로 가득하다.

이번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인물은 내가 하고 있는 일과 직접 관련되어 있으니 더더욱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김상곤교육감은 이제 경기도 교육감이라는 직책을 넘어 수많은 사회적 논란과 다양한 정치적 의제를 만들어 낸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인터뷰어 지승호는 김상곤교육감을 통해 대한민국의 교육과 인권 그리고 복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단순히 경기도의 초중고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과 길에 대한 고민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교육 문제는 정권에 따라 개인적 이익과 욕망에 따라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내내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읽을 수 없는 문제들이 많았다. 나의 삶이고 현실인 문제들이 많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이면 또 다시 학교에 가 아이들을 만나고 수많은 눈동자와 마주친다. 감히 내가 무엇을 어떻게 왜 가르쳐야 하는가를 다시 한 번 고민한다. 나부터 항상 노력하고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면 학생들보다 먼저 타성에 젖고 개인적 이익만 챙기는 교사가 되는 것은 너무 쉽기 때문이다. 열정과 희망을 가르칠 수 없다면 미래는 없다. 이 책의 서문처럼 지승호의 말을 빌리자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건 바로 너야’라는 사실을 알려줘야겠다. 모든 아이들에게. 그러나 혼자서만 앞서가지 않기를.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고, 남들보다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좀 더 다양한 방식의 가치 있는 삶이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알려줘야만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스스로 패배자라고 느끼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 ‘서문’ 중에서


11032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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