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등 이펙트 - 지금 누군가 나를 조종하고 있다!
로빈 스턴 지음, 신준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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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세상 살아가면서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내가 가장 아끼고 기대고 의지하며 믿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치명적인 마음의 고통과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삶의 아이러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잔인하고 냉정하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다르다. 객관적으로 감정의 우열를 가릴 수 없고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과 배려하는 태도를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관적 감정과 관점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행동한다. 상대방의 태도와 반응에 따라 내 마음은 춤을 추고 스스로의 자아 정체감이 흔들린다. 그 많은 사람, 관계의 네트워크는 거미줄처럼 얽혀있고 복잡하다.

  이렇게 많은 관계망 속에서 특정인에 대한 영향력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관심과 배려와 보호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구속하고 집착하며 억압하는 관계는 누구나 맺고 있다.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그러한 영향관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로빈 스턴은 자신의 상담 경험과 피상담자들의 사례를 바탕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영향 관계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가스등 이펙트>는 그렇게 탄생한 책이다.

  인간의 심리 상태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와 같다. 마음이 원인이라면 행동은 결과가 된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생각과 행동이 불일치할 때 생기는 괴로움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사고와 감정을 지배하는 원인을 알지 못할 때 생기는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크다. 더불어 원인을 명확히 알지만 제공자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역할 모델일 경우 문제는 간단치가 않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을 위한 영혼의 처방전이다.

  애인이나 남편, 직장 상사나 친구, 가족이 대표적인 가해자gaslighter이다. 피해자gaslightee는 대부분의 경우 여성이다. 그러니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대상은 여성 피해자로 한정된다. 상대방의 인정과 사랑을 받고자하는 당연한 소망과 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가스등 이펙트’가 발생한다. 1944년에 제작된 영화 ‘가스등’에서 잉그리드 버그만이 열연한 주인공 폴라는 남편 그레고리와 결혼한다. 탐욕스럽고 권위적인 그레고리는 이모가 남긴 보석을 찾기 위해 다락방을 뒤지는데 가스등의 특성상 다락방에 불이 켜지면 폴라의 방에 있는 가스등은 희미해진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아무도 그녀를 믿어주지 않는다.

  이처럼 ‘가스등 이펙트’는 두 사람 사이의 영향 관계를 의미한다. 한 사람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상대방은 그에게 인정과 사랑을 원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문제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자아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다. 영화에서는 그레고리가 처음부터 재산을 가로챌 분명히 나쁜 의도가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처음부터 사악한 의도를 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만 생각한다. 이기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가에 어긋나는 작은 도전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름대로 세상에 대한 논리를 세우고 상대방도 자신과 동일한 논리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끔찍한 일이지만 현실에서, 주변에서 우리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과 늘 함께 생활한다. 그것이 문제인 줄도 모르고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 막강한 영향력 아래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은 ‘가스등 이펙트’의 피해자들인 것이다.

  첫째 ‘불신’의 단계에서 ‘자기방어’를 거쳐 ‘억압’에 이르는 과정을 상세하고도 실감나는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 효과는 저자가 명명했지만 일상생활을 통해 항상 접하고 있다는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해자와 영향을 받는 피해자의 관계는 한 인간의 주체성과 연관된 문제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과 이기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폭력적 성향을 지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선량한 피해자를 만나게 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나쁜 의도가 없을 경우 가해자의 태도나 입장은 변화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현실 속에서 우리가 참고해야할 이야기가 많고 실제 상황들이지만 객관적이지 못한 점들이 눈에 띄는 것은 아쉽다. 먼저 인용된 사례의 문제이다. 애인과 남편, 직장상사와 어머니에게 피해를 입고 있는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들은 책의 시작에서 끝까지 반복해서 인용되고 재해석되며 문제의 극복 방법에 동참하고 있다. 하나의 사례가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고 일반화하기에는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상황 변수가 많다. 다양한 사례로 공통점을 끌어내거나 설득력 있는 일반화가 아쉬운 장면이다.

  두 번째는 여성 편향성의 문제이다. 사례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도 있다. 여성 피해자 뿐만 아니라 어머니와의 관계를 예로 든 미첼만 제외하고는 모두 여성들이다. 대부분의 경우 여성일 경우가 많겠지만 남성 피해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폭넓은 사례 수집과 연령, 성별, 인종과 직업을 망라한 조사가 이루어졌다면 보다 설득력있는 책이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관성의 문제이다. 상담 사례 중심이기 때문에 저자가 경험한 폭을 벗어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경험해 보지 않았거나 확인할 수 없는 다양한 사례들에 대한 조사 혹은 단계별로 심각서의 정도를 객관화하는 작업은 쉽지 않겠지만 읽으면서 지나치게 주관적인 판단과 조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우의 수를 모두 다룰 수는 없지만 아쉬움이 많은 책으로 분류한다.

  어쨌든 ‘지금 누군가 나를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변화는 시작될 것이며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 있다. 모든 관계의 중심은 ‘나’일 것이다. 하지만 자기주장과 타인에 대한 적절한 배려는 자아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자기 존중감에서 비롯된다. 우주의 중심은 나지만 지나치면 타인에게 ‘가스등 이펙트’를 나타내는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조심하라!


080213-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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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빛깔있는책들 - 즐거운 생활 269
조윤정 지음, 김정열 사진 / 대원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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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판기 커피, 혹은 다방 커피 중독 현상은 담배의 니코틴 중독처럼 카페인 중독에 불과하다. 원두커피나 에스프레소가 아니라 크림과 설탕이 적절히 배합된 커피 믹스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입맛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된장 찌개에 김치를 먹어야 밥을 먹었다는 포만감을 느끼는 것과 유사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커피는 당연히 그렇게 먹는 것인 줄 알았다.

  그나마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머리가 나빠진다(?)는 전설에 근거한 어른들의 협박과 경고에 못 이겨 한 잔도 얻어 마시지 못했다. 유리병에 담긴 커피 알갱이에 큰 유혹을 느꼈던 것은 아니지만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어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던 시절이었나 보다. 대학에 입학해서 드디어 맘껏 커피를 마셔대기 시작했다. 밥을 먹고 나서 마실 수 있는 물 다음으로 저렴한 음료였기 때문이다.

  이제 세상이 달라져 우리는 밥보다 비싼 커피를 들고 다니며 마신다. ‘된장녀’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지만 확고하게 자리잡은 커피 문화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이해해야 하는 시점이 이르렀다. 세이렌의 유혹을 상징하는 ‘스타벅스’를 필두로 볶은 커피 원두를 의미하는 ‘커피 빈’, 이탈리아의 창업자 안토니오 파스꾸찌의 이름을 딴 ‘파스쿠치’, 1998년 국내 순수 브랜드로 출발한 ‘할리스’ 등 고개만 돌리면 커피 전문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두컴컴한 조명, 초이스라는 상표를 메뉴판에 적어 놓았던 이전 시대의 ‘카페’를 떠올리는 사람들은 이제 삼십대 중후반을 넘기고 있을 것이다. 밝고 환한 조명과 통유리로 거리를 내다볼 수 있는 개방감은 안과 밖을 구별하기 힘들다. 사회 분위기나 사람들의 성향이 바뀌어가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겠다. 어쨌든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으로 여전히 사랑받는 공간은 카페이다. 커피라는 음료는 이제 이국적인 기호 식품으로 받아들이기엔 우리 생활 속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커피를 이해하는 일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커피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커피의 종류나 만드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대해 호기심과 궁금증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조윤정의 <커피>를 읽는다. 광화문 성곡 미술관 옆에서 ‘커피스트’를 운영하는 조윤정의 <커피>는 읽는 맛이 남다르다. 커피를 입이 아니라 눈으로 마시는 느낌이다.

  이 책이 눈길을 끄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김정열의 적절한 사진 덕이다. 책은 종류에 따라 삽화나 그림, 사진이 방해가 되거나 가독성을 해칠 수 있지만 이 책은 조금 다르다. 커피의 종류와 로스팅이나 추출 과정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기계들을 보여주고 설명을 해야하기 때문에 산만하지 않게 적절한 사진이 요구되고 본문과의 배치나 편집이 중요하다. 핸드북으로 적당한 분량과 크기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커피>는 언제 어디서든 가볍게 들고 다니며 반복해서 읽고 정보를 확인하며 눈으로 마실 수 있는 책이다.

  에스프레소espresso란 영어로 익스프레스express, 즉 빠르다rapid,fast는 뜻이다. 추출하는 시간 뿐만 아니라 마시는 시간도 빨라야 한다. 황금색 크레마와 함께 짙은 향과 맛을 음미해야하기 때문이다. 커피의 본질이자 정수인 에스프레소는 단순히 진하고 쓴 커피가 아니다. 에스프레소 한 잔에는 숨길 수 없는 커피 본연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커피의 맛은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 쓴맛과 신맛이 어우러져 깊고 풍부한 향기와 함께 원산지와 로스팅에 따라 원두의 맛과 향은 천차만별이다. 일반적으로 핸드 드립식이나 커피 메이커로 아메리칸 스타일을 즐기지만 에스프레소는 커피의 시작이며 끝이다.

  다양한 방식의 블렌딩과 각종 첨가물이 가미된 커피를 마시지만 이것들은 모두 에스프레소를 기본으로 하는 커피들이다. 생두와 원두 에스프레소가 빚어내는 커피의 깊은 맛이 매니아를 양산하고 있으며 와인처럼 급속하게 저변을 확대하고 있다. 자판기나 다방 커피가 아닌 커피 본연의 맛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커피>는 재미있고 즐거운 여유 시간을 만들어 준다. 물론 커피를 즐기지 않는 사람에게도 호기심과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좋은 안내서가 된다.

  커피에 관한 많은 책들이 있지만 이 책의 두드러진 특징은 영국의 커피회사에서 3년 가까이 일하며 커피와 로스팅을 배운 저자가 ‘커피스트’를 운영하며 실전에서 경험한 노하우가 고스란히 배어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로스팅과 추출 방식, 핸드 드립과 바리스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실전을 위한 조언에 가깝다. 커피를 하나의 문화 기호나 연구 대상이 아니라 커피를 직접 만들고 마시며 서빙하는 사람의 애정과 숨결이 묻어 다른 책과 구별된다.

  어떤 커피를 어떻게 마실 것인가는 이제 선택이 되었다. 인터넷을 통해서 혹은 주변에 가까운 커피 전문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생두와 원두를 목적과 입맛에 따라 손쉽게 갈아 마실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생두를 볶아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지만 언감생심이다. 원두나 갈아 크레마의 색깔이나 기웃거리며 에스프레소 한 잔 마시고 싶다. 그것이 커피든 다른 것이든, 선택의 즐거움과 창조의 기쁨은 어디에나 있다.


0802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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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2-11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싶어서 구매해놨는데, 우홋 어쩐지 반가워져요 ^_^

sceptic 2008-02-12 12:43   좋아요 0 | URL
실전용으로, 호기심 충족용으로 다 괜찮았어요...^^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
나딘 고디머 엮음, 이소영.정혜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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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와 역사를 달리하는 소설가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인류 보편적 가치나 공통 관심사를 찾아내는 일은 어려우면서 쉬운 일이다. 문학이 인간의 정서와 삶의 모습들을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소설가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생활인이라는 전제가 가능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글로 써야하는 것이 소설가의 의무이자 한계이다.

  남아공 출신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나딘 고디머는 AIDS라는 질병을 매개로 전세계 소설가들의 단편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AIDS 질병 퇴치를 위한 기금 마련이다. 소설책의 판매 수익금은 전액 AIDS의 예방과 치료를 위해 쓰인다. 다섯 명의 노벨 문학상을 포함해서 스물 한 명의 소설가는 이에 동참했고 자신의 작품 중 책의 제목처럼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들을 풀어 놓는다.

  이 책 한 권을 통해 아서 밀러, 가브리엘 마르케스, 살만 루슈디, 주제 사라마구, 귄터 그라스, 존 업다이크, 미셀 투르니에, 수전 손택, 오에 겐자부로 등 살아있는 세계 문학의 거장들을 만날 수 있다. 이런 기획물의 경우 잡탕찌개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는 우려가 있다. 예를 들어 시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를 모아 책을 낸다. 그런 책은 나도 몇 권 쯤 낼 수 있지만 시를 고르는 안목과 개인적인 감상과 해설이 기존 작가의 권위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크게 의미가 없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책은 손이 잘 가지 않는다.

  다만 책이 가지는 선한 의도와 모여 있는 소설가들이 주는 무게의 유혹을 떨치기 힘들었다. 하나 하나의 단편들은 잘 차려진 뷔페처럼 특별한 맛을 보여준다. 너무 짧아 맛을 보기도 전에 다른 요리로 넘어가는 아쉬움이 있지만 각각의 단품들이 품어내는 향기와 빛깔은 먹을만 하다. 그러고 나면 전체적인 조화의 문제가 남는다. 제목처럼 어떤 특별한 이야기나 한 생을 통틀어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이야기들로만 여겨질 수 없는 이야기도 많다. 제각각 독특한 소재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것들이 쉽게 하나의 주제나 특징으로 묶여지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 같다.

  4천만 명에 이르는 AIDS 환자 중 3분의 2 가량이 아프리카에 몰려있다. 생활환경과 문화 수준의 발달 정도는 자본과 직결된다. 이제 자본은 건강이며 지식이고 희망이며 꿈이 되어 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책 한 권을 사서 몇 푼의 돈이 그들의 치료 비용으로 사용되는지 보다 항상 그들을 생각하고 배려하며 작은 실천에 옮기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 스물 한 명의 작가들도 모두 한 마음이라고 믿는다. 자신의 자식 같은 단편 하나씩을 내놓은 마음들이 소중해 보인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납의 시대’, 귄터 그라스의 ‘증인들’, 치누아 아체베의 ‘설탕쟁이’, 나딘 고디머의 ‘최고의 사파리’는 사회성 짙은 작품들로 시대의 아픔이나 역사적 체험들을 통해 지나간 시간들 혹은 현재의 고통들을 진지하게, 때로는 유머스럽게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어떤 시대, 어떤 환경이든 작가는 늘 문제적 상황들에 대한 고민과 동시대인들의 아픔에 대해 관찰하고 그것을 잘 표현해 낼 줄 아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는 평범한 생각을 해 본다.

  이에 반해 아서 밀러의 ‘블도그’, 하니프 쿠레이시의 ‘마침내 만나다’는 현대인들의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문제들을 재미있게 그려내고 있다. 무겁고 진지한 주제에 반해 재밌고 흥미있는 소재로 이 책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다른 작가의 작품들도 신선하고 독특한 이야기들이 많지만 기억나는 몇 편의 작품들이다. 개인적인 취향이기 때문에 사회문화적 환경이 다른 작가의 다양한 작품들을 하나씩 음미하는 즐거움이 남다르다.

  소설은 현실의 고발이거나 생활 속에 숨겨진 삶의 은유이거나 역사적 반성이거나 미래에 대한 희망일 수 있다. 소설의 기능이 무엇이든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울고 웃고 눈물을 흘리거나 꿈을 꾼다. 이 책 한 권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잡다한 단편들의 묶음이 아니라 여러 나라의 작가들이 같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며 읽어 볼 일이다. 오에 겐자부로를 제외하고는 동남아시아와 아랍권의 작가들이 빠져 있어 아쉽기는 하지만 지역적 균형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다함께 꿈꾸고 힘을 모으려는 의도와 나딘 고디머의 수고와 여러 작가들의 단편이 빛을 발하기만 한다면 문학 외적 요소나 의미를 차지하고서라도 우리는 재미있는 단편집과 만날 수 있게 된다.


080208-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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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 -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그 공존의 역사를 다시 쓴다, 비움과 나눔의 철학 3
이명권 지음 / 코나투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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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쪽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는 저녁놀이 아름답다. 자연이 빚어내는 환상은 우리가 벗어나기 힘든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게 한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그에게 감사하겠다.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근원적인 문제들과 본질적인 의문들의 열쇠를 단 하나의 존재에게 의탁하는 일은 나약한 이기심의 발로이다. 신의 존재를 설정하고 나면 참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 부조리한 세상과 불공평한 인생도 달리 보이고 현실의 고통까지도 참을 수 있다. 내세와 천국이 우리를 인도하여 영생의 길로 이끌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하게도 나는 <왜 세계의 절반은 왜 굶주리는가?>와 같은 책을 읽으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종교가 없는 유물론자가 신의 존재 여부를 논쟁하거나 증명하는 책에 관심을 가질 리 없다. 다만 신이 갖는 의미와 역할은 다른 문제이다. 엄연히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담임 목사 1인 체제로 공룡처럼 덩치만 키우는 대형 교회나 좋은 돈벌이 수단으로 절을 사고 파는 사람들이 과연 종교인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어디에나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지만 종교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 종교인의 역할과 신도들은 석가나 예수, 무함마드의 말씀과 신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 반문해본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신의 존재 유무는 차치하고서라도 신의 종류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인간 종족이다. 전 인류의 20% 이상이 믿는 종교인 이슬람은 소수 종교가 아니다.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에 비해 역사와 전통, 신도 수에서 결코 2등 종교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슬람교에 대한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 테러리스트를 먼저 떠올리고 호전적이고 폭력적인 이미지의 아랍인을 연상한다. 종교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갖지 않고 있다면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를 비교하고 무함마드와 예수를 견주어 보는 노력과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명권의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은 이러한 의문들에 답하는 좋은 안내서이다. 특정 종교에 대한 비교 우위를 논하는 책도 아니고 복음을 전파하거나 선교를 위한 책은 더더욱 아니다. 제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가 지금까지 오해하고 있는, 혹은 잘 알지 못하는 무함마드의 존재와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한 해설서이다. 무함마드와 예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확인하는 것은 두 종교를 이해하는 초석이 된다. 이 책은 크게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무함마드와 예수를 비교하고 이것을 토대로 2부에서는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정 종교의 입장에서 치우친 견해를 밝히거나 오호의 감정이 개입되었다면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았을 것이다. 비교적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일반적으로 모르고 있는 내용에 대한 안내와 잘 알려진 예수를 비교함으로써 이해의 폭을 넓혀주고 있는 책이다.

문제는 구원의 주체가 누구이며, 구원의 중개자가 누구인가 하는 소위 메시아에 대한 개념에서 이들의 신앙은 달라지고 만다. 무함마드는 어디까지나 알라-하나님의 사도로서의 역할만 할 뿐이지만, 신약성서와 그리스도교에서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한 세상의 메시아이자 삼위일체의 존재로 평가된다. 이른바 예수는 하나님과 같은 위치를 지닌 구세주로서의 신앙의 대상이 된다. - P. 155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에서 믿는 신은 모두 하나님GOD이다. 십자군 전쟁을 위시해서 종교 전쟁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의 가르침과는 모순된 논리지만 인류는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았다. 믿는 것은 하나인데 그들끼리는 싸운다. 초등학생에게 물어 답이 나오지 않으면 그것은 상식에 위배된다고 나는 믿는다. 물론, 교리상의 차이와 신의 말씀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벌어지고 갈등과 반목이 생겨났다고 해도 종교의 근본 원리나 목적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무함마드를 사도(예언자)로 규정하여 일위일체만을 인정하는 이슬람교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규정하여 삼위일체론을 펼치는 그리스도교는 출발부터 다를 양상을 보인다. 무함마드와 예수의 존재를 어떻게 규정하느냐가 바로 두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과 해석의 틀을 달리한다. 핵심적인 차이점이 드러냄으로써 유사성은 묻혀버리고 만다. ‘라 일라하 일랄라La ilaha illa Allah’ 즉,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꾸란>의 가르침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각종 <복음서>들이 전하는 말씀과 무함마드의 <하디스>는 두 종교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쉽게 말해서 무함마드는 인간이고 예수는 신이다. 이슬람의 입장에서 예수는 인간이고 사도(예언자)일 뿐 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신앙고백, 공식예배, 자선, 단신, 순례’의 다섯가지 기둥이 이슬람교를 버텨내고 있다. 이슬람의 역사와 경전인 <꾸란>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차이점으로 받아들인 점은 ‘자선’이다. 예수는 마음을 중시했고 의도를 중시했지만 이슬람에서 ‘자선’은 의무사항이다. 명목상 십일조를 통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를 돕고 있지만 강제 사항은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해석이다. 반면에 이슬람교는 ‘자선’이 거역할 수 없는 의무사항에 해당된다. 최근 사찰이나 교회, 목사 등 납세 문제가 언론에서도 다루어지고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눔의 역할과 순수한 종교의 목적에 충실한가를 따져보는 일이다. 대다수의 종교인들이 이러한 가르침에 충실하며 사회의 어둠과 그늘진 곳을 보살피고 있겠지만 과연 ‘대다수’라고 말할 수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이영희 선생은 한국 교회는 ‘모이자! 돈내라! 집짓자!’는 세 마디로 실날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특정 종교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우리나라 교회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서방 언론에 의한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한 편견을 버릴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갖추어졌다면 이 책은 우리에게 읽을 만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무함마드와 예수가 누구인지 보다,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어떤 종교인지 보다 여전히 그것들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이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과 반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080205-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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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눈물 사용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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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아가는 동안 가장 자주 느끼는 감정은 기쁨보다 슬픔일 것이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아픔과 고통, 후회와 절망으로 버무려져 있다.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환희의 순간을 시나 소설로 기록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는 작가는 많지 않다. 쉽게 말해 사랑할 때 보다 이별 후에 우리는 일기를 쓰거나 편지를 쓰고 내면의 풍경을 돌아보게 된다는 말이다.

  천운영의 소설집 <그녀의 눈물 사용법>은 지나치게 속물적인 제목이다. 소설이라는 장르의 출발 자체가 고급문화와는 거리가 멀지만 유행가 가사같은 제목으로 일단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대중적이라고 해서 모두 비속하거나 예술적이라고 해서 전부 난해하고 어려운 것은 아니다. 모든 작가들의 영원한 숙제인 예술성과 대중성의 절묘한 조화는 이루어내기 어려운 경지임에 틀림없다. 천운영의 소설집은 제목으로 판단컨대 충분히 대중적이다.

  이렇게 속단하고 책을 구입한다면 후회하기 십상이다. 그의 전작들을 읽어본 독자들이라면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지만 처음 대하는 사람들이라면 애절한 연애소설 쯤으로 짐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의도야 어찌됐든 천운영의 소설은 이전에 그녀가 보여주었던 이야기들에서 한 발 내딛고 있지만 커다란 범주에서 보면 그녀만의 색깔을 완고하게 고집하고 있다. <바늘>과 <명랑>을 통해 내가 만났던 그녀의 모습은 이번 소설집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과정일 수도 있고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기 위한 과정일 수도 있다.

  여러 평론가들과 독자들의 충분한 주목을 받을 만큼 그녀의 소설들은 매혹적이었으며 특별했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글에 묻어나는 도발적인 시선 때문이었고 길들여지지 않은 외로움과 자유로운 상상 때문이었다. 여성성을 폭력적으로 드러냈던 단편들과 집요하고 치밀한 관찰의 결과물들을 세세한 묘사를 통해 보여줬던 단편들이 사실적이면서 독자들에게 불편한 진실들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현실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일 수도 있고 감추어진 진실과 드러나지 않는 시선에 대한 거울의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 작가이다. 천운영은 삶이 드러내는 우울과 고통을 드러내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독자들을 불편하게 한다. 끔찍하거나 잔인하기 때문에 눈감아 버리고 싶은 현실이 아니라 쉽게 감지되지 않는 영역들과 굳이 관심을 가지고 싶지 않은 것들에 대해 천착하는 태도는 그녀를 다른 작가들과 구별짓게 한다.

  단편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는 2007년 이상 문학상 수상 후보작으로 먼저 만났다. 노파의 누드를 찍는 소년을 본 작중 화자의 느낌은 지독한 편견과 독선에 대한 허망한 패배처럼 보인다. 카메라의 피사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작가의 시선은 프레임 안에 고정될 수밖에 없다. 장록 속에서 죽어가는 아이의 숨소리가 귀에 들릴 듯한 ‘그녀의 눈물 사용법’은 영과 육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부조리가 빚어내는 아픈 상처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세상은 결코 공평하지도 순수하지도 않다. 누구나 장롱 속에 감추어 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눈물을 유발하는 요인일 수 있지만 구체적인 사용법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알리의 줄넘기’는 혼혈 2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1인칭 화자인 여자 아이 알리는 유머를 잃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을 기억한다. ‘내가 데려다 줄게’는 태생적 소수자인 알리와 다르게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사람이다. 억울함을 풀기 위해 자살을 결심한 사내를 통해 우울한 삶의 단면을 드러낸다. ‘노래하는 꽃마차’와 ‘후에’에서는 가족 구성원의 부재를 통해 결핍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쓴 것’과 ‘백조의 호수’는 오히려 완벽해 보이는 인물의 이면을 들춰낸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거칠게 보이지만 그녀의 솜씨는 고통의 흔적이며 상처가 만들어낸 선명한 생채기의 모습이다.

  또 하나의 세계를 넘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도 있고 지금까지 보여줬던 모습을 더욱 구체화할 수도 있겠지만 천운영은 이제 한 걸음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감추어진 욕망과 그것이 욕망인 줄도 모른 채 억압된 것들에 대한 고단한 열망들을 보여줬다면 이제 그것들을 안아줄 수 있는 여유과 작은 희망의 씨앗들을 심어야 하지 않을까? 버려진 것들이 아니라 낮은 곳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와 아픔을 보여줬으니 이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혹은 그 이전의 모습들이 간직한 꿈과 만나고 싶다.

  ‘바늘’에 찔릴 것 같은 예리함과 섬세함으로 무장한 그녀의 문장들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새로움과 특별함에 대한 강박증을 벗고 독자들도 그녀의 색다른 모습들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빛과 밝음의 세계에 식상한 독자들에게 천운영의 소설은 별미와 같다. 그 독특함을 기대하는 독자이거나 또 다른 모습을 기대하는 독자이거나 <그녀의 눈물 사용법>은 대조적인 관점으로 읽혀지겠다.


080203-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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