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물학 대논쟁 통섭원 총서 2
최재천 지음 / 이음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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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어떤 개별적 존재가 자신이 소속돼 있는 집단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제3자의 입장에서 개별적 존재를 관찰하고 집단 전체를 분석하는 것에 비해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이유와 개별자로서의 의미를 타인과의 관계와 집단의 상황에 비추어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것은 객관적으로 설명 가능한 대상인가. 왜 태어났으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철학은 이미 수천 년 동안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그 과정에서 불가해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종교를 발명했다. 중세를 넘어 ‘근대’ 이후에는 해결의 주도권이 과학에 넘어온 듯하다. 150여 년 전 다윈은 『종의 기원』을 통해 인간에 대한 개념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이것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이행만큼이나 충격적인 선언이었으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 존재에 대한 다양한 학문적 논의를 추동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과연 객관적 사실에 부합하며 세계를 이해하는 근본적 진실을 드러냈을까.

전체 > 부분의 합

생명은 설명될 수 없는 존재라는데 동의한다면 인간을 탐구하는 것은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그런 이유로 인간에 대한 모든 철학과 종교와 과학은 단지 인간을 바라보는 하나의 틀을 제공할 뿐이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사회생물학’을 바라보자. 이 시대의 가장 유명한(?) 과학자 중 한 사람인 최재천은 이러한 논쟁의 중심에 놓여있다. 『사회 생물학 대논쟁』은 바로 이러한 논의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책으로 손색이 없다. ‘통섭, 에드워드 윌슨, 진화심리학, 데이비드 버스, 이기적 유전자, 밈, 빈 서판, 털 없는 원숭이……’ 등과 익숙하거나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은 반드시 거쳐야 할 만큼 중요하다.

인간은 유기체다. 세포와 뼈의 결합체가 아니다. 다윈주의적 환원주의가 인간 존재를 설명할 수 있을까. 장대익의 분류대로 다윈주의적 반환원주의, 비다윈주의적 환원주의, 비다윈주의적 반환원주의로 사회생물학이나 인간 존재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가. 사회생물학을 주도한 윌슨의 ‘컨실리언스consilience’를 최재천의 ‘통섭統攝’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이 생물학을 중심으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학문간 통합과 다른 개념으로 설득될 수 있는 것인가.

끝없는 의문과 호기심이 책을 읽는 내내 계속되며 『이기적 유전자』, 『털 없는 원숭이』, 『욕망의 진화』, 『오래된 연장통』이 뒤섞여 정리되지 못한 우둔한 머릿속이 조금은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분과학문 영역 사이의 장벽이 만리장성보다 견고한 국내의 학문 풍토에서 학문간 통합을 넘어 ‘컨실리언스’를 이야기하는 것은 학문적 토대의 척박함과 문화적 바탕을 간과한 과욕은 아닌가. 만 16세가 되면 문과와 이과로 나누고 그 벽을 뛰어넘는 일이 과장하자면 성별을 바꾸는 것만큼 힘든 상황에서 최재천의 노력과 인문, 사회학자들의 논쟁은 더할 수 없이 값지고 귀하게 여겨진다.

주목할 만한 글 몇 편

이 한 권의 책은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과 이화여대 통섭원이 공동으로 개최한 심포지엄 “부분과 전체 : 다윈, 사회생물학, 그리고 한국”의 결과물이다. 여덟 명의 무림의 고수가 펼치는 진검 승부가 흥미진진하다. 그 중에서도 이병훈의 ‘한국에서는 사회생물학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 도입과 과제’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귀한 글이다. 또한 김동광의 ‘한국의 통섭 현상과 사회생물학’은 국내의 ‘통섭 현상’에 나타난 특징과 문제점을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어 균형적인 시각을 갖는데 일조하고 있다.

무엇에 대해 알고 싶은 욕망의 시작은 작은 관심과 호기심이거나 우연한 마주침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딱딱하고 이론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나 일반인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며 넓이와 깊이를 한 번에 꿸 수 기회를 제공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인간’이란 존재가 ‘동물’과 구별되는 지점, 세상을 해석하고 원인과 결과를 밝히고 싶은 욕망, 미래의 학문이 지향해야 할 부분에 대한 질문들이 시작될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은 끝없는 질문의 연속이다. 모든 독자는 나름의 방식대로 그 답을 구하기 위해 힘을 얻고 또 다른 길을 찾기에 나서는 수고로움을 즐거움으로 치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논쟁은 논쟁으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논쟁을 낳는다. 이 책은 논쟁의 단면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논의된 ‘사회생물학’에 대한 일목요연한 정리이며 새로운 방법론에 대한 깊은 고민의 시작이다. 길은 끝난 곳에서 다시 시작된다. 자유로운 사유의 유목,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질문, 나와 너의 관계 양상을 통찰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방법과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111013-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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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 김경욱 소설집
김경욱 지음 / 창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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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한곳을 오랫동안 응시하면 분명한 움직임이 포착된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어떤 형태가 포착되고 미세한 동작이 감지된다. 우리는 보통 그것을 착시(錯視) 현상이라고 치부하지만 실제 눈에 보이지 않는 움직임에 대해서 상상해 본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과 순간적인 것에 불과하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그 너머의 울림들은 좀체 전해지지 않는다. 그것을 포착하려는 불온한 시선이 바로 소설가의 그것은 아닐까.

현대소설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하나는 근대의 개념을 포괄하며 단순한 서사의 힘을 넘어 선 소설이고, 또 하나는 시간적으로 과거와 대립되는 개념의 소설을 의미한다. 19, 20세기는 그 이전의 어떤 시대보다도 눈부신 ‘속도’와 ‘변화’의 굴곡을 보여주었다. 역사 발전의 한 과정이라고 하기엔 울렁증이 생길 정도로 혁명과 전쟁을 겪으며 전 인류가 그 변화를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다. 구소련이 붕괴되고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눈에 보이는 적이 사라지고 대립과 갈등의 근본적인 이유를 상실했다. 일본의 가리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하기도 했다. 소설은 여전히 읽을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인지 그리고 어떤 소설이어야하는지 독자들은 스스로 반문할 필요가 있다.

김경욱의 소설집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를 읽는 동안 단정하고 반듯한 모범생의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그러하다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형식과 문법에 충실한 단편들이라는 느낌이었다. 흠결을 찾아내거나 한편, 한편 분석하다보면 나름의 특징이 드러나겠지만 9편의 단편을 묶은 소설집을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다. 뒤에 붙은 권희철의 해설 또한 마찬가지다.

이 책의 표제작처럼 ‘신’에게만 손자가 없는 게 아니라 ‘작가’에게도 손자가 없다. 전지전능한 소설가는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인물을 창조하며 이야기를 만들고 폭풍 같은 감동과 여운을 남긴다. 그러한 욕망의 극단을 참지 못하면 소설을 쓰는 것이다. 김경욱의 전작들과 이번 소설집의 차이는 크게 발견되지 않는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기이한, 특별한, 평범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들이 다양하게 그려진다. 할아버지와 손녀, 취업준비생, 광고기획사 대리, 전직 권투선수, 소설가와 사진작가, 주유소 알바생, 관광가이드, 평범한 가장 등 소설의 중심에는 넓은 범주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우리가 소설에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작가의 몫이다. 독자가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 작가의 역할이 아니라 독자들이 알아야 할 것, 기억해야 할 것,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작가의 역할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집의 이야기들은 어떤가.

분명하고 흥미진진한 ‘서사’ 중심의 소설이 있고 수려한 문장과 잠언들로 가득 찬 소설이 있다. 두 가지 요소를 함께 담아내려는 것이 작가의 욕망이겠으나 어느 한 가지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작가도 있다. 아홉 편의 단편 중 ‘러닝 맨’과 ‘허리케인 조의 파란만장한 삶’이 인상 깊에 읽히는 이유는 알레고리와 욕망 때문이었다. 쉼 없이 일정하게 달리는 사내에게 쫓긴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인공의 착각일까 아니면 음험한 경쟁사회의 시스템일까. 전직 복서 허리케인 조의 파란만장하지도 않은 삶을 자서전이라는, 누구나 한번쯤 써보고 싶어하는 책의 대필작가의 눈으로 바라본다. 시간이 많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있게 읽힐 것 같다. 시간이 많지 않은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 자신을 말한다.

“나약한 소리 마시오. 한번 링에 오른 자는 영원히 내려올 수 없소. 발 딛고 선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링이기 때문이오. 흔히 말하지, 세상은 링과 같다고. 말은 언제나 쉽소. 세상이 링이라면 언제나 링에 오를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소? 세상이 일종의 링이라는 것은 비유가 아니라 진실이오. 링이 왜 사각형인지 아시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머무는 곳이 십중팔구 사각형이기 때문이오. 방, 교실, 사무실, 엘리베이터, 길, 버스 등등. 요람부터 관까지 모두 사각형이니 결코 사각형에서 벗어날 수 없소. 운명은 사각형이오. 작가 선생.”(허리케인 조의 파란만장한 삶) - 114쪽

네모난 링에 오른 것처럼 죽기 살기로 달려야 하는 세상에서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던지듯 한 허리케인 조의 이야기는 작가선생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에게 남기는 유언처럼 들린다.

소설과 현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리가 놓여 있다. 작가는 그 틈새를 들여다 보려고 엎드려 눈을 대고 독자들은 하늘을 향한 작가의 엉덩이를 바라보며 그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무엇을 보든 무엇을 듣든 그것은 작가가 본 현실 너머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욕망하는 세상의 또 다른 이미지이며 상징이고 외면하고 싶은 누추한 삶의 진경이다.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모래사장을 홀로 걷고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을 담은 표지는 별로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111010-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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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읽는 손자병법 - 내 인생의 전환점
강상구 지음 / 흐름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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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읽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먼저 공시적 관점으로 당대의 정치, 사회, 문화를 한 눈에 조망해 볼 수 있고 다양한 관점으로 역사를 조망할 수 있다. 통시적 관점에서 현재적 유용성을 들 수 있다. 모든 책은 고전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과장된 말처럼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면 인류의 사유방식과 인간의 근본적인 삶의 문제는 이미 먼지 묻은 책 속에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삼갈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기존 지식에 대한 믿음이다. 보편타당한 이론이나 절대불변의 진리,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식이라고 믿었던 모든 일들이 일순간 무너지기도 하고 가치와 사유방식의 혼란이 오기도 하며 삶의 목표와 의지가 흔들리기도 한다. 고전은 우리에게 시간을 견뎌낸 힘을 보여준다. 그것이 고전이 된 이유이며 여전히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강상구의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은 ‘손자병법’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해석을 보탠 책이다. 마흔이라는 나이는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저자가 경험한 세상에 나름의 해석일 수도 있다. 모은 사람이 책을 읽는다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옛 성현의 말씀처럼 책은 한 사람의 주관적 견해에 불과할 수도 있고 그저 세련되게 정리된 지식의 창고일 수도 있다. 저자의 생각과 나의 경험 책의 내용에 대한 해석과 소통이 이루어질 때 그 책은 비로소 하나의 의미가 된다.

‘손자병법’은 3,000년의 세월을 견딘 책이다. 군인이 아닌 일반인들에게 이 책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유의 틀을 제공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세상을 통치하기 위한 ‘군주’를 위한 책이라면 ‘손자병법’은 싸움의 비술을 전하는 책이다. 가장 치졸하고 비열한 방법부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지혜를 빌릴만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방법들이 소개되고 있다. 원전의 전체 내용이 전쟁을 위한 방법을 가르치는 군사학 교범과 다른 이유는 공시적 관점으로 풀어야 한다.

말 그대로 춘추전국시대를 떠올려 보자. 일대일로 맞짱 뜨고 다음 선수를 기다려 최후의 승자를 가리는 게임이 아니라 수많은 상대‘들’과 싸우며 살아야 하는 세상이다. 그것은 적과 싸워 이기면 되는 전쟁이 아니라 상대를 끌어안아야 하는 시대를 말한다. 죽여 없애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그런 후에는 또 다른 적과 싸워야 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의 연속이다. 당대의 역사적 상황은 이 책의 의미를 새롭게 한다.

공존과 상생. 이 책이 전하는 지혜를 현재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까. 병법서에서 공존과 상생을 읽어내는 것은 독자의 아둔함일 수도 있으나 싸움이 아니라 전쟁의 목적은 살인이 아니라 통치에 있기 때문이다.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전쟁이라면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이 최선이다.

1장 시계始計부터 13장 용간用間에 이르기까지 원전을 소개하고 저자가 해설하는 방식의 책이다. 해설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저자는 ‘손자병법’을 설명하기 위해 ‘삼국사기’를 예화로 활용한다.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삼국사기’ 못지않게 많이 인용된다. 전쟁다운(?) 전쟁을 해보지 않은 우리의 역사에서 병법의 예화로 쓸 만한 내용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다보니 삼국사기와 난중일기를 넘나들고 단편적인 전쟁 상황들이 나열되어 일목요연하거나 하나의 맥락을 잡으면서 읽기는 힘든 책이다. 앞에 언급했듯이 당대의 상황을 얼마나 이해하고, 현실의 접목 가능성이 어느 정도 될 것인가는 고스란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거꾸로 생각하면 장별로 단편적으로 끊어 읽기 좋을 수도 있다. 책은 언제나 저자의 가르침이 아니라 독자와의 대화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 책을 읽는 방법 또한 다양할 수 있을 것이다.



111007-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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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쾌한 유랑 문학과지성 시인선 389
이재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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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말하거나 시간의 거리와 어둠의 깊이에 대해 진지한 눈길을 던진다. 이재무의 『경쾌한 유랑』도 마찬가지다. 세월의 간극과 사물의 서늘한 표정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연륜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언어를 부리는 힘과 삶에 대한 어렴풋한 해석이 가능해진걸까. 언제나 그렇듯 그 깊이와 넓이가 부럽고 불가해한 힘의 근원이 궁금하다.

목적 없는 발걸음인 ‘저녁 산책’은 그래서 행복하다. 그러나 시인의 저녁 산책은 단순해 보이지가 않는다.


저녁 산책


숲 가운데 앉아 서산낙일 바라다본다

저 곳은 내 미래의 거처

누군가 부르면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밭 일궈 골라낼 돌 아직 수북한데

벌써 홑이불 되어 고랑 덮어오는 산그늘 서늘하다

삶은 여윌수록 두껍게 죽음을 껴입는다

달군 쇠처럼 뜨겁던 속도 다 한때,

불 떠난 굴뚝처럼 식어가는데

그토록 오래 떠돌았으나

결국 나 또한 붙박이 나목에 지나지 않았던 것

맨살 추워 보이는 건초들아

너희도 사랑 잃고 추워 떨며

신음처럼 낮게 노래 불러본 적 있느냐

오고 가며 요란한 것들아,

사람의 한평생

산밭 산개한 자갈 두어 삼태기 골라내는 일밖에 무엇 있으랴



“이게 최선입니까?”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어느 드라마에 나온 대사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최선’이 ‘최선’일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온 인생과 하늘과 구름을 바라보며 산책을 하듯 살아온 인생을 비교할 수는 없다. ‘간절’은 욕망의 극한을 말한다. ‘열정’은 또 하나의 한계가 된다. 그러나 적절한 ‘간절’은 없다. 그래도 시인은 ‘간절’을 이렇게 말한다.


간절

삶에서 ‘간절’ 빠져나간 뒤
사내는 갑자기 늙기 시작하였다

활어가 품은 알같이 우글거리던
그 많던 ‘간절’을 누가 다 먹어치웠나

‘간절’이 빠져나간 뒤
몸 쉬 달아오르지 않는다

달아오르지 않으므로 절실하지 않고
절실하지 않으므로 지성을 다할 수 없다

여생을 나무토막처럼 살 수 없는 일
사내는 ‘간절’을 찾아 나선다

공같이 튀는 탄력을 다시 살아야 한다



‘간절’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야 한다. 내려놓는 순간 마음은 가벼워지고 욕망도 원망도 분노도 사라진다. 우리가 ‘똥파리’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을 헤아릴 필요는 없다. 다만 똥파리의 욕망과 생활의 빨대에 눈길이 간다. 우리는 그 빨대를 어디에 꽂고 있는지.


똥파리

너는 욕망의 암벽 기어올라
마침내 정상 등극에 성공하여
날개 달게 되었다
바야흐로 너는 구질구질한
바닥을 버리고 수직 상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똥파리여,
너는 끝내 천출 벗지 못하였다
붕붕, 부산한 몸짓으로
진동하는 부패에 생활의 빨대 꽂고 있구나

지하철 칸칸마다 들어찬,
벽 기어오르고 있는 구더기들이여
 
 

결국, 자연으로 돌아간다. 모든 생명은 자연으로 돌아간다. 나무와 숲을 향한 열망만큼 뜨거운 시인의 욕망이 또 있을까. 순간과 영원 사이에서 유한과 무한 사이에서 우리를 자극하는 건 결국 나무 한 그루에 불과하다. 그 안에서 ‘사랑’을 읽고 아픔을 배운다. 한 줄이 한 행(行)이 아니라 한 연(聯)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푸른 거처

나무 속으로 내 사랑 들어갔네

나무 속으로 들어간 내 사랑

잎으로 돋고 꽃으로 피어나

사계를 살았네

나무 속에는 푸른 방이 있고

나무 속에는 푸른 마당이 있고

나무 속에는 푸른 창이 있다네

어느 날은 서럽게 울고

어느 날은 환하게 웃고

어느 날은 명주 올보다 더

가늘게 귓속 골목을 파고드는 노래

저 나무 속 내 미래의 거처엔

오래전 내 곁을 떠나간

사랑이 살고 있다네 

 

숲 속의 나무와 길가의 가로수. 그것은 공간을 점유하는 상황과 위치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의 차이를 말한다. 일렬종대로 세워진 균질화된 나무의 생태는 인간의 왜곡되고 조작된 기억만큼이나 슬프다. ‘꿈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때로 재앙일 수 있다’는 시인의 전언이 아픈 까닭은 그것이 현실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망도 절망도 썩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들의 가혹한 운명이라고 말한다.


일렬종대 
 


꿈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때로 재앙일 수 있다는 것을

생생한 실물로 보여주는 저 가로수들

올해도 지루하게 동어를 반복하고 있다  

선천성 일급 장애로 봄이면 버릇처럼,

악착같이, 수평 향해 가지를 뻗어보지만

번번이, 욕망은 잔인하게 진압되고야 만다

지쳐 쓰러져, 탕진의 바닥에 누울 때까지

썩지 않을 희망, 썩지 않을 절망

저 가혹한 운명의 슬픈 우리 자화상



111002-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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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특별판) 문학동네 시인선 2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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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독일로 간 그녀는 인간의 시원을 밝히고 있을까. 고대 동방문헌학을 연구하고 있다는 허수경의 시인의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특별판을 아껴가며 읽었다. 떡제본이 아니라 실로 제본하고 표지까지 풀로 붙여 정성을 들였다. 노트만한 크기의 시집을 눕혀 위로 넘기면서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니 제법 색다른 맛이 났다.

시인을 처음 만난 건 『혼자 가는 먼 집』이었다.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그녀의 목소리는 깊고 넓어졌다. 차고 뜨거운 것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은 심장의 몫이다.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직관과 감성적 본능이 앞설 때가 많다. 장정일은 젊은 날 시를 썼던 사실을 부끄러워하지만 시는 여전히 자신의 몫이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웅변한다. 허수경의 시는 그 목소리가 크지 않으면서도 울림이 크다.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릴 때

문득 나는 한 공원에 들어서는 것이다
도심의 가을 공원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 저녁에 지는 잎들은 얼마나 가벼운지
한 장의 몸으로 땅 위에 눕고

술병을 들고 앉아 있는 늙은 남자의 얼굴이 술에 짙어져갈 때
그 옆에 앉아 상처 난 세상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며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리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얼마나 다른 이름으로 나, 오래 살았던가
여기에 없는 나를 그리워하며
지금 나는 땅에 떨어진 잎들을 오지 않아도 좋았을
운명의 손금처럼 들여다보는데

몰랐네
저기 공원 뒤편 수도원에는 침묵만 남은 그림자가 지고
저기 공원 뒤편 병원에는 물기 없는 울음이 수술대에 놓여 있는 것을

몰랐네
이 시간에 문득 해가 차가워지고 그의 발만 뜨거워
지상에 이렇게 지독한 붉은빛이 내리는 것을

수도원 너머 병원 너머에 서서
눈물을 훔치다가 떠나버린 기차표를 찢는
외로운 사람이 당신이라는 것을

나는 몰라서
차가운 해는 뜨거운 발을 굴리고
지상에 내려놓은 붉은 먼지가 내 유목의 상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술 취해 잠든 늙은 남자를 남기고
나는 가을 공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5월 밤 선선한 저녁 공기가 살갗에 닿는 시원함. 푸른 시간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어슬렁거리며 동네를 한 바퀴 산책한다. 그래봐야 아파트 단지 사잇길과 단지 앞에 공원이나 탄천이 대부분 흙을 밟을 수 없는 길들이지만 그나마 야트막한 언덕과 산길이 이어져 있긴 하지만 콘크리트 숲 속에 고립된 섬처럼 애처롭다. 뜨거운 태양과 달리 차가운 달빛이 교교한 밤이 되면 또 하나의 세상과 조우하는 느낌이다.

시인은 유목의 상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여기에 없는 나를 그리워했고 술 취해 잠든 늙은 남자를 남기고 돌아선다.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리는 동안만.

난 존재를 안고 있는 허당이었어요

너는 중얼거렸다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차 소리가 났다 잎새들이 바깥에서 지고 있었다

너는 중얼거렸다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난 존재를 안고 있는 허당이었어요

단 한 번도 뿌리와 소통을 해보지 않은 나뭇잎

울 수도 없었다. 울기에는 너무 낡은 정열이었다

뿌리에서 떠나 다시 뿌리를 덮어주는 나뭇잎

웃을 수도 없었다 웃기에는 너무 오랜 정열이었다

소통 불가능성에 대한 내밀한 고백.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고 그 섬에 가고 싶다고 노래한 정현종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는 작은 섬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중얼거렸지만 나는 알아듣지 못했고, 한 몸이면서도 나뭇잎은 뿌리와 단 한 번도 소통을 해 보지 못했다. 그러니 우리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온다. 허당은 너가 아니라 바로 나라는 자명한 인식.

웃음이 사라진 사람에게 ‘웃기에는 너무 오랜 정열’이었음을 고백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아프다. 말의 갈피 사이에서 의미가 부서지고 이미지 대신 신음소리만 웅얼거리는 듯하다.

입술

너의 입술이 나에게로 왔다
너는 세기말이라고, 했다

나의 입술이 내 봄 언저리를 지나갔다
나는 세기초라고, 했다

그때 우리의 입김이 우리를 흐렸다

너의 입술이 내 눈썹을 지나가자
하얀 당나귀 한 마리가 설원을 걷고 있었다

나의 입술이 너의 귀 언저리를 지나가자
검은 당나귀 한 마리가 석유밭을 걷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거리의 모든 쓰레기를 몰고 가는 바람

너의 입술이 내 가슴에서 멈추었다
나의 입술이 네 심장에서 멈추었다

너의 입술이 네 여성을 지나갔다
나의 입술이 네 남성을 지나갔다

그때 우리의 성은 얼어붙었다

말하지 않았다
입술만 있었다

입술만 기억하는 사랑에 대한 시 한 편. 감각적이고 관능적이어서 슬픈 장면들이 수많은 이미지를 오버랩 된다. 말하지 않았고 입술만 있었던 시간을 추억하며 너의 입술이 나에게로 오고 그 입술은 말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은 얼어붙은 심장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다. 그것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쓸쓸함이거나. 다시 돌아오지 않을 추억에 대한 회한이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인간에 대한 공포이거나 더 이상 두근거리지 않을 심장이거나.


110608-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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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8-18 1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그 섬에 가고 싶다..라고 말을 한 시인이 정현종 시인이군요. 저는 최근에야 정현종 시인을 알게 되어 시집을 사려하는 중이에요. 사람 사이의 섬. 눈에 보이는 듯하면서 어느새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섬.
허수경의 시는 유적을 발굴하는 느낌처럼 오래되고 버석거리는데도, 불타는 심장이 느껴지는 신기한 시 같애요.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인식의 힘님. ^^

sceptic 2011-11-16 23:07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