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한 연구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전기순 옮김 / 풀빛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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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사랑에 대해 할 말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의미의 진폭이 너무 크거나 모호해서 말할 수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어렵고 추상적인 대상이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아무리 쉽게 말한다 해도 미진하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어 답답한 것이 사랑이다. 그것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방식이 문제가 아니라 느끼고 겪는 과정은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 모든 경우의 수를 나타내는 사랑은 인류와 함께 생성했으며 멸종되는 날까지 함께 할 것이다.

  인간은 과연 사랑 없이도 살 수 있을까? 가장 바보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면 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 사랑의 종류와 범위를 구별하지 않고 말하기 어렵지만 진화생물학적 관점으로 보더라도 사랑은 종족 보존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일 수밖에 없다. 그밖에 다양한 사랑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말이다.

  <사랑에 관한 연구>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이 책은 스페인의 철학자 가세트의 것이기에 주저 없이 선택했다. 명성에 기댔다가 X되는 경우도 많지만 안전한 선택의 유혹을 떨치기도 힘들다. 어쨌든 이런 종류의 책이 많이 팔릴 거라고 출판사는 믿지 않았겠지만 그 예상이 별로 빗나갈 것 같지도 않다. 철학자가 말하는 사랑이라니! 그러나 재밌다. 분량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밑줄로 책을 지저분하게 했을 정도이니 나에게는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책이었다.

  그것이 경험에 기댄 긍정과 공감이든 이성과 논리에 의한 개념이든 사랑에 관한 깊은 사유와 성찰을 만나게 된다. 옮긴이의 말을 통해 가세트의 삶과 사상을 먼전 읽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사랑의 본질에 관하여, 남자의 심리와 본능, 무엇이 남자의 사랑을 완성시키는가? 라는 제목으로 1, 2, 3부가 구성되어 있다. 표면적으로는 싸구려 연애담에 불과한 책으로 보인다.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기 위한 실전 테크닉이나 방법론으로 잘못 알고 사는 사람이 있을 법하다. 또 그러면 어떤가? 어차피 가세트의 사랑은 남자가 여자가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 썼다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으니.

  사랑의 본질에 관한 부분들은 한 문장 한 문장, 한 줄 한 줄이 모두 경구처럼 깊이 있고 분석적이다. 깊은 성찰과 사유가 없이는 불가능한 이야기들이다. 사랑은 고통의 다른 말이며, 대상을 향한 끊임없는 에너지라는 정의에서 출발한 가세트는 스탕달의 <연애론>을 비판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잘못된 경험의 결과로, 스탕달은 사랑은 이루어지는 것이며 결론이 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 두 가지 속성이야말로 사이비 연애의 특징이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사랑은 태양과 모든 별들을 움직일 만큼 위대하기도 하지만 한 인간을 파멸로 몰고 가는 욕망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쉽게 인정하거나 통용될 수 있는 하나의 정의나 개념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이 본능적인 감정에 대해 저자는 때로는 감성과 직관에 의존하기도 하고 때로는 경험과 사유에 의존하기도 하면서 생각의 실마리를 잘 풀어나가고 있다. 철학자가 바라본 ‘사랑’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이 있을 거라는 기대보다는 그저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수많은 사랑, 다양한 사랑들을 정리하고 규정짓고 있다는 데 의의를 두면 될 듯하다.

내 생각에 온전한 사랑이라면, 환경과 거리상의 장애가 충분한 애정을 공급하는 걸 방해하여 애정의 굵은 선이 가는 선으로 바뀔지는 모르지만, 말라비틀어진 상태에서도 감정의 동맥은 사랑을 끊임없이 담아 심장으로 옮기는 법이다. 그게 제대로 된 사랑의 운명이다. 결코 죽지 않는, 적어도 감정의 본질만은 손상되지 않는 바로 그런 사랑. - P. 38

  우리는 언제나 영원한 사랑, 완전한 사랑을 꿈꾼다. 어쩌면 그것은 모든 인간의 로망이며 삶의 이유일 수 있다. 이 시대의 사랑은 과연 어떠한가? 전 존재가 합일될 수 없는 순수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상황과 조건, 현실과 미래가 복잡하게 계산된 사랑만이 결실을 맺는지도 모른다. 현실은 이상적인 사랑과 늘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 가슴속에 품고 있는 사랑만큼은 그렇게 쉽게 속단하기 어렵다.

  가세트는 19세기 말에 스페인에서 태어나 20세기 초, 혼란스런 세계사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조국 스페인은 프랑코 독재정권에 신음하고 있었고 오랜 기간 동안 망명생활을 했다는 개인적 경험이 사랑에 대한 색다른 견해를 얻는데 일조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가 보여주고 말해주는 사랑은 남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감정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사랑의 본질이나 일반론에 비추어 논의가 전개되지만 남성인 가세트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한계가 아니라 하나의 관점으로 이해한다면 지나치게 관대한 평가일까?

  김영민의 책을 읽을 때처럼, 아니 대부분 철학자의 글들이 그러하지만 한 문장도 긴장을 늦추거나 편안하게 논의의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다. 집중력과 긴 호흡의 사유가 필요하다. 조용하고 1시간 이상 시간이 확보될 때 이 책을 꼼꼼히 읽고 공감하며 곱씹을 수 있다면 색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단편적인 문장과 표현들로 새로움을 주기는 어렵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랑은 그렇게 쉽게 말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을 쉽게 드러내고 표현하며 보여줄 수도 있겠지만 가세트는 자신의 사유와 경험들을 이전의 논의들에 대한 비판과 사례를 들어 정확하고 꼼꼼하게 정리해 내고 있다. 옮긴이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어렵고 난해한 문장들은 의역을 하고 생략을 하기도 했다는데 약인지 독인지 알지도 못하고 먹은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난처하다. 제대로 읽은 것인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분적으로 편집되거나 역자에 의해 재해석된 문장들이 주는 울림은 원저자의 그것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스페인어를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쉬움은 남지만 그것을 상쇄할 만큼 충분히 가슴에 남을 만한 책이다.

온전한 사랑이란 일단 태어나면 소멸되지 않는다. 거짓말 같지만 이것이 진실이다. - P. 37


080712-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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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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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은 많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다. 당신은 어떤 세상을 꿈꾸는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세상은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는 계기조차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도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본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꾼다면 그것은 곧 현실이 된다고 하는데 세상은 여전히 요지부동이고 현실은 희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석훈의 한국경제 대안 시리즈 세 번째 책인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고민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자본주의는 이제 그 대안조차 모호해졌고 현실에서 거부할 수 있는 제도나 체제도 아닌 것이 되었다. 우려와 걱정으로 가득하지만 대안은 저마다 다르다. 자신이 속한 계급이 다르고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방법이 다르므로 문제를 문제로 인식조차 하지 않는 극우 보수 세력이 여전히 건재하다. 건재할 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크고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 도대체 누가 죽였는지 알지도 못하는 ‘경제’를 살리겠다는 신념은 광신적 종교 집단처럼 보이기도 한다. 설령 죽었다 하더라도 살려야 하는 목적과 방법은 대다수 서민들의 삶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이명박 정부에 의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는, 아니 그 이전부터 꾸준히 그 실체조차 모른 채 한발씩 다가서고 있는 대한민국의 제국주의적 경제 체제는 이제 우려할 만한 수준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식민지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우리에게 제국주의가 무슨 말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저자가 지적하는 우려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 책은 단순히 현실에 대한 우려와 경고를 담고 있는 책이 아니다. 시리즈의 첫 번째, 두 번째 책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할 만큼 논리적이고 설득력있게 쓰였다.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이라는 부제가 잘 설명해 주고 있듯이 제국주의적 경제 체제를 닮아가고 있는 혹은 실행하고 있는 우리 경제의 모순과 위험을 경고하고 있는 책이다. 그 대안으로 저자는 ‘평화경제학’이라는 낯선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먼저 시리즈 전체의 틀을 네모니 스니켓의 ‘불행시리즈’에서 빌려왔고, 조안 로빈슨, 로자  룩셈부르크, 도넬라 메도우에게 영감을 받아 경제학에 대한 기본 개념과 관점을 전개하고 있다고 하는 저자의 말은 별로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이 사람들의 책들을 한 권도 읽어보지 못한 사실에 대해 자괴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전공자가 아니라면 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는 게 정상이다. 다만 이들의 성향과 주장에 대해 책을 시작하면서 밝혀놓고 어떤 맥락에서 이 책의 주장들을 이해해야 하는지 밝혀 놓은 부분에 대해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을 뿐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빌리거나 내용을 가공하면서도 마치 자기 생각인 양 떠들어대는 인간들이 워낙 많은 세상이니 말이다. 우석훈의 태도는 일단, 신뢰감이 간다. 태도와 방법면에서는 나무랄 데가 없어 보인다. 외적인 문제를 하나 더 짚자면 문장이다. 어떤 내용의 책이든 그것이 읽을 만한 것이 되려면 간명하고 깔끔한 문장으로 진술되어야 한다. 더구나 문학서적이 아닌 다음에야 말해 무엇 하랴. 정확하게 전달되고 명료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문장이라면 금상첨화다. 아직 2% 부족하다고 느껴지지만 독자들은 읽을 만한 책을 계속 만날 수 있는 기쁨을 누려도 좋겠다.

  “나에게 누군가 학자로서 희망 단 하나를 말하라 한다면, ‘전쟁 없는 상태’라고 답하고 싶다.”는 이 소박한 경제학자의 말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고통이 없는 상태’를 ‘행복’의 기본으로 정의했던 에피쿠로스의 말이 먼저 떠올랐다. 그가 말하는 ‘평화경제학’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며 왜 중요한 것인지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어쨌든 경제도 사람을 떠나서는 말해질 수 없는 것이고 특히 사회, 문화, 정치 상황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아니 이제는 경제가 한 나라의 사회, 문화, 정치를 이끌고 있다고 해야 옳은 말일 것이다. 식민지 없는 제국주의의 울분을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는 1장 세계화 시대,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우리를 왜 촌놈으로, 제국주의로 부르는지 한미FTA나 다이나믹 코리아와 같은 실제 사례를 중심으로 알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내부 식민지 전략의 강화와 건설 자본형 제국주의로 명명된 2장 북으로 향하는 한국 자본주의는 작금의 대북 정책을 돌아보게 하는 대단히 현실적인 경제학이다. 우리가 실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북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태도가 경제를 결정하고 미래를 좌우한다는 너무나 당연하고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극우파 블록의 확대와 생태적 위기를 보여주는 3장  한․중․일을 기다리는 위기들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밝히고 있다. 과거의 경제 상황과 현재를 통한 미래의 전망은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중요한 대목이다.

  그러나 저자는 대안은 없는가라고 묻는다. 마지막 4장에서 평화라는 이름의 공공재가 왜 중요하고 대안이 될 수 있는지 일본과 중국과의 경제 통합 문제 등을 논거로 제시하며 우리의 미래와 정책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결코 지루하지 않고 많지 않은 분량으로 이 많은 이야기들을 간명하게 풀어내고 있다. 저자의 바람대로 10대와 20대에게도 읽힐 만한 책이 되었다.

  특히 닫는 글로 제시된 ‘교육 파시즘의 시대, 학교 파시즘에 부쳐’를 읽다가 눈이 빨개졌다. 억압과 순종적인 시민의 재생산에 복무하는 수많은 교사와 학부모들에게 던지는 비난의 화살과 부끄러움의 글이 뼈에 사무친다. 알면서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거나 대안을 찾기 위해 암중모색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혹은 무엇이 문제인지 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시계바늘처럼 오늘도 학교와 집과 학원을 순례하는 아이들이 눈에 밟힌다.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좋다. 닫는 글만 복사해서 학교 앞에서 학원 광고지 대신 나눠주고 싶다. 아니, 교사와 학부모가 먼저 읽어야겠다. 이 미친 굿판은 언제쯤 걷어 치워질 것인지 서글퍼지는 밤이다.

지금 진행되는 십대들에 대한 교육 파시즘과 이십대에 대한 착취, 이를 멈추는 길이 사실은 한구구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당분간이라도 해소하는 거의 유일한 길이다. 지금 그것ㅇ르 하지 못한다면, 장기적으로 우리에게 열린 길은 파시즘과 제국주의 외에는 없다. 이 문제를 해소하는 것 외에 또 다른 돌파구는, 없다! - P. 273

지금 절정에 도달한 학교 파시즘, 여기에서 벗어날 출구는 두 가지뿐이다. 이 미친 짓을 어른들이 갑자기 깨달음을 얻어 정지시키든지, 아니면 십대들의 총파업, 예를 들면 ‘동맹휴학’이나 ‘수능 총파업’ 같은 걸로 그들 스스로 정지시키든지 둘 중의 하나다. 이를 통해 사회적 해법을 찾지 못한다면, 그 다음은 제국주의를 돌파구로 생각하는 파시즘형 사회의 도래가 있을 뿐이다. 도저히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국민들은 파시즘을 선택하게 된다. - P. 276

한국의 십대, 오후 3시가 되면 집에 돌아갈 수 있게 해주고, 수요일에는 놀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월․화 학교 가고, 수요일 쉬고, 목․금 학교 가고, 토․일 쉬고, 이런 리듬을 만들어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빈 시간을 채울 수 있도록 도서관과 문화센터, 문학회와 그룹사운드 혹은 과학실험실 같은 것을 만들어주는 게 지금 정부가 해야 할 일 같다. 그리고 어른들은 지금의 십대가 그렇게 지식과 여유, 도전과 예술, 포용과 인권 같은 것들을 내면화한, 그런 자유로우면서도 창의로운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해야 한다. 스위스와 스웨덴 혹은 독일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고, 핀란드와 네덜란드다, 덴마크도 이렇게 한다. 이게 안 되나? 세계 7대 강국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1000만 원씩 등록금 내라고 하고 하루 여섯 시간도 못 자게 하면서 학생들을 ‘좀비 프로그램’에다 집어넣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 P. 278

080709-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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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라 - 인문학과 영화, 그 어울림과 맞섬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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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창을 사랑한다는 말은 태양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눈부시지 않아서 좋다는 김현승의 말이 새삼스럽다. 우리는 때때로 새롭고 시선한 눈을 책에서 얻는다. 알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기도 하지만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도 새삼스럽게 정리하고 확인한다. 나는 그렇게 책을 통해 같은 사물을 보고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들을 타인의 눈을 통해 다시 확인한다. 물론 그러다 보면 100% 모두 동의할 수는 없고 공감하기도 하지만 이의를 제기하고 반론을 제기할 때도 있다. 어쨌든 이 모든 과정은 하나의 의사소통 과정이고 저자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고 말없이 정서를 공유하기도 한다.

  특히 나이, 지식, 학력, 세대, 지역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영화’라는 장르는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가장 적합한 예술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고전평론가’라는 특이한 직함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고미숙의 새 책 <이 영화를 보라>는 조금은 안타깝게 읽었다. 이 책에 소개된 여섯 편의 영화를 다 보았기 때문에 안타까웠고 같은 영화를 보고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부분에 대한 시선이 안타까웠다.

  괴물, 황산벌, 음란서생, 서편제, 밀양, 라디오스타 - 이 여섯 편의 영화를 분석한 책으로 고미숙은 머리말에서 ‘나는 영화를 즐겨 보지 않는다.’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인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의 영화를 보는 독법은 예사롭지 않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지만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에 기초한 영화 뜯어보기는 구석구석 영화 전체를 조망하는 미시적이지만 거시적 관점을 하나도 놓치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괴물’을 보면 ‘위생권력과 스펙터클의 정치’라는 부제에서 보여주듯이 교육은 학교에 건강은 병원에 저당 잡힌 채 위생과 청결이 근대화의 첩경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들의 무의식을 파헤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읽어내야만 영화를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왜 재밌게 보았는지, 무엇이 재밌었는지 왜 무서웠으며 괴물보다 더 끔찍한 현실의 모습을 우리는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고미숙은 표상을 전복하는 ‘황산벌’을 이야기하면서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을 풀어내고 있으며 사투리로 범벅이 되어버린 전쟁의 비장미를 가볍고 코믹하게 그려버린 감독을 이해한다. 말하자면 전쟁은 미칫 짓이다! ‘거시기’를 통해 말의 무의식적 속성을 간파하고 영화를 통해 감독의 의도보다 먼저 관객에게 전달되는 반체제적인 병사 ‘거시기’에게 전쟁과 민족의 의미를 묻는다.

  포르노그라피와 멜로가 범벅이 된 ‘음란서생’, 1916년 <조선의 미>를 통해 ‘한恨’의 정서를 심어준 야나기 무네요시가 새롭게 재조명되는 ‘서편제’, 가족․고향․신으로 대표되는 폐쇄회로 속에 갇힌 ‘밀양’, 이주민들의 접속과 변이를 그려낸 ‘라디오스타’도 어느 것 하나 대충 보아 넘긴 영화가 없다. 하긴 자주 보지 않는 영화 중에 기억할 만한 혹은 인상 깊은 영화에 대해 근대를 이해하고 우리의 삶에 내재된 특징들을 그려 낸 영화들에 대해 어찌 대충 보아 넘길 수 있었겠는가. 고미숙의 영화 이야기는 그녀의 관심사인 고전과 근대, 탈근대를 통한 탈주와 유목의 세계를 누비고 있다.

  에필로그 형식으로 붙어 있는 글들 또한 영화를 이해하고 현실과의 접점을 찾는 데 유효하게 읽힌다. 앞서 소개한 여섯 편의 영화를 하나의 주제나 범주로 묶을 수는 없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코 환상과 모험을 미끼로 던진 영화 산업의 소비재로 볼 수만은 없는 영화들이다. 흥행과 작품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하는 감독들의 고민들을 동정하거나 읽어 낼 필요도 없다. 그걸 걱정하는 감독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극히 일부분인 것 같지만 무수한 코드와 다중분할 접속 장치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던 벤야민의 고민이 어떠했는지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영화는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안 본다고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꿈을 꾸고 생각하고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예견하고 현실을 성찰한다.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로 항상 우리 곁에서 가깝게 기능하는 가장 친근한 매체인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또 하나의 가상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인가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우리가 열망하는 세상과 그것의 꿈을 실현시켜주는 공간으로서 기능하는 영화만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외면하고 싶은, 알지 못했던 현실에 대한 공포와 경고, 때로는 해학과 신명으로 풀어낼 수 있는 우리 영화를 관객들은 항상 기다리고 있다. 수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만족하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킬 영화를 욕망하는 영화가 없다는 아이러니!

  고미숙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제나 영화에서 ‘재미’를 기대하는 관객들의 봉상스(상식)를 충족시킬 영화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보여지는 혹은 만들어지는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드는 현실의 패러독스(역설)를 읽어낼 수 있는 영화를 우리는 기다린다. 만국의 관객들이여 단결하라, 그리고 영화여 영원하라!


080707-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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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 철학.정치 편 - 인간이 남긴 모든 생각
박민영 지음 / 청년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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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네 정체가 뭐냐?”라고 물어볼 때조차 우리는 무의식에 내재된 플라톤의 현상과 본질의 문제를 끄집어 내는 것이다. 이원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세상을 해석하고자 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의 고민은 여전히 유효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상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금까지 전개된 모든 서양 철학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를 차지하더라도 우리에게 직면한 삶의 문제는 시대의 변화 속도와 눈부신 발전에 발맞춰 해결됐다고 보기 어렵다.

  지금까지 인간이 해왔던 모든 생각의 흔적을 우리는 이즘ism이라 부른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은 앞선 시대를 정리하고 그 시대정신zeitgeist을 한마디로 명명하고 싶어하는 범주와 구별의 본능을 발휘한다. 우리는 그것을 이즘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인간의 체계적 사유의 산물이 바로 우리가 사용하는 이즘이다.

  박민영의 <이즘>은 곁에 두고 오래 참고할 만한 책이다. ‘인간이 남긴 모든 생각’이라는 부제에 어울리는 책이다. 철학과 정치편으로 나온 이 책의 다음도 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면 이 책은 성공적이다. 저자는 저술가로서 갖추어야할 꼼꼼함과 부지런함 그리고 자기 판단과 신념까지 갖추고 있다고 감히 평가할 수 있겠다. 세상에 객관적인 생각이 불가능하다는 전제하에 나는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해 자신의 방식으로 정리해할 필요성을 느낀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성격을 반영하고 사회적 성격은 사회경제적 조건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에리히 프롬의 말은 이즘의 사회적 역할을 잘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이 말은 역도 성립한다. 사회경제적 조건은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즘은 하나의 문화현상이나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조건을 규정하는 말이고 이 말에 따라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이 달라지며 사회가 변화 발전하기도 한다.

  그것을 알지 못한 몽매한 현실 정치인들, 관료들, 언론들의 작태는 2008년 ‘촛불집회’를 바라보는 다양한 계층의 견해차에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이렇게 쏟아지는 장대비가 대한민국의 이즘을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현실에 복무하지 못하는 모든 이즘은 가라. 저자의 말대로 이즘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세계를 보는 나를 보는 일’이기도 하다.

  경제학자 하이예크는 이런 말을 했다. “이론화되지 않은 사실은 침묵한다.” 이 말을 이즘과 연관시켜 이해하면, 어떤 사물이나 사건은 ‘이즘’이라는 ‘체계화된 이론’ 속에서만 그 존재와 존재의 의미를 드러낸다는 말이 된다. 이즘은 그 자체로 체계를 갖춘 하나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창이다.

  머리말에서 인용한 하이예크의 말이 이 책의 의미를 함축한다. 또한 저자는 이즘을 ‘관계의 산물’이라고 표현했다. 당대 사회적 조건과의 관계, 이전 역사와의 관계, 다른 이즘과의 관계 속에서 탄생한 이즘을 이해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조건과 인류의 역사, 사회, 문화, 경제적 조건을 이해하는 고도의 정신 작용이다. 단순하지 않은 작업을 시도한 박민영의 노고에 감사할 뿐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남는 의문과 미진함은 무궁무진하다. 부록에 정리되어 있는 이즘 일람과 이즘 연표, 그리고 참고문헌을 뒤적이며 평생을 보내고 싶은 욕망! 한 개인의 생각이 반영된 이즘은 정당한 평가를 받았다고 할 수 없지만 인류의 사상사를 일괄할 수 있다는 무임승차의 특권이 주어진다. 많이 팔릴 수 없는 책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책은 이런 책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철학편에서 경험론을 시작으로 계몽주의, 공리주의, 구조주의, 니힐리즘, 데카르트주의, 마르크스주의를 거쳐 칸트주의, 플라톤주의, 합리론, 해체주의, 헤겔주의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정치편에서는 공동체주의와 공화주의를 시작으로 관료주의 군국주의, 나치즘, 마오주의, 마키아벨리즘, 매카시즘을 거쳐 아나키즘, 유토피아주의, 자유주의, 파시즘, 페이비어니즘에 이르는 이즘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말하고 생각하고 표현하고 지향하는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전망은 늘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 개인과 사회가 조화와 갈등을 겪는 과정에서 한 걸음씩 내딛는 것이다. 역사는 발전한다는 진화론적 관점은 아니어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보다 다른 형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기준점을 설정하기 위해서도 우리에게 이즘에 대한 성찰은 필요하다. 관계의 산물이라고 하는 것도 사회와 사회와의 관계라기보다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떠오르게 한다. 새로운 사상과 가치를 내세우고 있지 않고 과거의 이즘에 대해 정리하는 데 충실하지만 그 자체로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정리된 생각들은 현재를 돌아보고 과거를 성찰하며 미래를 지향할 수 있는 이즘의 새로운 발견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우리 눈앞에 펼쳐진, 전개되고 있는 이즘에 대해 다시 고민해 볼 시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어떤 이즘으로 평가 받을 수 있을까, 먼 미래에.


080705-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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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착해질 때
서정홍 지음 / 나라말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머리로 쓰는 글이 있고 가슴으로 쓰는 글이 있다. 차가운 이성과 냉철한 판단력, 비판적 관찰력은 나를 깨어나게 하고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한다. 반면에 뜨거운 가슴과 열정으로 생에 대한 감각을 보여주는 글은 부드럽고 진한 감동을 준다. 영혼의 깊은 울림을 주는 글과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는 글 중 어느 것을 우위에 둘 수는 없다. 검의 양날처럼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서정홍의 새 시집 <내가 가장 착해질 때>는 지금 창 밖에 후드득거리는 빗소리처럼 조용하고 차분하게 가슴을 적신다. 끝없는 관심과 애정어린 관찰을 통해 대상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생활’이 곧 시가 되는 감동을 경험한다. 농촌에서 몸소 겪은 일들을 들려주는 솜씨가 탁월하다. 농부가 되어 살아가는 시인의 모습은 피상적으로 낭만과 연결시킬 수 있겠지만 그에게는 생활이며 힘겨운 삶의 현장이다. 하지만 넉넉한 마음으로 이웃을 보듬고 자연을 대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우리의 걱정은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수많은 시집을 읽어왔지만 정말 오랜만에 눈물이 날 뻔한 시들을 여럿 만난 시집이다. 먼 데 하늘을 바라보며 산다는 게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면 내겐 이미 아주 소중한 시집이 되어 버렸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진솔한 몸짓과 꾸밈없는 목소리에서 출발한다. 보태지도 덜어내지도 않고 인상적인 순간이나 찰나를 잡아내고 혹은 긴 호흡으로 타인의 생을 숙연하게 보여준다. 시는 그렇게 우리를 조금씩 젖게 만든다. 깊은 밤 어둠을 적시는 장마처럼.

기다리는 임은 오지 않고

봄비가 내리는데
외송 할머니가 비를 맞으며
정자나무 아래 혼자 서 있다.

“할머니, 누굴 기다리세요?”
“읍에 일 보러 나간 영감
하매나 올랑가* 하매나 올랑가
기다렸는데 아직도 안 오네.”
“할머니, 옷이 다 젖었어요.
감기 들면 어쩌시려고.”

눈치도 없이 비는 자꾸 내려
야윈 할머니 어깨 위에 뚝뚝 떨어지고
멀리 개 짖는 소리만 아득한데
하매나 올랑가 하매나 올랑가
기다리는 임은 오지 않고…….

* 하매나 올랑가 : 이제나저제나 오려나.

  그리움엔 나이가 없다. 읍내 나간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마음은 청춘의 그것과 다름없다. 생의 기억과 행복의 순간들은 늘 반복되고 온몸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삶에 충실한 사람들은 순수하며 거짓이 없다. 그래서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고개 숙이게 한다. 아무것도 아닌 순간들이, 장면들이 마치 거울처럼 우리를 되비친다.

사람이 그리운 날

여럿이 어울려
산밭에서 고구마 싹을 심다가도
여럿이 어울려
저녁밥 먹다가도
사람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그리워 미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혹은 익숙한 곳에서 우리는 사람을 그리워한다. 어깨를 부대끼며 혼잡한 거리를 걷다가 느끼는 군중속의 고독이 차라리 행복할 지도 모르겠다. 산밭에서, 어울려 먹는 밥상에서 갑자기 사람이 그립다는 말은 무엇인가. 감당해 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겠다. 미치도록 누군가를 그리워해 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겠다.

아름다운 시절 3
- 외식하던날

  한 달에 한 번 우리 식구들 외식하는 날이었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미리 저녁밥을 먹이고 통닭집으로 데려갔다. 한 달에 한 번 닭고기 맛을 볼 수 있는 날, 한창 자랄 나이에 닭 한 마리씩 거뜬하게 먹어 치우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흐뭇할 텐데 왜 저녁밥을 먹이고 데려갔을까?

  아이들이 다 자란 이제야 알았다. 닭 한 마리 값이라도 아껴서, 가난한 셋방살이 퍼뜩 벗어나려고 저녁밥을 먹이고 외식했다는 것을. 그런데 스무 살이 지난 우리 아이들은, 지금도 빈속에 고기를 먹지 못한다. 어릴 적부터 밥을 먹고 나서 고기를 먹는 버릇이 들었기 때문이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세상인데, 왜 문득문득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일까.


  거시적인 안목으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하고 자본주의의 갈등을 분석하고 이데올로기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다가 이런 시를 만나면 맥이 탁 풀린다. 추상적 이론보다 삶이 구체성이 주는 감동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 법이다. 밥을 먹이고 닭고기를 먹으러 가는 가족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이와 유사한 우리의 이웃들은 점점 늘어만 간다. 그들만의 리그는 더더욱 치열해지고 가슴만 따뜻한 이웃들은 그 이유도 모른 채 어떻게 이 현실을 바라보고 실천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조차 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래서 김수영의 말대로 우리는 왜 작은 것에만 분노하는지 스스로에게 반문하기도 한다.

이른 아침에

감자밭 일구느라
괭이질을 하는데
땅속에서 개구리 한 마리
툭 튀어나왔습니다.

날카로운 괭이 날에
한쪽 다리가 끊어진 채
나를 쳐다봅니다.

하던 일 멈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루 내내
밥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물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잠시 가슴이 뻐근했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사람이 있다는 말인지. 착한 사람을 보면 화가 난다. 그 마음의 언저리가 헤아려지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감을 가진 착한 인간은 결국 자연에서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아는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가장 착해질 때’를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가장 착해질 때

이랑을 만들고

흙을 만지며

씨를 뿌릴 때

나는 저절로 착해진다.


  이랑을 만들고 흙을 만지고 씨를 뿌려 착해질 수 있다면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명령하고 싶다. 모두 나가 이 땅의 흙을 만져보고 씨를 뿌려 보라고. 타인의 배려와 나눔을 교실에서 배울 수 있을까? 온몸으로 감당해야 할 순간들을 책 속에서 만날 수 있을까? 우리가 안다고 하는, 배웠다고 하는 것은 결국 몸의 기억이며 습관이다. 그렇게 배워야 이런 시를 쓸 수 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내가 이른 새벽부터 일하면
누군가 아무 걱정없이
편안하게 쉴 수 있기를.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내가 사나흘 굶으면
누군가 아무 걱정 없이
배불리 먹을 수 있기를.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내가 세상 걱정 때문에 잠 못 들면
누군가 아무 걱정 없이
깊은 사랑 나눌 수 있기를.


  자기 희생을 통해 타인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는 지극히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생각은 배울 수 없다. 스스로 깨닫거나 체험을 통해 알아가는 것이다. 나를 통해 너를 배우고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눈물처럼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을 시인이라고 불러야 한다. 머리고 쓰고 정제된 언어로 매끄럽게 표현된 시가 울림과 감동이 없는 이유는 바로 서정홍과 같이 온몸으로 쓰는 방법을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시인은 다섯줄 짜리 시작법을 시로 썼다.

  이렇게 명쾌하고 단순한 진리를 여러 권의 책으로 묶어낸 수많은 평론가와 시인들을 부끄럽게 한다. 재밌는 말장난이 아니라 시란 무엇인지 극명하게 드러낸 기막힌 구절이다. 서정홍은 이 시를 통해 그리고 앞서 인용한 시들을 통해 시의 본질을 말하고 있으며 그 진경이 무엇인지 소박하고 깨끗하게 펼쳐 보여준다.

  편안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읽기만 하면 되는 이 책을 통해 나는 또 다른 세상을 배웠다.

시인이란

시인이란
쉬운 걸
어렵게 쓰는 사람이 아니라
어려운 걸
쉽게 쓰는 사람이다.                                                   


080702-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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