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철학은 무엇인가 - 근대, 이성, 주체를 중심으로 살펴본 현대 한국 철학사
강영안 지음 / 궁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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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국적 철학의 풍토는 척박하기만 하다. 얇고 빈약한 사상의 토대를 둘러보면 관객의 입장에서 비판과 냉소를 보내는 것과는 다른 허전함이 느껴진다. 대부분 서양 사상의 번역 소개에 바빠 보인다. 지식인의 지도를 그려나가며 철학자들의 역할과 한계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지적 토양의 기저에는 항상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토대는 허약하기 이를 데 없다. 개인적인 소회이긴 하겠지만 풍부한 지적, 학문적 토양이 형성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철학에 문외한인 일반인의 관점에서 토로하는 불만일 수 있으나 철학의 대중화와 글쓰기에 힘쓰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의 문제는 단순하게 논의될 수 없다. 전공자와 비전공자의 문제도 있고 전공자라 할지라도 대중화와 일반화는 다른 문제일 수도 있다. 어쨌든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서양철학자들의 논의에 관한 일반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기도 쉽지 않고 철학자들의 주저를 번역서로 읽어나가는 데는 한계가 느껴진다.

  그래서 나의 경우 고등학교 시절 처음 접한 <철학의 기초이론>과 <철학에세이>로 철학에 입문했다. 지금도 입문 수준이지만 김용석, 강신주, 김용규, 남경태의 책들이 길잡이가 되었고 강유원, 이정우, 이기상, 김용환, 박홍규 등의 해설서를 통해 서양철학자들의 철학을 조금 맛보거나 번역서를 무턱대고 읽어보는 등의 노력으로 안개 속을 헤매기도 한다.

  이것은 다시 두 가지 문제에 부딪힌다. 첫째,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그에 대한 뚜렷한 목적과 방향이 없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체계적이고 계통적인 접근과 깊이있는 관심분야를 읽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겠지만 인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다양한 관점들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다. 게으르고 아둔한 탓도 있겠지만 정규교육과정에서 기계적으로 암기했다가 사라져버린 지식 이외에 생활 속에서 적용하거나 접근할 만한 ‘철학하기’를 배울 수 없다. 때때로 난감하기만 하다.

  강영안의 <우리에게 철학은 무엇인가>는 한국 철학사에 대한 개설서이다. 근대, 이성, 주체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는 이 책은 한국 철학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사적 전개 과정을 더듬고 있다. 저자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서양 철학이 도입된 후 이 땅에서 철학을 한 첫 세대들이 철학을 어떻게 하였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관심 그리고  현대와 탈현대 또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이성과 전통에 대한 한국 철학자들의 이해 정도를 다루고 있는 것이 이 책의 대강의 얼개이다.

  우리나라의 철학의 출발은 불행하게도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시작되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세계사의 전환점에서 우리나라에서도 민족적 자각이 이루어졌고 1920년대 후반, 1930년대 초에 해외 유학파와 경성제국대학 졸업생들의 배출과 함께 형성된다. 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근대교육을 받았고 철학의 기본적인 도구인 어휘와 개념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서양철학은 낯설지 않은 것이 되었다. 저자는 현실지향적 철학의 태도와 근대화, 이성적 경향과 감성적 경향을 띤 현실 파악 태도에 대해 실제 철학자들의 저서와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실증주의적 과학철학인 분석철학에 대한 관심과 반실증주의적 과학철학인 해석학과 현상학에 대한 논의를 집중적으로 설명한 2장, 전통, 근대, 탈근대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3장까지의 이 책의 주된 논의이다. 4장은 철학 용어에 대한 고찰로 서양철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이 어떻게 한국어로 변화되었는지를 살피고 있다.

  일본에서 번역 수용된 용어와 개념들이 한국어로 정착되는 과정을 상세히 살피고 있는 4장은 전공자가 아니라서 대강의 과정과 흐름만을 훑어보는 정도로 만족했다. 철학자든 일반인이든 한국철학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다. 몇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어렵지 않게 정리하고 있어 읽을 만 했다. 현대 철학이 어떻게 자리 잡고 있으며 변화 발전하고 있는지 논의의 중심과 핵심을 살펴볼 수는 없지만 지금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전반적인 흐름이 어떠했는지를 알아 볼 수 있는 책으로는 충분하다.

  그 다음은 또다시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철학은 실용적인 학문이 아니다.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다고 하지만 학문에 기본적인 토양을 제공하는 것이 1차적 기능이 아닌가 싶다. 분석틀을 제공하고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 나가는 일은 모은 학문 분야에서 요구되는 일이고 그것의 현실 적용문제는 2차적인 문제일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지적 호기심은 인간이 지닌 고유한 특성이다. 철학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영원히 무어라고 정의내리기 어려울 수도 있다. 다만 ‘앎과 삶’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깨달음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관심은 계속될 것이다. 세상에 대한 통찰력과 존재에 대한 이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표현하는 방법과 사용하는 용어가 다를 뿐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철학자이고 철학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실존적 고민과 철학적 사유를 통해 인생에 대해, 세상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면 욕을 먹을지도 모르겠다.


08120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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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의 제국 산책자 에쎄 시리즈 1
롤랑 바르트 지음, 김주환.한은경 옮김, 정화열 해설 / 산책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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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텍스트는 이미지를 ‘주해’하지 않으면, 이미지가 텍스트를 ‘설명’하지도 않는다. 나에게는 각각이 일종의 시각적 불확실성의 시초이며, 선에서 깨달음이라 일컫는 의미의 상실과도 비슷하다. 텍스트와 이미지는 서로 엇갈리면서 몸, 얼굴, 글쓰기라는 기표를 확실하게 순환시키고 교환하며 그 안에서 기호의 퇴각을 읽으려 한다.

  구조주의자가 쓴 일본 여행기. 롤랑 바르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다면 이 책은 지루하고 따분한 텍스트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롤랑 바르트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책을 읽을 필요도 없다. <기호의 제국>은 이미지와 텍스트의 간극을 보여주는 훌륭한 교과서로 보인다. 위에 인용한 글에서 보여주듯 텍스트는 이미지를 주해하지 않고 이미지가 텍스트를 설명하지도 않는다.

  1970년에 쓴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은 프랑스식 에쎄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 편 한 편의 글이 모여 전체를 구성하고 한 권의 책으로 일본에 대한 저자의 이미지를 완성한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교차되어 있어 이 책은 입체적인 감각으로 독자들에게 호소한다. 낯선 언어가 주는 기표와 기의는 우리에게 어떻게 전달되는가. 번역을 통해 전달된 그 의미는 왜곡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며 생성되기도 한다. 저자의 이야기가 얼마나 전달되었는지 나도 알 수가 없다. 내 안에서 생성된 의미와 전달된 이미지가 다를 수 있겠지만 소통의 문제가 아니므로 중요하지 않다.

  이 책은 여행에서 담아낸 생소함과 일본의 이미지들이 저자에 의해 다시 재구성된다. 일본이라는 낯선 공간의 문화를 읽어내는 여행자에게 모든 이미지는 텍스트가 되었다. 그것을 하나 하나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대상 자체를 선택하고 그 특징을 드러내는 체계 자체가 이 책을 구성하고 있다. 선별되는 것은 저자의 몫이다. 무엇을 볼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대상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의미를 지닌다.

  당연하게도 프랑스 사람에게 일본을 전달할 목적으로 쓰여졌겠지만 당시의 독자들은 좀 어리둥절 했을 법하다. 전혀 낯설고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소개서로는 너무 불친절하다. 일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며 번역된 글이지만 훨씬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만한 내용도 많이 있다.

  일본은 동양이다. 그 안에 서구지향이 있을지 몰라도 서양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특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이쿠를 인용하여 간결함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여주려는 이미지를 통해 긴 여운을 만든다. 그들의 음식, 언어, 얼굴, 파친코, 젓가락 등 눈에 보이는 대상에 대한 이미지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눈에 보이는 것 자체가 바로 글쓰기의 대상이 된다. 보는 것이 쓰는 것이다.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둘은 하나가 되어버린다.

  하나의 개념은 상대적인 구조 속에서만 그 의미를 드러내고 전제 구조의 틀에서 벗어나면 모든 언어와 표상들은 기호에 불과하다. 그것이 의미를 지니려면 전체적인 맥락안에서 대상의 위치와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것이 언어학적이든 철학적이든 문화인류학적이든 구조주의든 탈구조주의든 개념과 대상에 대한 인식 틀로서 완벽한 것은 없다. 롤랑 바르트가 일본을 어떤 방식으로 혹은 어떤 의미로 ‘기호의 제국’이라고 불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비교 문화적 관점에서 일본을 서구와 비교하지 못했고 타인의 시선으로 혹은 낯선 이방인의 관점으로 그것을 신비화, 기호화했을 뿐 그 심층적 의미를 읽어내지는 못한 듯하다. 대중적 관점에서 저자의 글쓰기와 일본에 대한 시선은 신선한 의미 이외에 다른 의미로 읽히지 않는다.

  텍스트는 풍부한 상상력과 환상의 세계로 독자들을 이끌어 낸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교차되면서 저자의 시선과 독자의 의미는 상충되고 저자의 말은 독자가 받아들인 이미지와 뒤섞인다. 그것을 하나의 기호로 해석하든 문화로 읽어내든 의미를 어떤 식으로 풀어내든 불확실성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니다.

  의미가 면제되고 개념이 모호해진다면 기호나 구조가 또 다시 무의미해진다. 일본을 텍스트로 표현하려던 저자의 시도는 독자에게 무의미해지고 하나로 규정하려는 구조와 틀은 이후에 또다시 탈구조주의를 배태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 혼란의 틈에서 어리둥절할 뿐이다.

  대상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놓여 있고 이미지는 다르게 인식되더라도 그것을 보는 눈은 달라진다.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될 것이다. 롤랑 바르트의 눈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아니 나의 눈으로 말이다.

  선명한 이미지와 명료한 의미는 여전히 메트릭스 세계 너머의 이야기라고 할 지도 모르는누군가에게 의미가 없어 보인다. 소통과 전달의 문제에서 벗어나 기호는 여전히 모호함과 신비함으로 가득한 인생과 유사하다. 그것이 거기에 놓여 있거나 그렇게 표현된 것은 어떤 의미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다른 해석과 의미부여가 왜곡된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는 비극적 인식만이 머리 속에 가득하다.


08113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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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일상 창비시선 294
백무산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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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봄날이었다. 점심 식사 후 나른한 5교시. 절인 배추처럼 늘어진 아이들에게 한문 선생님은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으라고 하셨다. 선생님께서 읽어주시는 시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흘러 친구들이 볼까봐 얼른 닦았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었다. 사회에 막 눈을 뜰 무렵 박노해와 백무산은 노동문학의 선두주자였고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은 시대를 반영하는 기념비였다. 80년대의 뜨거움이 사라졌지만 시간 속에 모든 것이 묻혀 버리는 것은 아니다.

  백무산의 시를 참 오랜만에 다시 읽는다. 프로필 사진 속 시인의 모습은 세월을 웅변한다. 세월은 흘렀지만 여전히 그는 시인이며 시를 통해 세상과 만나고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다양한 시의 색깔들만큼 시대가 변했고 세월이 흘렀나보다.

내게도 벌써 여러 봄과
여러 겨울이 지났네
지난 계절들 내 손으로 다 거두어온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 나의 낯선 생이 바람 속
빈 둥지처럼 나뒹굴고 있네
나는 지나온 나의 전부가 아니네

내 온몸이 통과해왔건만 낯선 생이
불쑥 낯익은 바람에 타인의 것인 양 흩어지고 있네

나는 그걸 하나의 생이라고 우겨왔네
저기 다른 생이 또 하나 밀려오네
- ‘생의 다른 생’ 중에서


  <거대한 일상>의 서시에 해당하는 시의 일부다. 또 하나의 생이 밀려오고 있다는 것은 한 사람의 후반생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 아니라 시대의 도도한 흐름 앞에서 선 개인의 슬픔을 드러내기도 하는 일이다. 낯선 생이 낯익은 바람에 흩어지는 모습은 처연하다. 누가 누구의 생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시간 앞에 모든 생은 겸허해 지고 한 시대의 끝자락에서 지난 시대를 바라보는 일은 허망할 뿐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꿈을 꾼다. 꿈꾸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그것은 시인이든 아니든 어느 시대를 살고 있든 마찬가지다. 하지만 시인은 꿈을 꾸지 않으면 절망도 없다고 냉정하게 말하는 듯하다.

꿈꾸지 않는 자의 절망은 절망이 아니다

마음에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비구니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순결한 것은 스스로 기댈 곳이 없다
- ‘기대와 기댈 곳’ 중에서


  삶의 일상성은 불온한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이 시대를 무어라 정의할 수 없지만 시인에게는 여전히 세계는 불안한 곳이고 부조리한 상태다. 그러한 인식은 부정적 세계관이 아니라 비판적이고 깨어있는 의식을 대변한다. 폭압적 정치 현실에서 벗어나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전쟁과 기아에 허덕인다. 그 침략 전쟁에 군대를 파병하고 이웃들의 굶주림과 가난을 외면한다. 생존 경쟁을 넘어 개인주의적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쓸쓸하기만 하다.

  누군가를 쏘아야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는 총은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 총을 뺐기지 않으려면 쏘아야 한다. 그것이 정의다. 정의의 이름으로 쏘는 것은 불가능하다. ‘쏘다’가 정의라는 역설적 인식은 현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며 우리들의 아픈 자화상이다.

전쟁 때문에 군대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군대가 있으므로 전쟁을 생각하는 것이다
총을 든 자에게는
‘쏘다’와 ‘정의’는 언제나 같은 말이다

세상의 어떤 침략전쟁도
정의의 전쟁이 아닌 것이 없고
성전(聖戰)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정의의 ‘쏘다’는 없다
‘쏘다’가 정의인 것이다
- ‘‘쏘다’가 정의다’ 중에서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왔노라고 노래하지만
그러나 아직도 그가 승리하고 있다
- ‘위인전’ 중에서

  시대가 변했다. 시간이 흐른 것이다. 세월은 흐르고 아이들은 자라며 노인은 죽는다. 그러나 아직도 그가 승리하는 시대는 계속된다. 역사는 순환하는 수레바퀴와 같은 것일까? 오욕의 세월을 견뎌낸 사람들에게 또 다른 형태의, 혹은 절망적이고 처절한 시대의 노래가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래도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이 시대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다. 그가 사라지는 순간 희망이 시작되는 것인지 눈에 보이지 않는 환상과 장밋빛 미래에 대한 그들만의 축제를 구경하는 방관자가 되어야 하는지.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는 온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이든. 다만 우리는 그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를 생각해야 한다. 아니 그 시대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래야 최소한 ‘순결한 분노’를 느끼지 않겠는가. 분노가 없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냉정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다. 좋은 게 좋은 거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사람에게 분노는 필요 없다.

  시인이 말하는 분노는 사회적 명상을 말한다. 기사(騎士)는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로 내가 아니 당신이 기사일 지도 모른다. 기다림에 앞서 순결한 분노조차 느끼지 못한다면 거울을 보고 바로 우리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의 얼굴 표정을 먼저 살펴야 한다. 그리고 눈을 감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떤 일을 통해 그 분노를 드러내고 있는지 말이다.


순결한 분노

꿈을 꾸는 일은 분노하는 일이다
책을 읽는 일은 분노하는 일이다
고요에 드는 일은 분노하는 일이다
노동을 하는 일은 분노하는 일이다
글을 쓰는 일은 분노하는 일이다

소유 욕망의 성냄이 아니다
탐욕에 치미는 화가 아니다

순결한 분노는 사회적 명상이다

이제,
그들이 온다

기사(騎士)들이 온다



081128-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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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 내 몸을 바꾸는 에로스혁명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6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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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잠시 움찔하게 된다. 대상과 범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막연한 질문은 근본적인 고민에 빠지게 한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사랑은 그만큼 절대적이고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우리가 그 사랑에 대해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이 있을까? 누구에게 배워 본 적도 없고 그 실체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적은 많지 않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아는 것은 보잘것 없다.

  인간을 규정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놀이하는 인간, 정치적 인간, 언어적 인간 등등. 그 많은 특징 중에 고미숙은 ‘사랑’을 집어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고미숙의 사랑 타령은 깊이 새겨 들을 만하다. <호모 에로스>는 그렇게 탄생한 책이다. 인간에게 사랑이 무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그 사랑의 비법과 관점들을 쏟아내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속된 사랑의 노래를 제창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사랑이 무엇이 문제인지 살펴보고 그 대안을 찾아보자는 이야기다. 사랑도 철학이 필요하고 구체적인 방법도 필요하며 방향과 목적도 필요하다.

  공부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도 아니라는 말을 깊이 새겨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성 사랑, 쇼핑에 중독된 사랑법에 대한 일침은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똑같은 패턴과 방식으로 사랑을 하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말한다. 그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아니 영원한 사랑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그나마 자신을 찾지 못하고 타인에게 기대고 의존하는 것은 감정의 소모일 뿐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사랑의 슬픔은 이별에서 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아의 존재감을 잃어버린 듯 한 상실감은 지나치게 타인에게 의존하는 데서 그 비극이 시작된다.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문제라는 사실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랑은 누가 하는가? 사랑의 주체는 누구인가?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어 나에게서 끝이 난다.

사람들은 사랑을 언제나 대상의 문제로 환원한다. 한 마디로 대상만 잘 고르면 만사형통이라 여기는 것이다. 사랑에 실패한 건 대상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고, 아직까지 사랑을 못해 본 건 ‘이상형’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참으로 신기한 인과론이다.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 판에 나는 몸만 쏙! 들어가면 되는가? 실패한 다음엔 다시 몸만 쏙! 빠져나와 복수극을 펼치면 되고? 이렇게 지독한 이기주의가 또 있을까? 상대를 잘못 만나 인생을 망쳤다면, 그런 상대를 선택한 ‘나’라는 존재는 대체 뭔가? - P. 15

  사랑을 하려거든 한 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하여 보아라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던 대학 신입생 시절이 떠오른다. 목숨은 사랑하는 대상에게 거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을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하지 못했다.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깨닫지도 못했다. 불멸의 사랑은 망상 중의 망상이라는 생각이 체계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참 많은 경험과 상처가 필요했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단 한 번뿐인 인생에서 사랑만큼 중요한 것을 왜 공부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누구보다도 잘 안다는 자만심 때문일까? 아니면 공부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일까? 알아도 몰라도 일단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되면 똑같은 증상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알수 없는 노릇이다.

‘불멸의 사랑’은 망상 중의 망상이다. 그건 마치 어린 아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어른이 된 다음에도 계속 끼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다. - P. 16

  저자는 이러한 사랑의 출발점을 ‘나’로부터 시작한다. 실연은 행운이며 에로스는 쿵푸라는 선언은 가벼운 장난처럼 들리지만 실전에서 어떤 준비를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사랑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슴이 아닌 머리로 하는 사랑을 경계하는 선언들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이러한 사랑의 의미를 근본부터 파헤치고 있다.

  그러기위해서 우리가 우선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오만과 편견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에 대해 조목조목 비틀고 딴지걸면서 현실에서의 사랑법들을 비판한다.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진단해야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이영애를 붙잡고 내뱉은 대사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오랬동안 회자되었으며 기억에 남는 대사다. 많은 사람이 할 말이 많은 대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불멸의 판타지를 꿈꾸는 모든 연인들의 환상에서 비롯된 마약같은 주문일 뿐이다. 사랑은 변한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집착이고 증오이며 상처이고 슬픔이다.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사랑을 가로막는 대상들이 무엇인가? 국가, 가족, 학교 그리고 쇼핑몰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욕망의 배치에 따라 연인들은 흘러가고 쇼핑 공간이 없는 곳에서는 사랑도 불가능하며 자동차가 곁들여지지 않은 사랑은 사랑도 아니라는 비참한 현실. 그래서 청년 문화는 사라지고 대학은 황폐화되고 있으며 모든 가치는 화폐로 환산되는 사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1세기의 자화상이다. 이런 현실에서 사랑이라니? 김연수의 <사랑이라니, 선영아>가 떠오른다.

  그렇다면 과연 진정한 사랑법은 무엇인가? 몸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화폐권력에 저항하고 사랑하는 순간부터 책을 읽으라는 저자의 충고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다. 사랑의 주체가 되어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대상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문제 나의 감정 타인과 나의 교류와 소통으로 보는 관점이 바로 저자의 사랑법이다. 그래서 감히 힘차게 외친다. 청춘이여, 욕망하라!고.

  사랑은 아무나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랑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류의 절반만큼 많은 수의 사랑법이 있겠으나 인문학적 관점에서 현재의 사랑을 통찰하는 방법 또한 신선하다. 사랑은 오늘도 계속되겠지만 사랑을 공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모른다면 아는 척하지 말고 사랑 공부를 시작해 보자. 즐겁고 신나게. <호모 에로스>와 함께!

081125-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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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모 쿵푸스 실사판] 공부는 셀프!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3-30 16:54 
    ─ 공부의 달인 고미숙에게 다른 십대 김해완이 배운 것 공부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 몸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계기(혹은 압력?)를 주시곤 한다.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이고(말이 되나 싶죠잉?), ‘달인’을 호로 쓰시는(공부의 달인, 사랑과 연애의 달인♡, 돈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으로써 가장 ...
  2. 고미숙, 몸과 우주의 유쾌한 시공간 '동의보감'을 만나다
    from 그린비출판사 2011-10-21 12:02 
    리라이팅 클래식 15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출간!!! 병처럼 낯설고 병처럼 친숙한 존재가 있을까. 병이 없는 일상은 생각하기 어렵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 역시 살아오면서 수많은 병들을 앓았다. 봄가을로 찾아오는 심한 몸살, 알레르기 비염, 복숭아 알러지로 인한 토사곽란, 임파선 결핵 등등. 하지만 한번도 병에 대해 궁금한 적이 없었다. 다만 얼른 떠나보내기에만 급급해했을 뿐. 마치 어느 먼 곳에서 실수로 들이닥친 불...
 
 
 

사람들은 사랑을 언제나 대상의 문제로 환원한다. 한 마디로 대상만 잘 고르면 만사형통이라 여기는 것이다. 사랑에 실패한 건 대상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고, 아직까지 사랑을 못해 본 건 ‘이상형’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참으로 신기한 인과론이다.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 판에 나는 몸만 쏙! 들어가면 되는가? 실패한 다음엔 다시 몸만 쏙! 빠져나와 복수극을 펼치면 되고? 이렇게 지독한 이기주의가 또 있을까? 상대를 잘못 만나 인생을 망쳤다면, 그런 상대를 선택한 ‘나’라는 존재는 대체 뭔가? - P. 15

‘불멸의 사랑’은 망상 중의 망상이다. 그건 마치 어린 아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어른이 된 다음에도 계속 끼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다. - P. 16

사랑이 둘만의 역학적 배치를 만들어 내는 건 맞다. 또 열정의 차이에 따라 권력관계가 형성되는 것도 맞다. 헌데, 가장 중요한 건 시절인연이다. 말하자면, 대상이 누구냐보다 언제 어디서 만났느냐가 더 결정적이다. 즉, 어떤 특별한 ‘시공간적 배치’ 속에서 사랑이라는 특별한 감정이 생기고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그 관계에 균열이 일어났다면, 즉 누군가 먼저 결별을 선언하게 생겼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그 점에선 가해자, 피해자가 있을 수 없다. 둘 다 그 간극만큼의 번뇌를 감당해야 하는 까닭이다. - P. 52

에로스란 원초적 본능이자 욕망의 흐름 자체이다. 어떻게 절단되느냐에 따라 수많은 변이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절대 남녀 사이의 연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관계든, 어떤 활동영역이든 존재의 자유와 충만감이 분출될 수 있다면, 그것은 모두 에로스다. - P. 142

사랑이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다, 즉, 내가 어떻게 관계를 구성하느냐가 사랑의 내용과 형식 모두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 존재의 궤적을 만든다. 존재의 흐름과 궤적, 그것을 일러 운명이라고 말한다. 내 운명의 주인은? 바로 ‘나’다. 그러므로 시작에서 종결까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 P. 145

오스카 와일드의 한 말씀.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그 자신을 속이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남들을 속임으로써 그것의 종말을 고한다. 이게 바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로맨스의 본질이다.” - P. 154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영원히 너만을 사랑할게.” “이 순간을 영원히!” 우리는 을 이런 식의 구호에 포위되어 있다. 물론 말짱 거짓말이다. 사랑은 당연히 변한다. 사랑을 하는 마음과 몸이 변하기 때문이다. 모든 태어난 것은 자라고 병들고 늙고 죽는다. 마찬가지로 사랑 또한 나고 자라고 쇠하고 소멸한다. - P. 246

이탁오의 말 가운데 이런 게 있다. “스승이면서 친구가 아니면 스승이라고 할 수 없다. 친구이면서 스승처럼 배울 게 없다면 역시 친구라 할 수 없다.” - P.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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