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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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의미와 역할

원론적이고 이론적인 소설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몫으로 남겨둘 필요가 있다.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소설은 ‘재미’가 우선이다.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끌고 가는 서사의 힘은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이며 의미이다. 재미없는 소설도 있긴 하다. 근대 이후 앙드레 부르통에 의해 ‘초현실주의 선언’이 발표되면서 전통적 가치에 도전하고 굳은 틀에 도전하는 새로운 시도가 문학에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의 삶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급변하는 사회와 역사적 발전 과정은 항상 새로운 형식과 기발한 상상력을 갈망했으며 그것은 모든 예술에도 통용되는 요구였다. 하지만 여전히 소설은 가장 대중적이고 쉽고 재미있는 갈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소설가들은 항상 낯선 이야기, 새로운 형식을 갈망하며 독자들 또한 미지의 세계를 갈망한다. 익숙한 세계에 대한 재발견과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욕망은 상상력으로 채워지고 작가는 독자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유혹한다. 인간의 내면적 갈등, 타인과의 관계, 세계와의 충돌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작가는 이에 대한 새로운 질문과 고민의 흔적을 토해내며 독자들과 함께 해결의 실마리를 성찰하게 된다. 결국 이야기는 끝없이 진화하고 발전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인간 자체에 대한 탐구가 선행된다면 이 모든 이야기들의 문법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고 새로움은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넘어서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된다.

매일 벌어지는 문제 상황과 반복되는 갈등의 양상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역할이 소설의 몫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작가에게 정답을 요구할 수는 없어도 인간의 삶에 대한 진실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요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소설은 우리들의 이야기,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 태어나서 어떻게 살 것이며 인생은 무엇이고 세상은 어떤 곳인가에 대한 요구가 없다면 소설은 의미도 없을뿐더러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런 면에서 정유정의 『7년의 밤』은 다양한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소설에게 혹은 작가에게 무엇을 기대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7년의 밤』은 우선 강력한 서사의 힘을 지니고 있다. 추리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사건의 해결과 반전 혹은 결말을 끝까지 파헤치게 만드는 힘있는 소설이라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한 소설이다. 전직 야구선수 출신 사형수 최현수를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의 갈등과 사건의 연결고리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사건이 벌어진 후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사실’ 아닌 ‘진실’이 드러나고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은 독자들에게 읽는 재미를 충분하게 선사한다. 게다가 사형수의 아들과 그를 돕는 조력자이자 내부 이야기의 서술자인 승환의 관계, 치과 의사 오영제와 그의 아내와 딸의 관계는 세령호를 중심으로 다양하고 복잡한 갈등의 층위를 만들어내고 있다. 5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장편소설의 흡인력은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이기도 하다.

서사의 힘과 남은 고민들

고양이는 천둥이 치기 전에 뇌에 자극을 느낀다고 한다. 인간의 변연계에도 비슷한 감관이 하나 있다. 재앙의 전조를 감지하면 작동되는 '불안'이라는 이름의 시계. - 정유정, 7년의밤, 18쪽

소설의 가장 고전적 숙제인 ‘사실’과 ‘진실’ 사이에는 무엇이 존재하느냐에 대한 질문이 작가의 말의 제목이 되었다. 그것은 이 작품이 소설의 문법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최현수가 오영제의 딸을 사망에 이르게 한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이 소설은 그 과정과 이후의 사건들을 정밀하게 추적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마치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하나의 사건이 앞 선 사건의 결과가 되고 뒤이은 사건의 원인이 되는 구성 때문에 독자의 손에서 책을 내려놓지 못하게 한다. 소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서사의 힘이라는 사실을 웅변하는 듯하다.

표면상으로는 최현수의 이 소설의 중심이지만 그의 아들 서원과 오영제가 그리고 소설가 승환이 이야기의 중심축이다. 서원과 동갑내기 오영제의 딸 세령이나 그의 아내 문하영, 최현수의 아내 강은주는 이야기의 주변에 머물러 있다. 최현수와 안승환 그리고 최서원의 캐릭터는 분명하고 설득력있게 그들의 행동과 사건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문제는 오영제다. 독특한 유형으로 이 소설의 재미를 불어넣는 인물 오영제의 성격과 행동에 설득력 있는 에피소드와 타당한 연결고리가 부족하다. 소설을 읽는 동안 ‘왜’라는 질문을 여러 차례 하게 되는 것은 개별 독자의 이해력 부족 때문인지도 모르겠으나 이 소설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아내와 딸에 대한 집착과 폭력을 묘사하는 부분이나 이후의 행동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만한 개연성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 작은 아쉬움들을 상쇄할 만한 ‘재미’와 ‘흡인력’만으로도 이 소설은 작가의 오랜 준비와 치밀한 구성, 풍부한 상상력을 빛나게 한다. 스킨스쿠버, 댐의 운영방식, 수사과정 등 전문지식이 필요한 부분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소설에 현실감을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 머지않아 영화로 만들어질 것이라는 추측을 충분히 하고도 남을 만하다.

인간이 가진 ‘불안’과 ‘공포’ 그리고 내면적인 ‘충동’과 ‘욕망’에 대한 깊은 성찰은 정유정이라는 작가를 주목하게 하는 또 하나의 힘이다. 천명관의 『고래』 이후에 서사의 힘을 유감없이 느끼게 해 준 소설이지만 소설은 드라마의 대본이나 시나리오와 다른 문체과 스타일의 재미까지 갖추어야 한다. 문장과 표현이 빚어내는 분위기 언어가 갖는 보이지 않는 울림까지 보여줄 수 있다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개별 독자의 취향이겠으나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를 그의 스타일대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일 수 있겠다.

어디선가 그런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총을 가지면 누군가를 쏘게 되어 있으며, 그것이 바로 인간의 천성이라고. - 정유정, 7년의 밤, 474쪽


2011112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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