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도시의 인문학 돌베개 석학인문강좌 15
김석철 지음 / 돌베개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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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과 채움

건축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한 ‘집’이 거주의 목적을 넘어서는 데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르 코르뷔지에나 안도 다다오는 사적인 생활 영역인 ‘집’에서부터 그들의 건축이 시작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생활 조건이며 거주의 목적으로 지어진 ‘집’에서 출발한 건축은 다양한 목적으로 고유의 기능과 아름다움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상상력을 실현가능한 현실로 바꾸었으며 건축도 예외가 아니다. 유리로 된 반짝이는 건물은 물론이고 둥글고 세모난 모양도 가능하다. 다양한 건축재와 시공법의 발달로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건물들은 점점 더 크고 화려해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건축은 실용적 유용성과 미적 기능이 충돌한다. 순수 음악이나 그림, 조각의 경우는 극단적이고 추상적인 데까지 나아갈 수 있으나 건축은 ‘기능’ 측면에서 다른 예술과 구별된다. 비움으로써 가득 차는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 바로 건축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닐까.

그릇과 마찬가지로 실용적 측면만 살펴보자면 우리는 비어있는 공간만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건축에 관해서는 세 가지 관점이 필요하다. 첫째는 말할 것도 없이 기능이다. 얼마나 적절하게 공간을 분할하고 동선을 고려하고 있으며 실용적인가. 둘째는 예술성이다. 유사한 기능과 효용을 갖추고도 심미적인 측면에서 손색이 없어야 한다. 마지막은 주변 상황과의 어울림이다. 도시 한복판의 좁은 공간 빌딩과 빌딩 사이의 공간인지 아니면 자연과 어우러진 곳에 지어질 것인지에 따라 목적과 기능이 달라진다. 그밖에 건축재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수많은 고려 사항이 더해진다.

하지만 결국 건축의 중심에는 ‘사람’이 놓여야 한다. 자산 가치나 기능적 측면만 고려한 건축은 끔찍한 재앙이다. 대한민국만의 특이하고 기형적인 주거문화인 ‘아파트’를 생각해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과 해석이 나와 있으니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다. 다만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위대한 건축에는 인간 중심의 사고가 선행해야 한다고 믿는다. 근대 이전의 역사적 건축물들이 신과 왕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인간을 그 중심에 놓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인문학과 건축

그래서 건축에도 인문학이 필요하다. 건축이 예술로 인정받는 이유는 인간의 꿈과 철학, 미적 본능과 창조적 상상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닌가. 어떤 분야라도 마찬가지겠지만 모든 건축의 바탕에는 인간의 삶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아내야 한다. 건축가는 인문학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 인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며 그들의 철학과 삶을 이해해야 한다.

김석철의 『건축과 도시의 인문학』은 한 눈에 독자를 사로잡는다. 인간과 인문학을 이해하고 있는 건축가의 이야기라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축가이며 석학 인문 강좌의 강의 내용을 엮은 책이라서 알기 쉽게 건축과 인문학의 관계와 자신의 건축에 담긴 인문 정신을 잘 담아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김석철이 건축과 도시 계획에 대한 이력을 반복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나 그가 담아내려고 했던 각 개별 도시에 대한 기본적인 방향과 목적은 인문학과 구체적인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건축가가 설계할 도시에 대한 인문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도시’를 설계하는 거시적인 안목을 제시하고 있는 부분은 충분히 공감 할 만하지만 도시가 인간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이유와 지역과 목적에 따른 규모와 적정성에 대한 철학적 깊이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는 미디 운하같이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수로가 없어서 도시는 현대화를 쉽게 이루었지만 농촌은 무너진 것입니다. 농촌이 살아 있지 않은 나라는 부강한 나라가 아닙니다. 이탈리아는 물론 일본, 프랑스, 영국 등 부강한 나라들은 모두 농촌이 강합니다. 우리나라는 농촌을 구제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촌을 살리는 일이 4대강 사업이 되어야 합니다. - 73쪽

문맥을 보면 운하가 없어서 농촌이 없다는 주장이며 농촌을 살리기 일이 4대강 사업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운하 중심의 4대강 사업이 농촌을 살릴 수 있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그러나 책의 뒷부분에서 4대강 전체를 하나의 뱃길로 오르내릴 수 있는 운하를 만드는 것에는 반대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4대강 사업이 운하 중심인가 아닌가, 4대강 사업이 농촌을 살리는 일에 얼만큼 영향을 미치는가, 농촌과 운하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한 정치한 논의는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못해 아쉽다.

이 책의 전체 구성은 고대, 중세, 르네상스와 산업혁명, 지식산업사회, 한반도 등 크게 다섯 번의 강의 내용을 순서대로 엮고 있다. 예술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초적인 지식과 건축가의 경험이 함께 어우러져 알기 쉽게 설명된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흐름이 없어 아쉽고 건축과 인문학에 대한 건축가의 확고한 철학이나 일관된 사유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아 아쉬움이 많다. 지속가능한 발전과 친환경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패러다임이 필요한 이유와 인간의 삶과 건축이 맺고 있는 필연성에 대한 폭넓은 성찰을 담고 있는 책이 읽고 싶어졌다.


20111127-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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