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 살림지식총서 324
이유선 지음 / 살림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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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 속에서 대하는 용어의 개념을 명확하게 정리하는 것은 어렵다. 상황과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잦기 때문에 컨텍스트는 텍스트의 의미를 규정한다. 하지만 문제는 컨텍스트가 본래 의미를 훼손하는 경우에 있다. 빈번하게 사용하다 보면 본래 의미를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사람들에게도 인식되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는 언론이 한 몫을 제대로 한다. 지역 방언이 아니라 계층 방언처럼 비슷한 부류의 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나 특정 직업군의 사람들이 새로운 은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와 조금 다르다. 이미 존재하는 학술적인 용어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긍정적인 의미의 용어를 아전인수 식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곡학아세의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겠다.

  실용주의는 철학 용어다. 퍼스가 처음 사용했고 듀이가 미국의 교육과 민주주의 문제를 다루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후 언어분석철학의 물결로 쇠퇴했다가 로티에 의해 다시 주목 받는다. 실천적 유용성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우리가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의미와 유사하다. 하지만 ‘프래그머티즘’이 나름의 원칙과 세계관을 가진 철학적 입장인데 비해 우리가 사용하는 실용주의는 특정한 태도를 말한다. 어떤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것을 최우선적인 가치로 삼으면서 이념이나 원칙 같은 것은 부수적인 것으로 본다.

  이쯤 되면 어디서 많이 듣던 흘러간 옛 노래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언론에서 혹은 특정 정치인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실용주의가 사실은 철학적 개념인 ‘프래그머티즘’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진짜 실용주의가 무엇이고 그것을 주장했던 철학자들이 대한민국에서 주창되고 있는 실용주의를 듣는다면 까무라 칠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실용주의적 태도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실천적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 공통분모도 있고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다소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 적용대상과 범위에 대해서도 우리가 동의할 수 있을까? 이유선의 <실용주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실용주의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는 책이다. 표면적으로 실용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책이지만 현실을 돌아보면 시의적절한 신문 시평(時評)처럼 읽힌다. 이념과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통탄할 일들이 벌어지는 현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혹은 직설적인 화법으로 점잖게 타이르는 듯하다. 때로는 날선 비판의 목소리로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학문적 입장에서 철학사상을 오도하는 현실에 분노했을 것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실용주의의 참모습을 알리고 싶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각자가 처한 현실에서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현실은 달라진다고 믿는다. 그것을 아는 것이 먼저라면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추천할 만하다.

  살림지식총서의 한계라면 제한된 분량과 피상적인 논의의 수준일 텐데 오히려 머리 아프고 복잡하지 않다는 장점을 지닌다. 말하자면 실용적인 ‘실용주의’ 책이다. 핵심을 짚고 흐름을 파악하는데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개괄적인 수준에서 혹은 교양 수준에서 얄팍하다 싶겠지만 일반인들에게,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접근성이나 실용성 측면에서 뛰어나다.

  실용주의란 무엇인가를 말하고 태동과 전개 과정을 살펴 본 다음 실용주의적 관점들을 소개하나. 마지막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실용주의가 갖는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당연하지만 마지막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 뼈에 사무친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의 제도와 규범을 넘어서서 새로운 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실용주의자가 꿈꾸는 다원주의 사회는 이런 상상력이 억압되지 않고 마음껏 나래를 펼 수 있는 사회이다. - P. 19

인간의 삶을 끊임없이 개선시키는 것을 지식의 목표로 간주하는 실용주의자들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태생적으로 진보주의자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에게 진보는 인간의 보편적 본성을 구현하는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는 요소들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극복해 나가는 실천의 문제이다. - P. 49 

  좌와 우, 보수와 진보의 이데올로기를 집어치우자. 모순된 말이지만 그리고 ‘실용주의’를 받아들이자. 위에서 언급한대로 제대로 된 실용주의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 나간다. 인간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 실용주의를 실천하자. 인간의 자유를 옹호하고 단순한 돈벌이를 위한 실용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실용주의를 실천하자.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꿈과 이상만을 강조할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구나 현실 사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안에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우리가 창조해 낼 수 있는 삶의 모습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각자 소중한 삶의 가치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사회는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다원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는 꿈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삶의 모습이다. 저자의 말이 실용주의라는 철학적 개념에 대한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헛된 꿈을 꾸는 이상주의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실용주의적 태도만으로 사람들의 삶을 유린하거나 왜곡된 개념으로 국민들을 호도하는 짓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워낭소리’를 “교육을 통해 가난의 대물림을 끊으려 했던 것이 우리의 저력이 됐고 외국인도 이에 놀라고 있다”(한겨레신문, 기사등록 : 2009-02-15 오후 07:20:08 권태호기자)고 말하는 대통령이 특목고와 자사고 확대를 통해 교육 기회 불균형의 초석을 다지고 있다. 영어 광풍과 암묵적 고교 등급제, 편법 본고사의 부활을 조장, 묵인하는 실용주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과연 그가 말하는 실용주의란 무엇인가? 허리띠 졸라매고 ‘대한민국의 힘을 믿습니다’라고 외치는 재벌의 광고 속에는 무슨 뜻이 담겨 있을까? 그들이 말하는 실용주의는 도대체 무엇인가? 과거로 회귀하는 급행열차는 오늘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껍데기는 가라. 가짜 실용주의자도 가라. 실용주의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실용주의자가 되자.


090215-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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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물음은 어떤 지식이 참이냐 하는 물음이 아니라, 어떤 지식이 어떤 상황에서 유용하냐 하는 것이다. - P. 15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의 제도와 규범을 넘어서서 새로운 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실용주의자가 꿈꾸는 다원주의 사회는 이런 상상력이 억압되지 않고 마음껏 나래를 펼 수 있는 사회이다. - P. 19

인간의 삶을 끊임없이 개선시키는 것을 지식의 목표로 간주하는 실용주의자들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태생적으로 진보주의자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에게 진보는 인간의 보편적 본성을 구현하는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는 요소들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극복해 나가는 실천의 문제이다. - P. 49

실용주의 철학자들은 전체적으로 사고하고, 경계를 넘어서 사고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수위 취업이 잘되는 실용적인 학과와 과목만으로 커리큘럼을 채우는 대학은 역설적이게도 실용주의적인 정신을 죽이게 될 것이다. - P. 83

실용주의적인 지식이란 현실에 순응해서 돈벌이를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지식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처한 한계에 도전하면서,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창조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대학이 실용주의적인 지식인을 키우고자 한다면, 단편적인 지식이나 기능을 숙달한 직업적 전문가를 키울 것이 아니라, 폭넓은 교양을 갖추고 문제해결능력을 습득한 실천적인 지혜를 갖춘 전문적인(all purpose) 지식인을 길러 내야 할 것이다. - P. 86

실용주의자가 꿈꾸는 사회는 황금만능주의 사회, 경제지상주의 사회가 아니라 각자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삶의 가치를 추구할 자유가 보장되는 다원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이다. - P. 88

  만약에 한국이 제국주의적인 신자유주의에 순응함으로써 새로운 계급제도를 고착화시킨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우리나라’라고 부를 나라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실용주의는 한계에 직면해서 새로운 미래를 창조해 내자고 하는 철학이다. 이러한 과제를 위해서는 자율적이며, 창조적이고, 관용적인 사회 구성원들이 다수가 되어야 한다. 실용주의적인 교육은 경제적인 실리만을 추구하는 직업적인 전문가를 키우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실용주의자들은 교육을 통해서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한국의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민주주의적인 시민을 길러 내야 한다. 교육은 가진 자들의 출세수단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의 도전에 직면해 있는 한국에서 실용주의는 특정한 계층의 이익을 위한 정치적인 슬로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의 실용주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국면이 제기하고 있는 획일적이고, 억압적인 질서에 맞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연대를 위한 구호가 되어야 한다. - P.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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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루만지다 -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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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를 어루만지고 싶다. 부드럽고 따스하게 온몸으로 전달되는 너를 느끼고 싶다. 손 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 기관이 동원되어 오감으로 너를 만난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어루만진다는 말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상처를 위로한다는 뜻부터 성적인 의사를 전달하려는 의도까지. 우리말 특유의 어감과 뉘앙스를 알고 있는 모국어 사용자라면 어루만진다는 말이 편안한 안정감으로 전달될 것이다. 게다가 조용한 온기를 느끼게 하며 천천히 교감한다는 뜻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온다. 추상적인 감정이나 구체적인 행위를 한마디 말로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절감하고 때로는 보이지 않는 감정을 기막힌 언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일상에서 무심코 스치는 말들 속에서 사랑을 찾아낸 고종석의 <어루만지다>는 독자들의 영혼을 어루만진다. 저자의 말대로 사랑은 결국 위로이고, 배려이고, 무엇보다도 열정이니까 어루만짐은 곧 사랑을 의미한다. 1996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은 이 책의 부제가 된 사연이다. 속편처럼 쓰였지만 체제와 내용이 전혀 다른 책에 어울리는 적절한 제목으로 보인다.

  이 책에는 마흔 개의 단어가 나온다. 입술로 시작해서 주름으로 끝나는 사랑의 변주곡들이다. 모국어에서 길어 올린 사랑의 말들은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말들이 대부분이다. 어원을 밝혀 그 언어의 기원을 찾아보고 옛 문헌을 뒤적이며 현재의 말과 비교를 통해 역사적 변천 과정을 살핀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말은 그 의미를 제 스스로 드러낸다. 사전적 의미를 곱씹고 관련 어휘들을 훑어보는 것도 적절해 보인다. 말 한마디로 시작해서 잘 차린 밥상처럼 우리말의 어휘들은 풍성하기만 하다.

  하나의 단어로 시작해서 펼쳐지는 자유 연상과 저자의 경험과 단상들을 따라가는 일은 즐거운 산책과 같다. 작은 잘 짜인 한 편의 글들이 모여 전체 책을 이루는 구성은 단순한 병렬적 나열에 불과해 보이지만 유기적인 관계가 단단해서 잘 지은 집을 연상 시키는 책이다. 무신경한 듯 싶지만 내용들이 엮어내는 통일성과 ‘사랑’과 ‘말’이라는 두 개의 핵심어에 접근하는 방식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두드러진다.

  각각의 글들은 주제어에 대한 단상에서 출발해서 앞서 말한대로 어원을 밝히고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현재적 의미를 반추한다. 그러면서도 작가가 경험한 혹은 깊이 생각한 내용과 연결되어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느낌을 준다. 편안하면서도 공감할 수 있는 말의 깊이와 색깔이 담백하다. 작가 특유의 문체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또 다시 고종석의 이야기에 흠뻑 빠질 만하다.

  ‘미끈하다’ 처럼 점액질의 어감을 드러내는 말 뿐만 아니라, ‘발가락’이라는 꼼지락거리는 관능, ‘밴대질’이라는 민망한 단어까지 속속들이 순우리말을 나열한다는 원칙을 지켜가며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글들은 일단 킬킬거리며 어깨에 힘을 빼고 읽을 수 있는 내용이어서 읽는 내내 휴식을 취하는 느낌이었다. 때로는 ‘속삭임’으로 다가오고 때로는 ‘한숨’을 내쉬기도 하며, ‘거품’을 물기도 하고 ‘그대’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순 우리말들이 이어지는 동안 우리말에 대한 지식과 관심에 대해 부끄러워졌다. 이렇게 아름답거나 혹은 생소한 말들이 펼쳐 보이는 풍성한 밥상은 먹기도 전에 배가 부르다. 한 단어, 한 단어 갈고 닦아 빛이 나도록 만들어 놓은 작가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덕분에 우리는 어느 배우의 수상 소감처럼 밥숟가락만 들고 떠먹기만 하면 된다.

  세상에 누가 ‘사랑’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없겠는가. 아니, 누구나 책 한 권씩은 쓸 만한 이야기 거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과학적으로 풀어내기도 하고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어루만지다>처럼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다양한 시선으로 ‘사랑’을 에둘러 표현하기도 한다. 독자들은 충분히 즐겁고 훈훈하다.

  조금은 특별한 방식으로 ‘사랑’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을 만났다. 고종석의 책을 사서 크게 후회하는 일은 없다. 눈길을 끌기 위한 표지와 제목이 조금 못마땅하기도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그런대로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 한번쯤 호기심을 가졌을 법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알지 못했던 말에 대한 이야기도, 희미했던 내 사랑에 대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도 쓰여 있다.

  그래서 작가는 어루만진다는 말을 이렇게 한 마디로 정의한다.

어루만짐은 일종의 치유이고 보살핌이고 연대다. - P. 233


09021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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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스터디 - 미국대학 교양교육 핵심과정과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안내
마크 C. 헨리 지음, 강유원 외 편역 / 라티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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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예창작 고등학교, 인문학 특성화 고등학교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요즘 특목고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정말 특수한 목적을 가진 고등학교가 있나 싶다. 과학 영재를 위한 과학고를 시작으로 외국어고, 자립형 사립고 등이 수월성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또 다시 그들만의 리그를 구성하고 있다.

  모 대학이 2009학년도 2학기 수시전형에서 보여준 무원칙, 무논리, 무소신은 대학의 자율성을 스스로 훼손했다.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고 아무도 납득할 수 없는 말만 되풀이 하고 상식을 벗어난 결과들이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현 정부를 흉내 내고 있는 것 같아 입맛이 쓰다.

  대한민국의 교육 과정은 대학 입시를 정점으로 맞추어져 있다. 초, 중, 고등 학교에서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원하는 교육은 명확하다. 내 자식만 원하는 대학에 보내 달라. 그러기 위해서 사교육이 필요하고 학교는 부화뇌동 그들의 눈치를 살핀다. 교사들도 소신 없이 복지부동하거나 승진을 위한 점수 따기에 혈안이 돼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인지, 무엇을 공부할 것인지, 어떻게 공부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모든 것이 점수로 환산되어 수치로 나타난다.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 경쟁은 온 국민에게 내면화되고 살아남기 위해 오늘도 치열한 전쟁이 계속된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마찬가지다. 취업 기관으로 전락해 버린 대학의 기능을 논하는 것은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우습게 여겨진다. 대기업의 이름을 따서, 재벌의 이름을 붙인 건물들이 들어서고 그들의 요구에 따라 맞춤형 인간이 배출된다. 단 한 순간도 냉혹한 자본주의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러하다. 대략.

  이런 현실에서 인문학을 거론하는 것은 때로 철지난 유행가를 부른다고 생각하거나 현실 감각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기 쉽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마크 C. 헨리의 <인문학 스터디>는 강유원 외 편역자들의 노고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분야별 참고 도서 목록을 선정하고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에 대해 적절하게 안내하고 있는 이 책은 적어도 내게는 꼭 필요한 책이다.

  나는 어쩌면 매년 대학 신입생의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한다. 도대체 세상은 어떤 곳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 판단 기준은 무엇이며 지금 여기에 서 있는 나는 누구인지. 타인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며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의 상황은 어떠하며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은 올 해도 계속될 것이다. 가장 적절한 안내서 한 권을 만났으니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크다. 150페이지 분량의 작은 책이지만 그 내용은 결코 작지 않다. 어쩌면 보잘 것 없는 안내서로 보이지만 내게는 그렇게 읽히지 않았다. 미국대학 교양교육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고 그 핵심과정을 정확하고 날카롭게 정리한 이 책을 강유원을 비롯한 편역자들은 한국적 상황에 맞게 적용시키고 있다. 특히 영역별로 수록되어 있는 도서 목록과 참고도서들은 앞으로 책을 선택하고 체계적으로 읽어나가는데 대단히 유용한 지침서가 될 것 같다.

  작년에 강유원의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를 통해 한 수 배웠던 공부에 대해 다시 마음을 가다듬게 되었다. 그래서 강유원이나 남경태 등 몇몇 사람들의 책은 저자 혹은 번역자의 이름만 믿고 사도 후회하는 법이 없다. 개인적으로 매우 고마운 책을 오랜만에 만나 기쁘다.

  이 책은 문학 · 예술, 철학 · 정치, 역사학, 기독교 사상 등 크게 네 개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 책의 원제는 ‘학생들을 위한 핵심 커리큘럼 안내’(A Student's Guide to the Curriculum)이다. 미국의 일반 대학에서도 고전과 서구문명을 공부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위해 이 책을 썼을 것이다. 당연히 우리나라 실정이나 인문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들과 무관한 내용이 있었을 것이다. 편역자들을 이것들을 다시 정리하고 편집하여 이 책을 만들어냈다. 적절하고 고마운 부분이다. 책꽂이에 두고 책을 구입할 때마다 참고할 만하다.

  <아이네이스>가 가진 커다란 장점은,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잘못된 관념을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문학이란 근본적으로 개인과 사회의 투쟁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 P. 40

  이런 식으로 고전이 지닌 의미나 해석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충고하기도 하며,
 
  문학 공부에서 초심자가 접하는 가장 심각한 오류가 있다. 전문적인 강의에서 교수의 텍스트 해석이 학생들을 압도해버린 나머지, 학생들이 다르게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각자 견해가 있으면서도 학생들은 교수의 해석을 앵무새처럼 따라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을 극복하는 좋은 방법은 텍스트의 여러 다른 번역판을 참조하면서 거기에 실린 해제들을 읽는 것이다. - P. 41

  철학적 탐구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은 진리를 발견할 가능성이 늘 열려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에 대한 가장 좋은 입문서는 바로 플라톤의 저작이다. 플라톤에 관해 쓴 다른 저자의 책, 즉 2차 문헌을 거치지 말고 먼저 원전을 읽는 것이 좋다. - P. 72

  동일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차이를 찾아내려는 노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초인적 신의 지배에서 벗어난 근대의 인간은 다양한 시각과 통로로써 세계를 보려 하였으나 그러한 시도들은 대체로 ‘이성 중심주의’로 귀결된다. - P. 76


  이와 같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주의 사항을 지적하기도 하고 태도와 마음가짐에 대해 조언하기도 한다. 문학이나 철학 서적을 대할 때 우리의 자세는 달라져야 한다.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독자의 입장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텍스트를 재해석하고 그 의미를 궁구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인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독서를 위한 안내서가 필요한 사람이나 고전이나 서양 문화의 기원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두께와 표지, 디자인이 아니라 책은 여전히 꼼꼼하게 그 내용을 살피고 구입하고 아껴두고 읽고 싶어야 한다.

  이 책은 나에게 의미 있는 자극제가 되었다. 또 다시 힘내고, 가열차게 달아오를 준비를 해야겠다. 어쩌면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해준 책이다. 대학 신입생 수준에서 교양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된 책이겠지만 제대로 된 교양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대한민국의 대학 졸업자의 비애를 확인한 책이기도 하다. 대학원에서 조차 전공을 심화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은 더 깊어만 간다. 얄팍한 이 한 권의 책에서 이 한마디가 오래 가슴에 남는다.

지적 균형감각은 교양교육을 받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열매다. - P. 123


09021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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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 2009년 제3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연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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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李箱)에게 빚을 졌다면 갚아야 한다. 그는 우리 문학사의 화수분이다.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된 그의 이미지들을 보라. 화려하고 다양하게 분석되고 해체되는 그의 작품들을 보면 알게 된다. 이상이 누구인가를. 아니 어쩌면 영원히 그를 몰라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을지도 모른다. 이상 김해경은 우리에게 불가해한 존재로 남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흐릿한 존재로 남아 있을 수는 없을까. 일관성 있는 목소리나 통일된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모범적인 작가들과 달리 그는 럭비공처럼 튀어 오르는 방향을 알 수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다양하고 입체적으로 살아 숨 쉬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당대 유행하던 혹은 유럽에서 흘러든 기법이든 유행이든 상관없이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홀로 걸었든 그 쓸쓸함과 외로움 곁에 서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면 한번쯤 작가의 길을 꿈꾸었음에 틀림없다.

  2009년 ‘이상문학상’은 김연수에게 돌아갔다. 2000년 이인화가 받았을 때처럼 당황스러웠던 적이 없다. 남의 문학상에 뭐라 끼어들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이상문학상’이 가진 위상과 의미를 생각할 때 오래전 황당한 기억이 떠오른다. 보는 각도와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게 문학이지만 김연수는 최근의 작품들이나 활동으로 보아 충분히 예견된 수상이었다. 문학상은 김연수의 말대로 그저 칭찬이고 위안일 수 있다. 더 잘하고 잘해 보라고. 종착점에서 걸어주는 꽃다발이 아니라 마라톤 도중 마시는 탁자위에 생수 같은 게 아닐까 싶다. 힘들고 지친 발걸음을 내딛는 작가에게 격려와 칭찬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그러하듯이. 김연수가 이제 조금 더 힘을 내고 행복한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수상작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은 새로운 서사적 기법도 ‘메타적 글쓰기의 방법에 의해 상호 텍스트적 중층성을 확립’한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읽은 수상작은 그저 문학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활용되는 상징에 다름 아니다. ‘코끼로’로 상징되는 인간 내면의 고통은 현실과 무관하지 않으며 소설 안에서 단순하게 상징화 되었을 뿐이다. 누구에게나 고통은 있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이야기하듯이 그것이 코끼리가 아니라도, 동물이 아니라도 좋다. 추상적 대상을 구체화 시킬 수 있는 상징적 메타포가 필요할 뿐이다.

  나는 이 단편을 통해 김연수 소설의 미래를 가늠해 보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 그것은 각 심사위원들의 중점적 심사평에서는 조성기만이 언급했고 작품론에서 김형중이 언급한 ‘촛불’이다. 소설 말미에 ‘그것’이라는 고딕체의 글씨가 선명하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이 소설을 읽어내는 키워드는 그것이 아닐까? 구체적 대상을 보여주지 않고 다양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는 지시어 그것을 김형중은 ‘촛불’이라고 읽었다. 무릎을 치며 공감했다. 개인의 고통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 특히 소설에서 보여주는 인물들에게 고통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는 장치가 된다. 이 개인적 고통이 사회로 확대되는 일은 현실 참여 문학이 아니고서는 좀체로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 90년대 이후 한국 소설의 지향은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내면적 세계관에 함몰되어 있다. 아니면 지나간 역사에게 소설의 방향을 묻고 있다. 사회적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는 인물들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부족하다. 고통의 근원에 도사리고 있는 사회 구조적 문제나 교묘한 틀과 구조들을 살펴보는 소설을 찾기 어렵다. 철지난 노래를 부르자는 게 아니다. 인간의 삶은 영원히 반복되고 또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 아픔과 고통은 쉽게 치유되지 않고 원인이 밝혀 고통을 나누기도 쉽지 않다.

  김연수에게 과연 ‘촛불’이 어떤 의미로 그리고 어떤 형태로 밝혀질 수 있을지 그의 다음 소설들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이다. 지금까지 보여준 작가의 역량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작가론에서 손정수는 ‘소통’으로 김연수의 소설을 이야기했지만 그 소통은 내면적인 고통이나 아픔을 드러내는 타인과의 소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소통에 실패한 주인공의 내면의 풍경을 그린 것은 아닌가 싶다. 소통을 넘어 연대와 참여로 나설 수 있는 역사적 주체로 홀로 설 수 있는 사람들이 등장할 것을 기대해 본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한 ‘여자’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 수록됐던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을 다시 읽었다. 새로운 느낌으로 작가 자선 대표작이라는 이름으로 읽었다. 그가 찾으려는 혹은 헤매고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혹은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해 보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쓰는 일 자체가 즐거움으로 시작해서 책임감과 의무가 되고 또 다른 세계를 만나고 자신을 극복하는 과정이라면 행복한 작가가 아닐까 싶다.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내게 읽는 재미를 주었던 작가의 수상을 축하한다.

  우수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작품들 중 박민규의 ‘𪚥’가 주목을 끝다. 예의 발랄하고 풍자적인 어법으로 현실을 풍자하는 수법이 독자들을 한없이 즐겁게 한다. 현실을 비틀고 풍자하는 많은 방법 중에 무림의 고수를 선택한 것은 무협의 세계라는 아련한 추억과 더불어 진정한 고수의 의미를 중첩시키고 있다. 윤이형의 ‘완전한 항해’ 또한 주목을 끌었지만 새로움 이상을 보지 못했다. 이혜경, 정지아, 공선옥, 전성태, 조용호의 소설들도 나름의 개성과 탄탄함을 갖추고 있지만 눈에 띠는 신선함이나 깊은 감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수상작을 읽어며 윤대녕을 떠 올렸는데 심사평에서 김윤식이 한 번 언급해서 반가웠다. 누군가의 영향과 교집합을 읽어내는 것도 소설 읽는 또 다른 재미다. 상찬으로 끝나지 않고 더욱 정진할 것을 믿는다. 깊이와 넓이라는 상호 모순된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작가가 되기를 바란다. 독자들의 입맛은 점점 까탈스럽다. 작가도 독자와의 만남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더라도 소설은 영원히 새로움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새로운 삶, 새로운 인물, 새로운 기법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어야 한다. 우리 모두의 그것처럼.


090208-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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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2-08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다 읽고 리뷰 제목 이해했어요.

sceptic 2009-02-20 12:09   좋아요 0 | URL
김연수의 소설이 재미있죠...변하지 않더라도 계속 읽고 싶죠...그래도 내일이 더 기대되는 작가이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