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머의 루머의 루머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5
제이 아셰르 지음, 위문숙 옮김 / 내인생의책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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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쯤 전에 처음 경험했다. 그림을 보기 위해 다가서면 조용한 목소리로 그 그림을 설명해 주는 여자의 목소리. 틀림없이 혼자 미술관에 갔지만 그녀는 내 시선을 따라 그림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을 시작한다. 발길을 옮길 때 쯤 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다음 그림을 위해 숨을 고르는 것 같다. 첫 경험은 기이했다. 이제 누구와 함께 미술관에 가든 그녀 혹은 그의 목소리는 전시장을 나올 때까지 따라다닌다. 동행이 누구냐가 아니라 그 전시회는 설명하는 사람의 목소리만 선명하게 남는다. 동행과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오독일지라도 나름의 방식대로 그림을 해석하던 재미는 사라질 지도 모른다.

  이 사소한 경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제이 아셰르는 <루머의 루머의 루머>라는 소설을 이렇게 착안했다고 한다. 오래된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카세트 테잎을 떠올렸다. 아직도 내 차에는 CD와 카세트 플레이어가 공존한다. 카세트 플레이어 안에는 비발디의 <사계>가 몇 년째 꽂혀 있는지 모른다. 카세트 테잎만 돌아가던 차에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테잎이 늘어질 때까지 듣던 기억이 새롭다. 모든 것이 디지털로 표현되고 저장되며 인식되는 세상에 아날로그 버전의 추억은 흑백처럼 흐릿하기만 하다.

  이 소설은 드라마나 영화를 위한 소설처럼 읽힌다. 일상에 빚지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이 소설 또한 사소함 속에 생의 엄숙함이 숨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도덕적 원리나 철학적 깨달음에 의해 인생이 굴러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말 한마디, 사소한 관심 하나에 목숨건다. 그것은 절대 사소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여성에겐.

  눈덩이 효과는 어디에나 적용된다. 한 번 시작된 작은 이야기는 구르고 굴러 바위만 해졌다가 집채만 해졌다가 지진을 일으킬 만큼 커져 산을 깔아뭉갠다. 세상을 바꿀 만한 이야기를 만들기도 한다. 그것이 이야기의 힘이자 두려움이다. 사람들은 그 주둥이로 자신이 어떤 끔찍한 일을 벌이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하기도 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소통과 전파의 힘이 강한 이야기에 매료된다. 호기심과 궁금증은 이익과 손해를 떠나 견디기 어려운 욕망이다.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목숨도 불사한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목숨을 건 이야기의 욕망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루머는 소문의 영어식 표현이다. 소문에 관한 속담은 어느 민족에게나 있다. 다시 말해 소문, 루머는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이며 그것을 만들고 전파시키는 것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고 깊은 인간의 습성이다.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일 수도 있으나 타인에게는 치명적인 상처가 되고 때로는 죽음보다 깊은 생채기를 만들기도 한다. 최근에도 연예인이 루머에 휘말려 자살을 해서 사회적 충격을 던져 주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지 않고 타인을 비방하기 바쁘다.

  소문은 또 다른 소문을 낳고 그 근원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출발해서 소문과 무관하게 자신들의 이야기 욕망을 해소시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원인도 결과도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들은 이야기나 확대 해석된 부분에 초점이 맞춰지기도 하고 전혀 다른 버전의 새로운 루머가 탄생하기도 한다. 루머는 루머를 낳고 루머는 또 다른 루머를 낳는다. 이것이 루머의 법칙이며 변하지 않는 소문의 실체이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바로 이러한 루머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냈다. 한 여고생의 죽음 이후에 던져진 7개의 테이프. 앞, 뒷면에 녹음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는 자살하기 직전에 녹음된 주인공 해나의 목소리다. 어느 날 소포가 도착한다. 유일하게, 가장 진실하게 해나를 사랑했던 소년 클레이. 그의 귀에 들리는 죽은 해나의 목소리는 비현실적이라기 보다 슬프고 잔인한 노래로 들렸을 것이다. 그 소년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이 소설은 해나의 목소리를 통해 드러나는 클레이의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한 사람의 죽음은 존재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것은 죽음과 이별이 별반 다르지 않다. 다시 만날 지도 모른다는 재회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미련은 추억만 남긴 채 아득한 그리움만 증폭시킬 뿐이다. 죽음은 깨끗하고 차분하다. 허무하지만 아쉬움이나 후회를 남기지는 않는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만 확인하게 된다. 다만 시간이 좀 필요할 뿐.

  전학을 온 해나가 겪는 사소한 일들은 눈덩이 효과를 가져오고 사소한 장난과 루머들은 한 인간을 피폐하게 만든다. 자살의 징조들이 곳곳에 포착되지만 타인의 일은 사소한 걱정일 뿐이다. 나와 상관없는 일들에 대해 사람들은 진심으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 흐르는 소문을 따라 장난을 즐기고 말을 보태며 상상과 추리를 동원해 온갖 환상과 공상을 만들어낸다. 해나는 그렇게 하루하루 죽어갔다.

  이 소설은 한 여고생의 자살을 남겨진 카세트 테잎을 통해 밝혀내는 추리소설의 기법을 잘 활용하고 있지만 단순히 학교에서 벌어지는 아이들의 이야기로 읽을 수만은 없다. 어디에나 있어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벌어질 일들에 대한 지극히 사고하고 당연하고 일상적인 일들이어서 시대와 공간을 넘어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이야기로 가득한 통속 소설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루하고 재미없는 심리 소설도 아니다. 그 접점을 찾기 위해 작가가 노력한 흔적은 곳곳에서 배어 나온다. 재미있지만 사소하게 웃고 넘길 수 없는 이야기의 진실들, 타인에게 죽음과도 같은 루머가 내 입을 통해 어떻게 전파되었는가에 대한 반성들이 필요한 소설이다. 항상 그러하듯이 사실조차 제대로 전달될 수 없는 말들 속에서 진실을 찾겠다는 것은 차라리 비극에 가깝다.

  당신은 타인에게 루머를 전하지 않았는가? 그 사소한 말 한마디가 죽음을 불러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는 않았는가?


090329-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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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속에 피가 흐른다 - 김남주 시선집
김남주 지음, 염무웅 엮음 / 창비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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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가 그대는
봄을 잉태한 겨울밤의
전통이 얼마나 끈질긴가를
그대는 아는가
육신이 어떻게 피를 흘리고
영혼이 어떻게 꽃을 키우고
육신과 영혼이 어떻게 만나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는가를
- ‘잿더미’ 중에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울 때가 있다. 흐르는 시간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선명한 기억들 말이다. 김.남.주. 라는 이름은 아프다. 반역의 세월 속에서 고통과 슬픔으로 점철된 시대를 떠 올리는 일은 아득하기만 하다. 추체험된 기억 속에서 그는 여전히 펄펄끓는 쇳물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목소리를 토해낸다.

  역사는 그를 기억할 것이고 사람들은 그의 시를 가슴에 묻을 것이라고 믿는다. 시선집 <꽃 속에 피가 흐른다>는 뭉클한 감동으로 속울음을 울고 싶게 하는 책이다. 켜켜이 먼지 묻은 <나의 칼, 나의 피>도 쓰다듬고 <사상의 거처>도 어루만져 보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주년을 기념하여 펴낸 시선집을 5년이나 더 지나서야 읽는다.

  살아온 시간만큼의 두께로 남겨진 사람들과 대한민국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어떤 사람이 떠나든 죽든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은 계속된다. 비루한 일상도 빛바랜 추억도 아득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김남주를 다시 읽는 동안 가슴은 젖어들고 목울대는 연신 어쩔 줄을 몰랐다. 보잘 것 없는, 어쩔 수 없는 먹물인 나는 그것을 아파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랑은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
봄을 기다릴 줄 안다
기다려 다시 사랑은
불모의 땅을 파헤쳐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
천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 나무를 심을 줄 안다

사랑은
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너와 나와 우리가
한 별을 우러러보며


  숱한 민중 가요를 남기고 떠난 그의 시는 모두 노래다.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아는 것이 사랑인데 사람들은 이제 모두 갖기 위해 몸부림친다. 아니 내 것을 뺐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운다. 승자 독식 시대는 계속되고 이유도 모르면서 사람들은 달리는 경주마처럼 앞만 달린다. 가끔 주변을 돌아보지만 미래가 밝아 보이지 않는 것은 내게 문제가 있는 걸까? 그의 노래가 듣고 싶어진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투쟁 속에 동지 모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떨어져 가지 말자
함께 가자 우리 이길을
앞에 가며 너 뒤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너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중에서


  모두 함께 길을 걸어야만 힘이 생긴다. 혼자서는 안 된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가 지금처럼 뼈아프게 다가왔던 시대도 없다. 역설적으로. 각자 뛰고 있지만 어디를 향해,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기적 욕망과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은 냉정하기만 하다. 내 한 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자유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 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안치환의 기획앨범 ‘Remember’는 <김남주 시인 추모앨범>이다. 주옥같은 노래들이다. 시와 음악의 만남은 자연스런 일이며 특히 안치환은 정호승이나 김남주의 시를 즐겨 노래했다. 운전을 하다가 차안 가득히 울려 퍼지는 ‘자유’를 처음 들었을 때의 전율을 잊지 못한다.

  정태춘으로 시작해서 김광석을 거쳐 안치환에서 내 가요 듣기는 멈추어버린 것 같다. 나이와 무관하게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나이만 먹어간다는 말은 겸손한 부끄러움이 아니라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겪게 되는 생에 대한 부끄러움일지도 모르겠다. 하종강은 그것을 ‘부채감’이라 표현했고, 브레히트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이 시대를 책임질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웅이 필요한 시대도 오지 말아야 하지만 신념을 잃어버린 시대는 불행하기만 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입만 살아서 중구난방인 참새떼에게 물어본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리만 살아서 갈팡질팡인 책상다리에게 물어본다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져
난마처럼 어지러운 이 거리에서
나는 무엇이고
마침내 이르러야 할 길은 어디인가
- ‘사상의 거처’ 중에서


  그래서 김남주는 스스로에게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묻고 있다. 길 위에서 묻는다. 어디로 갈 것인가. 마침내 이르러야 할 길은 어디인가. 시인에게 묻고 싶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을 알면서도 걷지 못하는 사람과 그 길조차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누구냐고 묻고 싶다. 난마처럼 어지러운 시대는 계속 될 것인가?

  사상의 거처는 없다. 한 곳에 머물지도 않는다. 유목하는 사상들은 여전히 사람들을 미혹케하고 현실은 요지부동이며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지식인들 자취를 감추었고 아이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더 많이 갖기 위한 우리들의 제살파먹기는 멈출 줄 모른다.

  그래서 시인은 새가 되고 싶었나보다. 새가 아니면 누구보다도 가벼운 하늘이 되고 싶었을 게다. 너무 일찍 새가 되어 떠나버린 시인의 발자취는 긴 여운과 따스한 온기만 남겼다. 역사와 시대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다간 시인으로 우리는 김남주를 기억할 것이다. 시와 삶이 하나가 된 시인을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새가 되어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있을 시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이 가을에
하늘을 보면 기러기 구천을 날고
진눈깨비 내릴 것 같은 이 가을에
잎도 지고 달도 지고
다리 위에는 가등도 꺼진
이 가을에
내가 되고 싶은 것은
오직 되고 싶은 것은
새다
- ‘새가 되어’ 중에서



090324-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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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설의 팡세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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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리’. 우리는 더 이상 그 무게를 감당하고 싶지도, 그것에 속거나 공범이 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쉼표 하나를 위하여 죽게 되는 세상을 동경한다. - P. 8(언어의 위축)

  아포리즘aphorism은 시에 가까운 짧은 산문이다. 뚜렷한 하나의 생각이나 가치를 특별한 시선이나 생각을 압축적이고 간결하게 표현한 글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특별한 생각을 한다. 공감할 수 있는 자기만의 언어로 그것을 표현할 수 있다면 아포리즘이 된다. 그러니까 일차적으로 생각과 시선의 문제이고 이차적으로는 표현의 문제와 결부된다. 짧은 단상을 수첩이나 일기장에 적어놓은 것들이 하나의 일관된 생각으로 모아지기도 하고 하나의 주제나 대상에 대해 갖고 있는 다양한 관점들을 표현하면 아포리즘이 된다.

  형식은 내용을 규정한다. 짧고 간결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긴 글보다 더욱 정확하고 치밀한 표현이 요구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래 생각하고 낯선 시각과 자신만의 언어가 필요하다. 형식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내용만이 모든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아포리즘에 담긴 말들은 작가의 영혼을 대변하고 내면의 고백을 드러낸다.

  이성복의 아포리즘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을 두고두고 오래 읽은 기억이 난다. 사랑에 관한 문학에 관한 시인의 내밀한 고백은 그의 시보다 직설적으로 표현되어 깊은 감동을 주었다. 산문집과 달리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고백과 같았다. 오랫동안 전해오던 사소함들을 모아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글을 쓴다는 것은 오랜 글쓰기 훈련과 탄탄한 문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

  1976년 65세의 나이에 쓴 에밀 시오랑의 <독설의 팡세>는 신비로운 역설과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철학적 사유로 빚어낸 짧은 글들은 오래 두고 곱씹어 볼 만한 언어들로 가득하다. 시간, 고독, 종교, 사랑, 음악, 역사, 공허 등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삶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내밀한 고백과 시니컬한 시각, 독설에 가까운 비틀기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관점들에 대한 반성을 요구한다.

  우울증과 자살에 관한 심각한 후유증이나 니체에 대한 몰입 등 그의 젊은 날이 이 책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누구나 겪게 되는 삶에 대한 회의나 인생에 대한 비극적 인식이 모두 철학자를 만들어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그저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시간의 벽 앞에서 우왕좌왕하지만 미래에 대한 기대나 일말의 ‘희망’을 볼모로 삶을 지탱해나가고 있다. 긍정적인 태도와 유쾌한 웃음 뒤에 숨은 진실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면서.

  에밀 시오랑은 슬픔과 우울 그리고 불면과 절망 속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이 책은 그에 대한 작은 고백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개인적 삶이 평범하지 못했고 세상을 비극적으로 인식한 듯한 태도와 달리 그의 글은 아름다운 언어의 서정으로 가득하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그의 삶을 지탱해 준 유일한 희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80세가 넘도록 살아낸 것도 아이러니 하지만 젊은 나이에 조국을 떠나 40세이 이르도록 직업도 갖지 않고 대학 구내 식당을 전전하며 그가 고민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주 오래 전에 쓴 아포리즘이 지금 읽히는 것은 시대를 뛰어넘어 공감할 수 있는 역설이 빛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 삶은 때때로 비극적 환상을 심어주기도 하고 눈부신 기대로 유혹하기도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떻게 펼쳐지든 켜켜이 먼지 앉은 세월의 두께를 이겨내야 하는 시찌프스의 형벌이 인간의 조건인지도 모르겠다.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기적 같은 일로 오늘 하루를 채우겠다고 결심하는 마술사가 된다. 그러고는 침대에 다시 누워 사랑, 돈…… 난처한 문제들을 저녁까지 되씹는다.

*

실망하기를 거부하는 인간보다 저질의 인간은 없다. - P. 89(고독의 서커스)


  누군가의 글을 읽는 것은 그 사람과의 대화를 의미한다. 대면적 접촉을 넘어 깊은 사색의 영역을 공유한다는 면에서 일상적인 대화보다 한 인간에 대해 깊이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모든 것이 객관적이고 수치화될 수는 없다. 특히 인간의 내면에 관한 한.

  그리하여 한 사람은 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 사람을 알게 될 수록 사랑하게 된다. 모든 관계가 그러하진 않겠지만, 어쩌면 모든 고통과 비극의 시작은 사랑이다. 그래서 에밀 시오랑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랑의 존엄성이란 흥분의 순간이 지나고 남아 있는 허탈한 애정에서 오는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무한을 내포하고 있다. - P. 137(사랑의 생명력)



09032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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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양피지 - 캅베드
헤르메스 김 지음 / 살림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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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반신반의 하는 경우 대개 실패할 확률이 높다.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선입견일 지도 모르지만 경험상 그렇다. 합리적이지 못한 판단이지만 세상이 이성과 논리로만 살아지지는 않는 법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선택의 순간은 잔인하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여러 가지를 고려하지만 망설이다 보면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후회라는 대가를 치르거나 다른 가능성을 잃어버리는 상황을 만든다.

  책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고 사람을 선택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행복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다만 행복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따른 갈등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예상하지 못한 난관에 부딪치고 어쩔 수 없는 길을 걷기도 하며 엉뚱한 행운을 얻기도 한다. 그래서 인생은 아무도 알 수가 없는 법이다. 계획된 길을 순서대로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생의 이면에 숨은 진실이 있는 법이다.

  그것을 알려주겠다고 나선 많은 사람들과 책들과 예언가들이 있다. 믿어도 그만 믿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알면서도 끊임없이 그 방법에 대해, 지름길에 관해 알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지 못한다. 그 틈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만큼이나 많다. 헤르메스 김의 <기적의 양피지 캅베드>도 그러하다.

  철학자 김용규의 필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전의 저작들에 대한 믿음과 자기계발 종류의 책 사이에서 한참 망설이다. 출판사가 보내주겠다는 책을 받아보기로 했다. 읽으면서도 읽고 나서도 떨치지 못하는 이 묘한 느낌을 뭐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책의 의도와 글 사이의 조화만큼 기묘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해서 이 책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조언해 주는 책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답하는 것이 철학의 궁극적인 의무라면 가장 직접적이고 실천적인 정답을 제공하는 책이다. 철학자 김용규는 에둘러 말하기보다 대중 속으로 들어가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삶의 원리 몇 가지를 제공하고 있다. 여전히 갈등하고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 나온 지혜를 빌릴 수도 있을 것이고 인생의 비밀을 알고 난 후의 허무함이나 그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괴감을 동시에 느낄 수도 있다.

  책 속의 주인공 아리의 정식 이름은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오나시스’다. 참 재미있는 이름이다. 선박왕 오나시스의 본명에 두 명의 철학자가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아리는 도움을 준 어느 랍비로부터 양피지 두루마리를 얻게 된다. 양피지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비법이 숨겨진 놀라운 내용이 적혀있다. 아리는 양피지에 적힌 대로 실천해서 상상을 초월하는 돈을 벌게되고 원하는 여자를 얻게 된다.

  윈스턴 처칠과의 세대를 뛰어넘는 우정은 물론 그레타 가르보와 마리아 칼라스, 그레이스 켈리, 재클린 케네디에 이르기까지 그의 여성 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도대체 무일푼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그의 인생 역정은 영화나 드라마의 상상력을 초월한다. 그에게는 특별한 삶의 원리가 실제로 존재했고 그것을 실천해 옮겼다. 당연히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살았고 그 행동과 실천의 결과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성공한 실존 인물에 대한 자서전이 아니다. 저자 특유의 인문학적 지식과 문학적 상상력 그리고 철저한 자료조사로 빚어낸 팩션은 완벽한 하모니를 이룬다. 쉽고 편안하게 읽히는 문장과 치밀한 구성은 저자의 수고와 노력을 알 수 있게 한다. 즐거운 마음으로 인생의 목표를 세우지 못하는 사람에게 한 번쯤 권해 줄 수도 있는 책이다.

  이 정도 노력과 공이 든 책이라면 자기 계발서든 성공담이든 읽어 줄 용의가 있다. 유독 돈벌이에 관한 혹은 자기 계발에 관한 책들이 잘 팔리는 대한민국이고 보면 특별히 그런 종류의 책을 싫어하는 내게도 문제가 있겠다. 이 책은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좋은 책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양피지에 적힌 내용들은 너무 당연해서 하품이 나올만한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오히려 설득력이 없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노력과 실천인데 실증적인 사례로 든 것이 바로 오나시의 삶이다. 그는 선한 의도로 얻었듯이 바닷가를 찾아온 사람에게 전하는데 그가 바로 빌 게이츠의 아버지다. 그런데 과연 세상이 노력과 실천만하면 그에 합당한 결과를 가져다 줄까? 지극히 개인적인 노력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을까?

  구조적 모순이나 문제점을 모두 개인의 탓으로 돌리게 되는 의도하지 않은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부단한 노력과 열정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이렇게 말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허탈감은 그래서 생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노력해도 안되는 일은 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 누구나 같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는 비애를 가르쳐 주는 책은 없을까?

아리는 분명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겠다는 자신의 순수했던 소망보다는 세속적인 욕망으로 눈을 돌렸다. - P. 203

  이 책이 자기모순에 빠진 대표적인 문장이다. 컨텍스트를 고려하지 않고 하나의 문장만으로 문제를 지적하자는 게 아니다. 아리는 엄청난 부를 획득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겠다는 것이 순수한 ‘소망’이라면 세속적인 ‘욕망’은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물에 반사되는 햇빛의 속성은 눈의 높낮이와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것뿐이다.

  어쨌든 캅베드에 적힌 내용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서점으로 달려가 중간 중간에 삽입된 황금색 바탕의 양피지 내용들을 읽어보고 판단하고 선택할 것을 권한다. 책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 그렇게 살 것인가 말 것인가!


090317-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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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코스키가 간다 - 제2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한재호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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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날과 비오는 날 중 언제를 좋아하시나요? 누가 묻는다면 나는 비오는 날이라고 대답한다. 그건 날씨의 문제가 아니다. 정서의 문제이고 태도의 문제다. 날씨와 정서라니? 날씨와 삶의 태도라니?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귀찮을 때 사람들은 ‘그냥’이라고 대답한다. 비오는 날이 그냥 좋은 거다. rainy라는 아이디를 오랬동안 썼던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뭐 딱히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냥 비가 좋다는 정도. 굳이 찾으려면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과연 그러한 이유들 때문일까 싶기도 하고.

  그녀를 만날 때면 언제나 비가 내렸다. 이렇게 시작하는 연애 소설이 아니라, “말도 안 돼.”로 시작하는 말도 안 되는 소설이 <부코스키가 간다>라는 한재호의 장편 소설이다. 제 2회 창비장편소설상을 수상한 이 소설은 ‘말도 안 돼’로 시작해서 말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다. 모든 문학이 그러하듯이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해석되거나 혹은 의도적 오류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시대를 벗어난 소설이 존재할 수 없듯이 이 소설도 불안한 21세기의 한 복판을, 지금 우리들의 자화상을 통렬하게 비꼬는 듯하다.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은 시대를 거스를 수 없을 것처럼 강렬하다. 고용 없는 성장과 승자 독식의 시대로 표현되기도 하는 이 시대의 괴물과 맞서 싸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싸움의 대상도 모호하고 자본의 그림자에 포섭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어느 시대에나 그렇듯이 움직이지 않는 다수와 발 빠르게 적응하게 살아남는 소수 그리고 이건 아니라고 외치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공존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이 소설의 주인공은 ‘88만원 세대’의 전형이다. 소설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30대 소년’은 시대의 산물이다. 대학졸업 3년차, 예비군 6년차인 주인공의 일상은 이력서 쓰기와 웹서핑으로 요약된다. 무임금 노동이지만 시대를 견뎌내는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하다. 개인이 손 쓸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 늙은 소년의 이야기가 바로 <부코스키가 간다>의 화자다.

  주인공으로 나선 부코스키는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며 단 한 마디 말도 없이 모든 등장 인물을 이끈다. 보이지 않는 괴물이 보이는 실체로 등장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고 없는 대상을 구체적 인물로 등장 시킨 것 같기도 하다. 이 소설이 끝날 때까지 부코스키의 정체도 존재도 알 수 없고 그 의미는 점점 모호해지면 캐릭터는 흐려지고 사라진다. 적어도 내 안에서 부코스키는 그렇게 사라졌다. 그리고 오롯이 청년 백수만 남았다.

  소설을 통해 현실을 읽어내고 세상을 새롭게 보는 것은 일견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소설의 재미는 거기에서 찾아지지 않는다. 이 소설의 즐거움은 부코스키의 정체에 있다. 그가 비오는 날 아침 아홉시가 되면 어김없이 길을 나서는 이유 때문에 독자들은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그러면서 그의 뒤를 밟는 주인공 백수 청년의 시선으로 그를 따라간다. 도대체 ‘왜’라는 호기심을 제어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이 종반으로 치달을수록 부코스키의 정체보다 화자인 청년백수에게 시선이 옮아간다. 그가 살아온 시간이나 살아갈 과정이 아니라 지금 현재 그가 겪고 있는 혹은 견뎌내고 있는 시간들이 바로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시대를 탓해 보아야 피해는 개인에게 남겨질 뿐이다. 구직행위는 힘겨운 무임금 노동이다.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지만 대가없이 시간만 흐른다. 이 소설이 치기어린 백수의 세상 도전기와 다른 이유는 우리 시대가 양산해 놓은 넘을 수 없는 벽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노력하지 않거나 게으르거나 목표와 희망이 없어서 놀고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청년백수가 견뎌야 하는 것은 개인의 아픔이 아니라 시대의 통증이다. 이 소설은 그렇게 새로운 세대와 시대로 넘어가기 위한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른이나 먹은 늙은 소년을 통해 성장통을 읽어야 하는 독자 또한 마음이 편치 않다. 추리 소설적 요소가 개입되어 스토리를 이끌어 가고 화자의 반복적 일상과 경쾌한 문장과 표현들은 흡입력있게 독자들을 끌어들이지만 장편으로 끌어가기에는 허약한 이야기와 ‘거북이’의 캐릭터가 모호하다. 쫓는 자에서 쫓기는 자로 설정된 상황은 흥미롭지만 끝내 그 연쇄적인 고리의 의미를 드러내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작가의 시작인 작품이니 많은 응원과 박수가 필요할 것 같다. 늘 그러하듯이 경쾌하고 가볍게 현실을 비틀고 웃음과 눈물을 비벼줄 수 있는 작품을 독자들은 항상 기다리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삶에 대한 질문들을 스스로 해결해 가는 과정을 보여줄 수 있는 다음 작품을 기다릴 수 있겠다. 정답은 없다. 다만 무언가를 쫓는 과정, 그 지난한 과정이 삶이 아닐까?

  그러면서 무언가에 쫓기는 인생. 우리는 그 영원한 순환 고리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시대를 넘어서 세월을 이겨내고 치열한 삶의 문제들을 풀어내는 과정은 결국 내 안에 있다는 사실만 확인할 지도 모르지만 문제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청년백수와 그 애인 그리고 놀이터에서 만난 민호와 부코스키는 모두 제 자리에서 그만큼의 무게를 짐 지고 있다.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은 소설가의 몫이 아니라 현실에서 우리들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무엇인가 쫓고 있다면, 아니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면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봐야한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오늘은 안심이다. 부코스키도 별 일 없이 가게를 지키고 앉았을 테니까 말이다.


090314-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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