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 통합적 사유를 위한 인문학 강의 1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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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온다는 예보를 믿고 남쪽 행을 포기했다. 예약을 취소하고 영화 한 편으로 위로하니 흐린 하늘이 한결 여유로운 주말이었다. 창가에 앉아 얇은 책 한 권을 꼼꼼하게 읽으며 간만에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바쁘고 해야 할 공부(?)와 욕심나는 책들은 여전히 늘어만 간다. 일종의 강박증이거나 또 하나의 벗어나기 힘든 욕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좀체 벗어나기 어렵다.

  특히 이렇게 마음 맞는 책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진지하면 더욱 그렇다. 강유원의 책은 예전에 김광석의 노래가 그랬던 것처럼 무조건 사서 읽는다. ‘래디컬’이란 단어를 좋아한다는 그의 취향이 나와 일치할 순 없겠지만 그의 생각과 공부 방법,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와 관점은 더 없이 매력적이다. 물론 철저하게 개인적인 관점으로 그렇다. 친구가 없을 것 같은 그의 삶의 태도와 공부 방식은 의도적으로 언론을 기피하고 대인관계를 정리하는 강준만의 방식과는 또 다를 것이라고 짐작한다.

  스스로를 삼가고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 독서와 강의를 통해 앎의 범위를 확장시키고 공유하며 더불어 공부하는 그의 방식은 ‘공부’에 관한 한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이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방식과 강유원의 태도는 여전히 도전하고 노력해야 하는 대상과 공간으로 남아 있다. 시간이 없다는 말 같지 않은 핑계로 미루고 있지만 마음의 빚처럼 청산되지 않고 조금씩 더디지만 발걸음을 내딛뎌야 하지 않나 싶다. 갈 길은 멀고 험하지만 시간은 없고 삶은 팍팍하기만 하다. 제대로 살기는 제대로 죽기보다 어렵다.

  강유원의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는 통합적 사유를 위한 인문학 강의를 노트처럼 묶어 낸 책이다. 그러니 더없이 자유롭고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저자의 목소리는 생생하고 의도와 감정이 직설적으로 드러나며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하는 부분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올 상반기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혹은 많이 배운 책을 꼽는 다면 이 책을 꼽아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책을 읽는 근본적인 이유와 태도에 대해 이렇게 진지하고 깊이 있게 고민하고 성찰하게 해 준 책은 없었다. 다른 책들을 통해서 조금씩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겠지만 나는 강유원의 이 책을 통해 가장 많이 공감하고 고민했으며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한 진지한 모색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수박 껍데기만 핥아대는 책읽기에 대한 뼈아픈 충고와 고전을 제대로 읽는 방법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방법은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강유원이 제시하는 방법이 최선을 아니겠지만 적어도 노력과 태도 면에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더구나 단순히 읽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를 통해 그것들을 정리하고 공부를 마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일치되는 공통된 견해이다.

  ‘정치사상’이라는 주제로 묶어 놓은 책은 플라톤의 <국가>와 <정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로크의 <통치론>이다. 이에 앞서 고전을 읽을 때 유념할 점들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 제목만 옮겨 보겠다. ‘오늘날 통용되는 분류 방식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기록매체나 편집 방식이 오늘날과 다르다는 것을 기억하라. 저자 자신과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 알아야 한다. 기본 개념을 철저하게 익혀라. 텍스트의 형식을 살펴라.’ 깊은 공부와 꼼꼼한 책읽기가 아니면 불가능한 생각들이다. ‘정치사상’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거시적인 관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실제 서양 고전을 통해 서양의 정치사상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화려한 말빨을 앞세우지도 대단한 이론도 없다. 그가 주장한 대로 있는 사실 그대로 서술함으로써 얻어지는 이 놀라운 결과는 다른 책들과 구별되는 특별함이다. 책 자체가 뛰어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읽고 분석하고 정리하는 능력과 노력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나는 플라톤의 <국가>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었지만 강유원이 제시하는 방식으로 따진다면 반절도 읽지 못한 셈이 된다. 책을 읽고 정리하는 데 비법이나 정답이 있을 수는 없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일반적으로 취하는 방식은 책을 읽고 제대로 공부했다고 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많은 걸 얻었다. 제시한 방법대로 읽지 못하더라도, 그대로 따라하기 힘들더라도 책을 보는 안목은 이전과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 참고로 제시한 몇 권의 책을 얻었고 로크의 <통치론>이 숙제로 남겨졌지만 200페이지도 안되는 이 얇은 책을 통해 두고두고 새겨야할 지침과 방법들을 배웠다.

  직접 강의를 듣지는 못했지만 이 시리즈는 계속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기다려진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를 50번 읽었다는 전설적인 공부 방법만으로 그를 존경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고전을 읽는 방법과 태도가 이러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 나가면서 부끄러워졌다. 좀더 갈고 닦고 배로 노력할 일이다. 무릇 공부는 이제부터라고 믿는다. 마음을 닦고 몸을 닦고 뜻을 바로 세우고 영혼을 말게 하는 인문학 공부는 깨닫는 즐거움을 전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목적도 없고 끝도 알 수 없지만 묵묵히 걸어야 할 길이다.

  덧붙여 글쓰기 훈련에 대한 충고는 더더욱 깊이 새겨진다. 요약문 쓰기, 보고서 쓰기, 소논문 쓰기로 나누어 2장과 3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데 강유원만의 방식이 아니라 군살을 뺀 정확하고 잘 벼려진 칼날같은 글쓰기가 무엇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서술이 보여주는 힘이 무엇인지 잘 소개되어 있으며 힘을 빼고 감상적이지 않으며 정확하게 쓰는 방식에 대해 천천히 고민해야 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갈 길은 바쁘고 공부해야 할 책은 넘쳐 난다. 그것이 무엇이든 왜 선택을 했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안 되는 공부를 선택한 강유원이나 그 강의를 듣는 많은 사람들이나 그의 책을 보고 고개를 숙이는 나 같은 사람 모두가 공감할 수 있고 뜻이 통할 수 있는 그 무엇에 대해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다.

  ‘진짜’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꼭 이 책을 읽어야 한다.


080629-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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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08-06-30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전에 쓰신 <몸으로하는 공부>의 리뷰를 읽고 저도 따라 읽었습니다. 참 기쁘고도 부끄러운 경험을 하게 해주셨습니다. 이번 책도 여력이 닿는대로 따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좋은 리뷰에 대한 감사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이 Thanks To밖에 없어 몇자 남겼습니다. 고맙습니다.

sceptic 2008-06-30 23:44   좋아요 0 | URL
제가 부끄러워지네요. 책도 머리로 읽는 책이 있고 마음으로 읽는 책이 있는데 가끔 몸으로 읽는 책이 있지요... 공감해주시니 제가 감사합니다.
 

인문학 고전 공부는 대학에 다니거나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과 세계의 근본적인 바탕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 - P. 14.

우리가 어떤 책을 읽을 때 그 책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은 그 책에서 사용하는 기본적인 개념의 뜻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 P. 26

철학은 한 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문제를 우리 함께 고민해 보자는 시도이다. 그래서 환상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한마디로 딱 부러지는 구원의 메시지도 없다. - P. 34

어떤 사람들은 플라톤이 민주주의가 최고의 가치인 시대에 독재를 찬양했으며, 그에 따라 그의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독재를 찬양한 건 맞는 말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해서 존재의 변화를 주장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것이 플라톤 읽기의 요체다. - P. 80

고전은 역자해제를 먼저 읽어서 참조한다는 것을 유념하기 바란다. - P. 100

우리가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잘못 중에서 가장 흔한 것은 범주 착각의 오류이다. 가령 이명박이 성공한 CEO 대통령 후보로 지지했다는 사람들의 생각을 살펴보자. - P. 113

글을 쓸 때는 증거가 많고 결론이 간결해야 한다. 그리고 본문의 내용과 많이 벗어난 멋있는 말을 마지막에 장식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 P. 114

논술시험 볼 때 느낀 점 쓰면 감점이다. 100명이 논술을 보면 90명은 느낀 점을 쓴다고 한다. 객관적 사실만 있는 그대로 서술해서 전제와 결론의 균형을 맞추는 사람만 점수를 받는다. 보고서는 100퍼센트 서술로 이루어져 있다. - P. 115

보고서는 앞서 말했듯이 어떤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 중에서 좁은 범위의 주제를 정한 다음 그 내용을 책에 있는 그대로 정리하는 것이다. 소논문은 보고서와는 달리 자신의 주장이 들어가는 글이다. 그렇지만 보고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주장을 정해 놓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을 모아서 규모 있게 제시하는 것이 조금 다를 뿐이다. - P. 115

보고서든 소논문이든 자신이 서술하고 주장하는 주제의 범위는 좁을수록 좋다. - P. 115

먼저 좁은 범위의 주제를 잡는다. 그런 다음 해당되는 주 텍스트를 읽고 해당 주제에 대한 간략한 정리글을 쓴다. 이 개요를 가지고 참고문헌을 찾는다. - P. 116

인문학 공부하는 사람이 글을 쓰는 데 창의력은 중요하지 않다. 창의력이 뛰어난 사람은 인문학 공부를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창의력 뛰어난 사람은 돈 되는 일을 한다. 인문학은 보잘 것 없더라도 온전히 자기 것을 갖고자 하는 이들이 몸으로 때워가며 공부하는 거다. 그러니 창조적인 메시지를 넣으려 하지 말자. 진짜로 무서운 메시지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서술했는데 그 서술을 읽고 난 독자가 폭풍을 맞은 것처럼 떨게 되는 그런 것이다. - P. 117

지금까지 한 이야기의 핵심은 다음 네 가지이다. 소논문의 주제는 범위를 좁게 잡아라. 자신이 쓸 글의 목차를 짠 다음에 참고문헌을 찾는다. 참고문헌을 읽을 때는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읽는다. 글을 쓸 때는 메시지 강박증에 빠지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것만 서술해야 한다. - P.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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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딸의 7일간
이가라시 다카히사 지음, 이영미 옮김 / 까멜레옹(비룡소)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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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와 명왕성만큼 닿을 수 없는 관계가 아버지와 딸의 관계가 아닐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 어머니와 딸의 관계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아버지와 딸의 관계이다. 물론 성격과 상황에 따라 관계는 변화하고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진다. 그것은 나이라고 하는 불가항력적인 요인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어린시절 아장거리며 품에 안기던 기억, 선머슴 같던 유년시절을 거쳐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아버지와 딸은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세대가 달라지고 시간이 흘러도 그만큼의 시차가 존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 딸이 어머니가 되고 나이가 들면서 그 때 아버지를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 둘의 관계는 또 다른 양상으로 변화하며 또 다른 관점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된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차이와 세대 차이 그리고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가 만들어내는 복잡한 관계는 가장 친밀하고 애틋한 관계가 되기도 하지만 애증의 거리를 회복할 수 없도록 만들기도 한다.

  <아빠와 딸의 7일간>은 환상적 리얼리즘이다.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을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당황스럽고 놀랄만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어 환상적이다. 하지만 가장 보편적이고 공감할 만한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돌아보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적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있어 서로를 이해하는 상황극이나 역할극의 성격을 보여준다. 흔히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을 쓰지만 실제로 그렇게 해 볼 수는 없다. 다만 공감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자신의 경험과 느낌으로 유추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것을 실제 상황으로 치환시켜 놓고 있다. 아버지가 딸이 되고 딸이 아버지가 되는 상황.

  고등학교 2학년 여고생과 마흔 일곱 살 중년의 아버지는 대화도 없고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부녀지간이다. 아버지는 딸에게 말도 건네고 친해보려고 무던히 노력하지만 세대 차이와 생각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신세대 딸과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지는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지진으로 인한 전차 사고로 인해 두 사람은 심한 충격을 받고 깨어나지만 몸이 뒤바뀌는 황당한 일을 겪게 된다.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 부분은 소설만이 가능한 상상력의 힘이다. 다른 소설이나 영화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어 신선도가 떨어지긴 하지만 아버지와 딸의 몸이 바뀐다는 상상은 끔찍하지만 재미있다.

  일본에서는 이미 드라마로 방영된다는 데 책을 읽다가 알게 되었다. 상황 설정이 재미있어 호기심에 읽게 되었지만 나름대로 관계에 대한 의문과 이해를 바탕에 두고 있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읽게 되었다. 문장은 가볍고 쉽게 읽힌다. 요즘 팔리는 대부분의 일본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담  이 넘어가는 책장과 코믹 터치의 문장은 흡인력있게 독자들에게 다가갈 만하다. 재미와 감동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최고는 아니지만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이다.

  타인은 이해 불가능한 텍스트에 불과하다.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소모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려는 무모한 도전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스스로 자괴감을 느끼며 외로움과 절망 속을 헤매기도 한다. 내가 아닌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은 어쩌면 산을 옮기는 것보다 힘들다. 주변을 보라. 사소한 언쟁에서 중요한 판단에 이르기까지 타인에 대한 배려나 인정은 정말 어렵다. 나이가 들수록 심해지는 이 현상을 나는 보수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이 책에서 보수적인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딸이다. 어리기 때문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으나 아버지에 대한 이해도 노력도 부족하다. 오히려 아버지가 딸에 대한 배려와 노력이 드러난다. 물론 사고 이후에는 서로의 입장에서 상대를 바라보기 때문에 완전히 뒤바뀐 상황과 시선이 나타난다. 자신의 장점이 상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나의 생각만이 옳은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것인지 깨닫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을 높이 평가할 만하다.

  기본적인 서사구조와 구성 자체는 지극히 단순하다. 7일 만에 사고로 다시 제자리를 찾으면서 소설은 막을 내린다. 그간 부녀가 겪었던 지극히 비일상적이고 황당한 순간들은 에피소드로 남겨진다. 제 자리로 돌아온 두 사람은 또 예전처럼 다정한 대화도 없고 멀고 먼 존재로 돌아간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는 폭과 깊이는 분명 이전과 달라진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지난 7일간의 경험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특별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통과제의를 겪고 어른으로 성숙하는 성장소설처럼 몸이 뒤바뀐 7일간은 두 부녀에게 지독한 통과의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 적당해 보인다. 다소 황당하지만 흥미 있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코믹하고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내용 또한 그러하고 여고생의 연애와 중년 남성의 일을 꼼꼼히 담고 있어 폭넓은 계층의 관심을 끌 만하다.

  가볍고 재미있는 소재로 한번쯤 서로의 관계를 살펴보고 고민해 볼 수 있다면 소설이 할 수 있는 역할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사춘기 딸을 둔 아버지들에게, 중년의 아버지를 둔 딸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멀지 않은 나의 미래는 아닌가 싶어지기도 해서 서글퍼지기도 하지만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고 위안을 삼는다. 아니 어쩌면 소설이 현실보다 사실적일 수 있다는 불안감을 위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080627-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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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환상의 물매
김영민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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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연인은 늘,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 한다”는 결여에 시달리는 법이다. 그 시달리는 방식은 은밀하고 집요하다. 수동과 능동의 정서가 변덕스럽게 교차하면서 양철판을 긁듯이 간지럽힌다. - P. 21

  결핍과 잉여는 연애의 영원한 딜레마이다. 항상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동반한 열병처럼 찾아오는 연애의 시작은 찬란하기보다 깊은 고통이다. 견딜 수 없을만큼 지독한 불면과 울렁증으로 연인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스스로 만들어 낸 열정 속에 함몰하게 된다. 대개의 경우 그 지속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이후 벌어지는 상황과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된 관계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변화되지만 식어버린 감정은 참담하기까지 하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철학자 김영민은 ‘환상의 물매’라는 말로 ‘사랑’에 대한 정의와 분석을 시작한다. 은밀하고 집요한 방식으로 인간의 영혼을 잠식하는 그 모호한 감정에 대해 정의하는 일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김영민은 특유의 사색적이고 분석적인 방식으로 하나하나 사랑의 모호한 안개를 걷어낸다.

  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표현과 문장들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언어의 사유의 힘이며 개념은 대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그런 점에서 김영민의 문장들은 대상의 분석에 천착하고 있다. 언어와 개념들 간의 관계는 일시적이고 우연적일 수 없다. 사랑이라는 대상에 대한 깊은 성찰과 아포리즘들은 짧은 문장들의 긴밀한 긴장감을 통해 더욱 견고하고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결코 만만치 않은 글들이 이어진다. 때로는 한 문장으로 명징한 상상의 세계로 이끌고 때로는 탄탄한 구조의 문장들이 하나의 관계망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사유하고 공감하며 돌아본다. 김영민의 글들을 계속 읽게 되는 이 묘한 매력에 대해 뭔가 분명하게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젊은 시절 2000여편의 시와 6편의 소설을 불태웠던 지난한 과정으로 길어낸 사색과 문장의 힘일까?

모욕과 상처의 기억은 단순히 기억이 아니라 여전한 폭력이다. 왜냐하면 상처의 기억은 곧 기억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 P. 46

  예를 들어 이와 같은 문장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언어를 뒤집어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전복시킨다. 상처의 기억이 기억의 상처가 된다는 동어반복적이고 역설적인 표현은 순간 멈칫거리게 한다. 내 기억의 상처는 무엇일까? 그것은 상처의 기억일까?

  사랑이라는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주제를 다양한 콘서트처럼 아포리즘 형식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김영민의 힘은 놀랍기만 하다. 단순하고 가벼운 놀이로서의 감정이 아니고, 일상에서 마주하는 욕망과 생활의 대체물로서 사랑도 아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관계 속에서 풀어내고 있는 이 놀라운 감정을 김영민은 차분하게 사유하고 있다.

  필연이고 숙명이라 굳게 믿고 싶었던 환상에서 벗어나는 순간 비로소 사랑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열정과 자기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사랑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보다 객관적인 거리와 시선으로 사물과 상황을 바라본다. 우리는 그것을 상처의 기억이라 부른다.

  철저하게 남녀 간의 연애 감정을 전제로 한 이 죽일놈의 사랑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사랑의 실체가 아니라 타인의 관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변주되는 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은 지나가버린 시간들에 대한 경의로움보다는 아쉬움과 기억의 상처 때문이리라.

  여전히, 사랑은 환상이며 환각이고 환유이며 환멸이고 환락이며 환영이다. 누구나 한 번쯤 정의내리는 사랑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이고 사적인 세계를 넘어 사랑의 진경은 어디쯤에서 만날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다만 철학작 김영민이 말하는 사랑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면 감성과 파토스의 세계가 아니라 이성과 로고스의 세계로 수평 이동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그 안에서 답을 구할 수는 없겠지만 그저 한가롭게 거닐다 어떤 순간을 조우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의 모호한 경계는 사랑하는 두 사람의 관계에 가장 정확하게 적용되는 말일 수도 있겠다. 김영민은 이 책의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한다. 자신의 마음조차 모른다는 사실 속에 ‘사랑의 진실’이 맥동한다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독자들은 공감할 수 있을까? 아니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사랑은 도대체 무어냐? 책장을 덮고서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알 수 있다면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일까?

“달은 기울어 밤이 삼경인데, 두 사람의 마음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안다”고 하였다. 그러나 삼경이든 오경이든, 두 사람의 마음을 두 사람조차 모른다는 사실 속에 사랑의 진실이 맥동脈動하는 법. 그 마음은 어느 먼 미래의 것이었고, 매번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 속하였다. - P. 255


0806025-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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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ia 2008-06-26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이버보다는 여기가 한가로운거 같아요~ 리뷰도 찬찬히 읽어볼만하지만
댓글이 더 재미있어요. ^^
동무와연인 이후로 김영민한테 반해버리셨나바요~ ㅎㅎ

전 사랑은 미친짓이다, 라는 책을 보는데 잘 들어오진 않네요
그래도 윤대녕의 글은 단숨에 읽었어요
음.. 이런 사람있으면 사랑하고 싶을 것 같아요 .
시드니폴락감독은 작품을 지탱하는 건 골격이고 그 골격이 없으면 작품은 무너지지만
그건 보이지 않아야 한다, 골격이 보이면 실패작이다, 라고 말했다지요..
윤대녕이 그런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바로 그런 어떤점에서 닮아있어요..

바쁘시다면서 어쩜 이런 일기를 쓰실수 있죠?
연구대상이세요. ㅎㅎ
편안한 밤 되시길. ^^

sceptic 2008-06-27 12:30   좋아요 0 | URL
동의합니다. 골격에 대한 시드니폴락의 이야기...

소설이든 어떤 이야기든 서사구조는 늘 그런식이죠. 숨은 골격에 붙은 살덩이만 파먹을 수 없으니까요.

김영민의 문장은 탄탄한 골격을 겉으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오히려 이물스럽지만 그 점이 맘에 들기도 하구요. 현학적이거나 작위적이라고 느껴지지 않고
소화시키고 싶은 욕망과 여운이 남으니까요.

바빠도 일기는 써야죠...^^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시죠?

2008-06-29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7-13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7-13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릇 연인은 늘,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 한다”는 결여에 시달리는 법이다. 그 시달리는 방식은 은밀하고 집요하다. 수동과 능동의 정서가 변덕스럽게 교차하면서 양철판을 긁듯이 간지럽힌다. - P. 21

결여감은 곧 잉여감을 낳고, 잉여감은 다시 결여감을 불러들인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했던 사람을 동경하고, 사랑했던 사람은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동경한다. - P. 39

모욕과 상처의 기억은 단순히 기억이 아니라 여전한 폭력이다. 왜냐하면 상처의 기억은 곧 기억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 P. 46

사랑은 운명적인 접슬接膝이 아니다. 사랑은 우연하게, 그리고 우연한 ‘사이’에서 자신의 알리바이를 찾아 나온다. 알리바이가 아닌 사랑, 칸트의 물자체Ding-an-sich 같은 사랑을 보았는가? - 85

물건들 사이의 인력이 아닌, 연인 사이의 그리움이 대칭적일 리 없고, 또 흔히 그리움이란 그 속성상 비대칭성에 의해서 그 빈도/강도가 높아지는 법이니, 그리움은 인력이긴 하되 바로 그 물매 효과에 의해서 생기는 경사의 템포 탓에 일종의 공포, 혹은 위기의식이 수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P. 140

그리움도 만남을 연기하는 과정이요, 애무도 섹스를 연기하는 과정이요, 연애도 혼인을 연기하는 과정이요, 사랑도 그 완성을 연기하는 과정일 수 있을 터. 심지어, 과연 삶인들, 죽음을 연기하는 기술적 과정이 아닐런가? - P. 223

고백과 소문은 서로를 모른 체하면서도 실은 내연의 관계다. 우선 둘 다 반칙이며, 둘 다 전염병이기 때문이다. - P.250

혜원 신윤복의 <월하정인月下情人>의 화제畵題는, “달은 기울어 밤이 삼경인데, 두 사람의 마음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안다”고 하였다. 그러나 삼경이든 오경이든, 두 사람의 마음을 두 사람조차 모른다는 사실 속에 사랑의 진실이 맥동脈動하는 법. 그 마음은 어느 먼 미래의 것이었고, 매번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 속하였다. - P.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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