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눈은 두 개다. 한쪽 눈을 감아보면 다른 한 쪽 눈의 중요성을 금방 알게 된다. 시야가 좁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거리 측정이 잘 안 된다. 정확하게 사물의 윤곽을 유추하기도 힘들뿐더러 입체적인 느낌이 사라지고 평면으로 보이기도 한다. 가끔 윙크하듯 한쪽 눈을 번갈아 감고 두리번거리는 장난을 한다. 그러고 나면 두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두 개의 눈은 건강하지 못하다. 그것을 진보와 보수라고 부르기도 하고 좌익과 우익이라고도 한다. 새는 한 쪽 날개만으로 날지 못하니 좌익과 우익이 균형을 이루고 서로 견제하며 문제점을 보완하고 서로 경쟁한다면 가장 이상적인 사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거리가 멀다. 진흙탕에서 뒹구는 개처럼 서로 물어뜯고 죽도록 싸우며 공멸의 길을 걷는다. 양비론과 양시론을 주장하는 것처럼 나쁜 평가도 없지만 그렇다고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마음도 없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이념과 무관하게 작은 행복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상식과 행복이라는 것도 기준이 다르고 방법이 천차만별이다. 부자의 이기주의와 가진 자의 욕망은 절제되지 않는다. 없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권력과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만들어간다. 과연 그것이 지속 가능한 행복을 약속해 줄 것인가? 역사는 그렇게 진화하고 발전해 왔다고 믿는 것일까? 세상을 통찰할 수 있는 눈과 타인을 배려하고 ‘더불어 함께’ 걷는 길을 택하는 것은 개인의 인성으로만 돌릴 문제가 아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바라지도 않는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돌아보고 근대화 과정을 되짚어보면 높은 사회적 신분을 획득했거나 많은 돈을 축적한 사람들을 정당한 노력과 땀의 결과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끊임없는 생존 경쟁과 승자 독식의 잔인한 현실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보다는 승리자가 되기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이 동원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체로 돈이 많은 경우 승리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경우는 그 정도가 상식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인과 관계도 없고 합리적인 생각도 아닌 그들만의 요구와 이기적 욕망들이 정책을 결정하고 사회를 디자인하고 있다. 기존의 외국어 고등학교나 과학고는 물론이고 자립형 사립고등학교의 확대 실시는 무엇을 말하는가. 심지어 국제중학교의 신설은 평준화의 문제점을 보완하겠다는 선의를 말하기조차 부끄럽다. 3불 정책의 근간을 뒤흔들던 바람몰이가 조금 잠잠해진 듯 하지만 그들만의 리그는 계속된다. 쉰이 조금 넘은 나이에 자선사업에 올인하며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직을 은퇴하는 빌 게이츠, 전재산의 85%에 달하는 수선 수십조에 이르는 재산을 빌게이츠 재단에 기부하는 워렌 버핏을 우리는 길러낼 수 없는가. 상속세 감세안에 진심으로 반대하는 그들을 보며 최소한 그 정도 폼나는 부자를 우리 사회는 길러낼 수 없냐고 우리 교육에게 묻는다.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이준구는 왜 사회비평을 시작했을까? <쿠오 바디스 한국 경제>를 읽으며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경제학자의 사회비평은 넓이과 깊이 면에서 색다르지도 않고 새롭지도 않다. 문장과 비유가 탁월한 설득력을 발휘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의 사회적 위치가 이미 하나의 메시지다. 그가 이명박 정부를 비판한다면 무언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기 쉽다. 그것이 바로 지식인의 책무이다. 사회적 발언이 가져올 파장과 의미를 고려하여 상식에 부합하고 미래를 위한 제언들이 필요하다.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사회비평의 붓을 들다’는 프롤로그를 읽기 시작했다. 흡인력 있는 문장도 아니고 기막힌 비유나 감각적인 표현도 없지만 이준구의 사회비평은 학자다운 면모를 고루 갖추고 있다. 우선 차분하고 냉정한 사유 방식이다. 흥분해서 외치는 비명은 옳은 말이라도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관련 분야의 정책이나 사회 현상을 설명할 때 상식을 넘지 않는 분석과 비판의 날을 세운다. 스스로는 과격하다고 표현했지만 난장에 가까운 싸움판에서 보자면 양반의 말투다. 깊은 학문적 토대나 이론적 잣대를 들이밀지 않아도 사람들은 상식을 이야기하면 쉽게 알아듣는다. 이준구의 한국 경제를 위한 제언들은 그래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대운하로 촉발된 토목공화국 논란은 이미 우석훈에 의해서 신랄하게 비판 과정을 거쳤다. 좌우를 넘어 건강하고 행복한 대한민국을 위해 우리 사회가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할지 고민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필독서로 꼽아주고 싶다. 주택시장 문제와 종부세에 관한 오해와 진실은 슬픔에 가깝다. 언론이라고 볼 수도 없는 조중동의 거짓말과 위선은 안타깝기까지 하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연민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진짜 ‘아마추어’ 정부의 모든 면을 보여주는 이명박 정부에는 영혼이 없다. 교육과 시장 모두 실패한다면 그들에 대한 평가의 가혹함을 넘어 우리 사회의 미래가 암울해진다. 복지부동하고 정권의 눈치를 보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둘 목소리를 낼 준비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 서울대 교수들의 ‘민주주의 후퇴’ 시국선언 준비 뉴스는 우리 사회의 상식이 살아있음을 반증한다. 이 책을 통해 이준구 교수가 말하고 싶었던 것도 거창한 경제 이론이나 국민들을 위한 학문의 대중화가 아니다. 건강한 상식을 가지고 보다 많은 국민들을 위한 사회로 나아가야 할 대한민국의 지표에 관한 이야기다. 도대체 한국 경제는 어디로 가고 있단 말인가.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잘못된 길에 들어선 한국 경제에 대한 애정 어린 충고이자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미래 사회에 대한 고민이다. 090602-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