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의 사회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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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롭게 된 인간들은 지금까지 어느 시대에도 그러했던 바와 같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 15쪽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은 시간을 견뎌낸 글이다. 우리는 보통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말로 이름값에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모든 고전에 내게로 다가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 고전이라는 농담이 있다. 개인의 필요와 배경지식 그리고 호기심에 따라 고전은 때에 따라 읽어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미숙의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 김찬호의 『돈의 인문학』 등 돈에 관한 책을 읽다가 문득 떠오른 책이 바로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였다. 아마도 『시뮬라시옹』을 읽고 미뤄 두었기 때문인지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무렵인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어쨌든 오래 맴돌던 책을 들고 조금씩 정독했다.

알랭 드 보통처럼 대중적인 소설 형식이나 가벼운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내지 않는다면 프랑스 철학자들의 책은 난해하다. 그런 편견 때문인지 이 책은 첫 장부터 집중하고 긴장하며 읽기 시작했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다른 책에서 여러 번 접했고 인용된 부분들도 보았으니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보드리야르가 당대를 읽어내고 해석하는 방식이 궁금했을 뿐이다.

40여 년 전, 1970년에 나온 『소비의 사회』는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간파한 역작이라고 할 만하다. 산업사회로의 이행과정에서 파생된 무수한 사태들에 대해 단순히 자본주의의 검은 그림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로 명명했다. 사진과 영화의 등장을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예리한 논문으로 당대 사회를 분석한 발터 벤야민처럼 광고의 홍수 속에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인간의 욕망을 간파한 이 책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의 심리와 자본의 속성을 적절하게 분석하고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적확하게 해석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책이다. 우리는 여전히 소비의 사회를 살아간다. 고(故) 전우익 선생의 말씀대로 우리는 평생 무언가를 사서 버리고 또 사고 버리는 패턴을 반복하다가 죽는다. 소비가 미덕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말처럼 끊임없이 타인과 나를 비교하고 경쟁하고 불행해한다. 현대사회의 거대한 소비 시스템은 점점 견고해지고 거역할 수 없는 틀이 되어버렸다.

이 책이 나온 이후 세계 경제는 신자유주의 물결과 세계화의 도도한 흐름에 휩쓸려가고 있다. 각국의 경제 블록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무국적 거대자본은 부유하는 자본주의의 미래를 보는 것 같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반성과 남미의 도발적 흐름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는 ‘복지’에 대한 사회적 고민을 소모적 정치 논쟁으로 비화시키고 있다.

이 책은 사물의 형식적 의례, 소비의 이론, 대중매체, 섹스 그리고 여가 등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중세 기사의 한 벌의 갑옷과 투구를 뜻하던 ‘파노플리’가 어떤 의미를 뜻하는지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해서 악마와의 계약 이야기로 끝난다. 각장은 현대 사회 상품과 사물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욕망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과 다양한 분석을 통해 ‘소비’가 갖는 다양한 의미를 풀어 놓는다.

현대사회에서 ‘소비’를 키워드로 삼는다면 수많은 이론과 분석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이 책이 의미를 갖는 것은 시대를 통찰하는 폭넓은 시야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보드리야르의 관심과 현대사회에 대한 분석이 어떤 변화를 보였고 이후에 어떻게 비판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더 깊이 있는 관심과 독해가 필요할 것 같다.

이 책은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읽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고 현대 사회를 본질적으로 성찰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예견하는 자연스런 흐름은 한 권의 책으로 얻을 수 없다. 하지만 꾸준한 관심과 다양한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책읽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알고 의미를 부여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것들이 모두 의심스러워 보인 적은 없는가. 우리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지만 소비하지 않아도 존재할 수는 없을까.

소비는 하나의 신화다. 현대사회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하는 말(parole), 우리 사회가 스스로를 말하는 방식, 그것이 소비다. - 328쪽


110515-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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