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속에 피가 흐른다 - 김남주 시선집
김남주 지음, 염무웅 엮음 / 창비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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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가 그대는
봄을 잉태한 겨울밤의
전통이 얼마나 끈질긴가를
그대는 아는가
육신이 어떻게 피를 흘리고
영혼이 어떻게 꽃을 키우고
육신과 영혼이 어떻게 만나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는가를
- ‘잿더미’ 중에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울 때가 있다. 흐르는 시간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선명한 기억들 말이다. 김.남.주. 라는 이름은 아프다. 반역의 세월 속에서 고통과 슬픔으로 점철된 시대를 떠 올리는 일은 아득하기만 하다. 추체험된 기억 속에서 그는 여전히 펄펄끓는 쇳물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목소리를 토해낸다.

  역사는 그를 기억할 것이고 사람들은 그의 시를 가슴에 묻을 것이라고 믿는다. 시선집 <꽃 속에 피가 흐른다>는 뭉클한 감동으로 속울음을 울고 싶게 하는 책이다. 켜켜이 먼지 묻은 <나의 칼, 나의 피>도 쓰다듬고 <사상의 거처>도 어루만져 보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주년을 기념하여 펴낸 시선집을 5년이나 더 지나서야 읽는다.

  살아온 시간만큼의 두께로 남겨진 사람들과 대한민국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어떤 사람이 떠나든 죽든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은 계속된다. 비루한 일상도 빛바랜 추억도 아득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김남주를 다시 읽는 동안 가슴은 젖어들고 목울대는 연신 어쩔 줄을 몰랐다. 보잘 것 없는, 어쩔 수 없는 먹물인 나는 그것을 아파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랑은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
봄을 기다릴 줄 안다
기다려 다시 사랑은
불모의 땅을 파헤쳐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
천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 나무를 심을 줄 안다

사랑은
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너와 나와 우리가
한 별을 우러러보며


  숱한 민중 가요를 남기고 떠난 그의 시는 모두 노래다.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아는 것이 사랑인데 사람들은 이제 모두 갖기 위해 몸부림친다. 아니 내 것을 뺐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운다. 승자 독식 시대는 계속되고 이유도 모르면서 사람들은 달리는 경주마처럼 앞만 달린다. 가끔 주변을 돌아보지만 미래가 밝아 보이지 않는 것은 내게 문제가 있는 걸까? 그의 노래가 듣고 싶어진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투쟁 속에 동지 모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떨어져 가지 말자
함께 가자 우리 이길을
앞에 가며 너 뒤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너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중에서


  모두 함께 길을 걸어야만 힘이 생긴다. 혼자서는 안 된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가 지금처럼 뼈아프게 다가왔던 시대도 없다. 역설적으로. 각자 뛰고 있지만 어디를 향해,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기적 욕망과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은 냉정하기만 하다. 내 한 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자유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 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안치환의 기획앨범 ‘Remember’는 <김남주 시인 추모앨범>이다. 주옥같은 노래들이다. 시와 음악의 만남은 자연스런 일이며 특히 안치환은 정호승이나 김남주의 시를 즐겨 노래했다. 운전을 하다가 차안 가득히 울려 퍼지는 ‘자유’를 처음 들었을 때의 전율을 잊지 못한다.

  정태춘으로 시작해서 김광석을 거쳐 안치환에서 내 가요 듣기는 멈추어버린 것 같다. 나이와 무관하게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나이만 먹어간다는 말은 겸손한 부끄러움이 아니라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겪게 되는 생에 대한 부끄러움일지도 모르겠다. 하종강은 그것을 ‘부채감’이라 표현했고, 브레히트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이 시대를 책임질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웅이 필요한 시대도 오지 말아야 하지만 신념을 잃어버린 시대는 불행하기만 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입만 살아서 중구난방인 참새떼에게 물어본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리만 살아서 갈팡질팡인 책상다리에게 물어본다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져
난마처럼 어지러운 이 거리에서
나는 무엇이고
마침내 이르러야 할 길은 어디인가
- ‘사상의 거처’ 중에서


  그래서 김남주는 스스로에게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묻고 있다. 길 위에서 묻는다. 어디로 갈 것인가. 마침내 이르러야 할 길은 어디인가. 시인에게 묻고 싶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을 알면서도 걷지 못하는 사람과 그 길조차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누구냐고 묻고 싶다. 난마처럼 어지러운 시대는 계속 될 것인가?

  사상의 거처는 없다. 한 곳에 머물지도 않는다. 유목하는 사상들은 여전히 사람들을 미혹케하고 현실은 요지부동이며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지식인들 자취를 감추었고 아이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더 많이 갖기 위한 우리들의 제살파먹기는 멈출 줄 모른다.

  그래서 시인은 새가 되고 싶었나보다. 새가 아니면 누구보다도 가벼운 하늘이 되고 싶었을 게다. 너무 일찍 새가 되어 떠나버린 시인의 발자취는 긴 여운과 따스한 온기만 남겼다. 역사와 시대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다간 시인으로 우리는 김남주를 기억할 것이다. 시와 삶이 하나가 된 시인을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새가 되어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있을 시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이 가을에
하늘을 보면 기러기 구천을 날고
진눈깨비 내릴 것 같은 이 가을에
잎도 지고 달도 지고
다리 위에는 가등도 꺼진
이 가을에
내가 되고 싶은 것은
오직 되고 싶은 것은
새다
- ‘새가 되어’ 중에서



090324-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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