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의 발달 문학과지성 시인선 35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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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시를 쓸 수 있는 시대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말한 아도르노의 말은 역사와 시대현실과 詩의 거리를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지금은 서정시를 쓸 수 있는 시대인가? 그 기준은 시인마다 다르겠지만 시대를 막론하고 서정시는 시의 본령으로 자리매김한 채 사람들에게 언어의 쾌감과 감정의 순수성에 기대왔다. 일제 식민지 지배가 극에 달한 시절에도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을 볼 수 있는 눈은 시인의 몫일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서정시를 무엇이라 명명할 수 있을지는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태준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나가면서 서정시의 본질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늘의 발달>은 <가재미>로 촉발된 문태준에 대한 관심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그의 시는 다른 시인이 접근하기 힘든, 아니 걷지 않는 길에 대한 ‘경외’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우리말의 의미망을 확장시키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나가는 힘은 누구에게나 생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 시의 특징은 말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기막힌 의성어와 의태어의 배열이나 느린 템포로 사물의 동작을 집어내고 마음의 흐름을 짚어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시를 쓰는 사람은 무릇 다른 세계를 바라볼 줄 아는 눈과 특별한 감각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부단한 노력이나 탁월한 감성이 어우러져야 하고 무엇보다도 대상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관심이 전제되어야 한다. 무엇이든 그렇게 사랑하면 잘 알게 된다. 문태준의 눈에 비친 사물들과 사람들, 혹은 그늘들이 맑고 투명하게 비친다.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오늘은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길을 가다 우연히 갈대숲 사이 개개비의 둥지를 보았네

그대여, 나의 못다 한 말은

이 외곽의 둥지처럼 천둥과 바람과 눈보라를 홀로 맞고 있으리

둥지에는 두어 개 부드럽고 말갛고 따뜻한 새알이 있으리

나의 가슴을 열어젖히면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나의 말은

막 껍질을 깨치고 나올 듯

작디작은 심장으로 뛰고 있으리

작디작은 심장이 두근거리며 막 껍질을 깨치고 나올 듯한 ‘나의 말’은 무엇일까? 시어의 다의성은 이렇게 읽는 사람마다 다른 해석이 가능하도록 의미가 풍부하다. 누구에게나 그럴듯하게 적용되지만 아무에게나 비유될 수 없는 말들의 잔치가 흥성스럽다.

그물

수풀을 지나간다

가을벌레들이 운다

몇 겹의 그물

완만하고 탄력이 있다

촘촘하다가 헐렁하다

발이 폭폭 빠지지는 않는다

내 심장보다는 크게 얽어놓아

멈추어 서게 한다

잠시 끌었다가 살짝 다시 놓아준다

당신과 내가

언제부터 이곳서 살았던가,

바람을 타고 날아 흩어지는

  가린 것도 보이는 것도 아닌, 막힌 듯 뚫려있는 그물에 대한 반응은 새롭다. 자연과 교감하거나 함께 호흡하는 사람의 모습만큼 평화로운 것은 없다. 당신과 내가 언제부터 이곳서 살았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모든 것은 무화無化된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모든 것은 그물 사이로 달아났다.

장님

찔레나무에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그 곁에
오금이 저리도록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의 의혹이 생겨났습니다
그대의 가슴은 어디에 있습니까
찔레 덤불 속 같은 곳
헝클어진 곳보다 보다 안쪽
막 눈물이 돌기 시작하는 곳
그곳으로
날아오는 새와 날아오는 구름
그곳으로부터
날아가는 새와 날아가는 구름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은 인간의 본능이다. 막 눈물이 돌기 시작하는 곳이 가슴일까? 세상의 모든 사랑은 가슴에서 시작하는 것일까? 그곳이 새와 구름의 둥지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그곳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영원회귀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리라. 하지만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깨달음?

흔들리다

나는 코스모스를 보고 있다
나는 중심
코스모스는 주변
바람이 오고 코스모스가
흔들린다, 나는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보고 있다
코스모스가 흔들린다고 생각할 때
중심이 흔들린다
욕조의 물이 빠지며 줄어들듯
중심은
나로부터 코스모스에게
서서히 넘어간다
나는 주변
코스모스는 중심
나는 코스모스를
코스모스는 나를
흔들리며 바라보고 있다


  기막히다. 나의 주변이 코스모스였다가 내가 코스모스의 주변이 된다. ‘흔들리며’ 바라보는 나와 너의 모습이 다를 리 없다. 하나가 되기 싶어도 중심조차 흔들린다. 가끔 바람이 불어오지만 그것은 핑계일 뿐이다.

  그러나, 결국 내가 코스모스가 되고 코스모스가 내가 되는 일은 없다.

살얼음 아래 같은 데 1

가는, 조촘조촘 가다 가만히 한자리서 멈추는 물고기처럼

가라앉은 물돌 곁에서, 썩은 나뭇잎 밑에서 조으는 물고기처럼

추운 저녁만 있으나 야위고 맑은 얼굴로

마음아, 너 갈 데라도 있니?

살얼음 아래 같은 데

흰 매화 핀 살얼음 아래 같은 데


  살얼음 아래 같은 데 조으는 물고기처럼 사는 게 마음이 아니라면 그렇게 시리고 맑고 투명하게 빛날 수 없다. 갈 데 없는 마음은 고여 있고, 고인 마음은 어디 흐를 데를 찾아 헤매게 마련이다. ‘조촘조촘’ 가다가 혹은 얼어버리기도 하지만 살얼음은 언젠가 녹아 흐른다.

이별이 오면

이별이 오면 누구든 나에게 바지락 씻는 소리를 후련하게 들려주었으면
바짓단을 걷어 올리고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면서
바지락과 바지락을 맞비벼 치대듯이 우악스럽게 바지락 씻는 소리를 들려주었으면
그러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틀어막고 구석구석 안 아픈 데가 없겠지
가장 아픈 데가 깔깔하고 깔깔한 그 바지락 씻는 소리를 마지막까지 듣겠지
오늘은 누가 나에게 이별이 되고 나는 또 개흙눈이 되어서


  그렇게 사람 사는 세상과 이별의 순간이 오겠지.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물들과 이별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시인은 구석구석 안 아픈 데가 없다고 말하지만 이별의 고통이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우악스럽게 바지락을 씻을 때처럼 온 힘을 다해도 그렇게 서로 부대끼며 생채기를 내도 결국은 제자리 걸음이다. 어디 떠나 본 적도 없고 한 걸음 다가서지도 못했을 뿐!

  <그늘의 발달>은 문태준의 지금과 우리시의 내일을 함께 보여주는 것같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신호탄을 쏘아올리지만 그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은 제각각이다. 문태준 시의 진경을 이제부터 가만 기다려 볼 참이다.

  엉뚱한 상상 하나. 동갑내기 동향출신인 김연수와 문태준은 친구일까?

080820-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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