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또 하루 문학과지성 시인선 390
김광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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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 모든 사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특히 익숙한 것일수록, 오래된 것일수록 우리에게 많은 말을 건넨다. 그것은 사물에 투영된 우리들 의식의 반영일 뿐 아니라 생활 속에 배태된 사유의 본질을 의미한다. 언어는 사람됨을 규정하고 우리의 의식을 특정한다. 언어의 한계의 우리의 한계이며 생각의 범주이고 삶의 테두리가 된다. 그렇다면 언어를 확장하는 과정이 외부의 세계를 확장하는 일이 아닐까.

평범한(?) 삶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창작 행위를 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 말은 옳으면서 그르다. 동일한 생활 패턴을 반복하다보면 생각의 범위와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작가들이 하나둘씩 교수 자리를 꿰차거나 샐러리맨의 평범한 일상을 즐기고(?) 있는 것이 독자의 입장에서는 불편하다. 뭐 특별한 감흥이나 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상상력과 발군의 글솜씨를 가졌다 하더라도 한정된 세계에서 특별함을 창조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신현림의 말대로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지지 못한다면 문학은 고급 살롱의 언어 유희에 그칠 위험이 있다. 세기말의 혼돈과 새천년의 희망을 지나 자본주의가 굳건하게 세계를 지배하고 경쟁질서가 공고한 사회에서 문학의 역할은 과연 어떠해야할까.

노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잠깐 상념에 잠긴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유명한 시인 김광규의 시를 오래 읽어왔다.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아니다 그렇지 않다』, 『좀팽이처럼』, 『아니리』,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처음 만나던 때』, 『시간의 부드러운 손』 등 편안하면서도 일상속에 숨겨진 작은 비밀들을 감각적으로 묘파할 줄 아는 시인 김광규의 시선은 나이와 함께 무디어진다. 여전히 일상에 매몰되어 있는 생의 감각들을 되살려내고 있지만 예전 같지는 않다.

저녁나절

썰물이 빠진 뒤
뭍으로 길게 닻을 던진 채
개펄 바닥에 주저앉아 나른한
오후를 보내고 있는 거룻배들
정물로 머무는 동안 소금의
하얀 발자국 조금씩 드러날 때
말나루 먼 바다에서 아련히
밀물 들어오는 소리
갈대숲 어느새 물에 잠기고
물새들 날카롭게 지저귀고
잠에서 깨어난 거룻배들
물 위로 떠오르고
황혼의 냄새 불그스레 번져갈 때
조약돌처럼 널리 땅 위의 기억들
적시며 밀려오는 파도
어두워가는 여생의 하루


그것은 세월과 나이의 힘이며 절정을 지나 생을 마감하는 시인의 조근조근한 말투처럼 여겨져 옷깃을 여미게 한다. 환한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밀려오기 전, 말로 표현하기 힘든 빛의 여운과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운 시간을 나는 ‘푸른 시간’이라고 부른다. 시인도 저녁나절 그 시간에 또 하루가 저물어 가는 아쉬움을 ‘어두워가는 여생의 하루’라고 했을 것이다.

김광규 시인의 시는 어깨에 힘을 빼고 툭툭 던지는 쨉처럼 상대를 긴장시키고 거리를 조절한다. 시는 언제나 독자들에게 편안한 긴장을 주는 언어의 견고한 구조물이다. 헐렁하고 편안해 보이지만 단단하게 잘 빚은 백자 같은 기품이 있어야 오래 여운이 남기 마련이다. 쉽게 읽히지만 단순하지 않고 오래 기억하고 싶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는 언어의 바다.

나뉨

소형 임대 아파트 주민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오고 가지 못하도록
주상복합 고층 아파트 입주자들이
통로를 막고
길에 철조망을 쳤다
그렇다
우리는 예부터 나누어진 겨레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다

분노와 절망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데도 슬픔이 배어나오는 시인의 목소리가 좋았다. 당연히 주목해야 하는 이웃의 모습, 상식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가 무엇인지 말해주는 것 같은 김광규의 시는 통렬한 풍자보다 쉽고 간명하다. 계급과 계층이라는 말을 몰라도 눈에 보이는 일상에서 생각해 보자고 요구하는 낮은 목소리가 더 멀리 울려 퍼지기도 하는 법이다.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삶은 끊임없는 연속입니다
쉴 새 없이 뛰는 심장
숨 쉬는 허파
가슴속에 품은
사랑도 그렇지 않은가요
산책을 하다가 피곤하면
길가의 벤치에 앉아 잠시
쉬어가듯이
우리의 삶도 사랑도 그렇게
가끔 쉴 수 있다면
좋으련만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단 한 순간도 쉬지 않는 심장, 처럼 우리들의 삶도 멈추지 않는 걸까. 우리들의 사랑도 그러한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숭산 스님의 말씀처럼 오직 모를 뿐!

고희를 맞은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은 한결 고즈넉해 보인다. 편안하게 일생을 살아온 명예교수의 뒷짐과는 또 다른 고요함의 세계 같은 것이 이 시집 곳곳에 배어 있다. 여행의 기록이 지루하게 펼쳐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일상에서 길어 올린 시편들이 가슴을 울린다. 잔잔하지만 넓은 파문을 일으키는 그의 몰년이 시집의 마지막이다. 하지만 아직, 그의 몰년을 말할 때는 아닌 것 같다. 조용히 스러지는 김광규의 시들은 푸른 시간에 읽기 좋다. 아니면 몰년 부근에.

몰년(沒年)

죽은 이는 그해까지 살았습니다.
예측 못한 미래를 끝내고
사후(死後)를 남긴 셈이지요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 …… 나머지는
괄호 안의 빈칸 속에서
갑갑한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산 자들의 몫입니다



110513-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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