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진중권 미학 에세이 2
진중권 지음 / 아트북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미학이라는 학문이 있는 줄도 모르고 20년 쯤 살았고, 알게 된 후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 채 지금도 살고 있다. 미학은 그렇게 우리들 삶과는 무관한 것일지도 모른다. 생존과 직접 관련된 학문과 지식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대중들에게 친숙하고 즐겁게 다가설 수 있는 예술은 항상 친구처럼 곁에 머물러야 한다. 전문가 집단만을 위한 고급 예술이나 이론을 향유할 수 있는 계층과 문화는 쉽게 내면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르디외는 ‘아비투스’의 개념을 통해 문화적 상징 자본의 중요성을 주장했겠지만 도대체 미학이라는 것의 실체는 아직도 내게 모호하기만 하다.

  고전에 해당하는 책들을 탐독하고 그것을 해설했거나 실제 적용 사례들을 살펴보아도 내가 ‘이것이다’라고 설명할 수 있을 만큼은 되지 않는다. 독학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공부하거나 이론적 토대를 체계적으로 쌓아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고단하지만 즐길만하고 모호하지만 흥미로운 예술의 세계를 떠날 마음은 없다. 다만 명확한 실체가 포착되는 다른 분야의 무엇과는 구별되는 애매함이 늘 미진함으로 남는다는 말이다. 철학의 한 분파로 볼 수밖에 없는 미학의 특징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자위해 보기도 한다.

  <미학오딧세이 1~3>는 내게 진지한 마음으로 그림을 통해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을 고민하게 했다. 비록 남의 눈을 빌려 살펴보았지만 마그리트와 에셔의 그림에 매혹되었고 진중권의 감칠맛 나는 문장에 중독되었다. 그의 정치적 논객으로서 진중권의 포지션이 어디에 위치해 있고 어떤 식으로 열광적 지지 혹은 폭력적 비난을 받든 그의 목소리는 분명하고 논리 정연하며 나름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다시 돌아와서 진중권의 책들은 정치와 미학으로 양분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어떤 것도 놓치고 싶지 않다. 두 분야 모두 탁월한 감각을 유지하고 있으며 날선 촉수가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책을 읽을 것이다. 오래전에 나온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는 그야말로 현대적 의미에서 미학을 풀어낼 수 있는 이론가들과 예술을 접목시키고 있다.

  벤야민의 ‘산만함’에서 출발해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에 이르기까지 ‘숭고’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예술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분석하고 있다. 현대인의 관점이 아니라 다분히 철학적 함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따분하고 지루하며 그 의미는 안개 속에 숨어버리기도 하지만 원전의 인용이나 개념에 대한 보다 분명한 설명을 시도하고 있어 그나마 읽을 만하다. 출판사에서 선전하고 있는 것처럼 진중권이 들려주면 미학도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조금 더 쉽고 간단하게 설명하거나 이론적 깊이를 포기해야 한다.

  발터 벤야민, 마르틴 하이데거, 테오도르 아도르노,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장 보드리야르 등 8명의 철학자는 이름만으로도 현기증이 난다. 그드르이 책 한 두권씩을 건드려 보았지만 내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기만 하다. 쉽게 하나의 축으로 꿰어지지도 않고 어설프게 그들의 이론이 적용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두둔함의 증거일 뿐이겠지만 속이 쓰린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저자는 핵심 개념들을 선택해서 집중수렴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각 장마다 조금씩 연결되고 전체가 또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살아 숨쉬기를 바라는 저자의 노골적인 요구처럼 훌륭한 텍스트인지는 증거할 수 없으나 시간과 돈이 아깝지는 않았다. 긴 여정으로 생각한다면 또 다른 텍스트를 위한 징검다리 역할로는 충분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소회이다.

  한 권의 책을 읽어나가는데 저자의 머리말은 항구의 등대와 같다. 글을 쓴 목적이나 핵심 개념을 밝혀 놓고 있으니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주변 경치를 제대로 즐기지는 못해도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 지 정도는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여행이었으나 또 다시 떠날 채비는 갖추었나 보다. 희미한 풍경들 속에서 안개를 걷어내고 눈꺼풀의 이슬 방울을 털어내는 일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예술은 모든 현실에 대한 반영이며 결과이기도 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나 스스로에 대한 관심과 반성이라고 볼 수도 있다. 틈틈이 정리하고 확인하고 또 연결고리들을 찾아내는 연습은 계속되겠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속에서 그 의미를 확인하고 의도를 찾아내고 상징을 풀어내는 일은 하나의 놀이 일수도 있다. 즐거운 게임을 그만 둘 일은 없을 것 같다.

  사용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를 무한 증폭시켜 물신화하는 자본의 패턴은 이제 누구나 쉽게 적응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폭력과 그늘에 대한 시선을 거둘 수는 없다. 예술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눈과 그것에 대한 고민들이 어쩌면 현대미학의 역할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미학은 단순히 예술에 대한 숭고한 이데올로기가 아닐 것이므로.


080822-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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