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내용과 형식은 분리할 수 없다.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인다. 생물로 비유하자면 뼈와 살을 분리해서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비유와 유추의 속성은 ‘유사성’에 있기 때문에 동일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소설도 마찬가지다. 내용과 형식의 유기적 관계에 대해서는 부연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소설을 읽다보면 어느 한 쪽이 도드라지는 경우를 만나게 된다. 니콜 클라우스의 <사랑의 역사>가 그런 경우다. 미국의 주목받는 작가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흥미를 불러일으키지만, 장편의 분량에 비해 긴장감이나 극적인 재미는 부족하다. 개인적인 취향일 수 있겠지만 형식에 치중할 경우 내용은 진부하다. 창의력과 상상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품의 깊이는 기발한 상상력과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깊이와 넓이를 더할 수 없다면 노력해야 한다. 그 노력이 재기 발랄한 재치와 빠른 두뇌회전에 의존한다고 해서 해결되지는 않는다. 수많은 ‘사랑’ 속에서 한 작가의 ‘사랑’이 의미를 지니려면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거나 특별한 안타까움, 기막힌 우연 등 여러 가지 요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 소설은 마치 직육면체 입체 퍼즐을 맞춰나가는 느낌이다. 영화적 상상력이 이 소설의 독특함을 나타내는 적절한 표현이다. 소설과 영화의 형식이 다르듯 상상력과 표현도 달라진다. 각각의 장점을 잘 살려내야 한다. 물론 다른 장르의 표현법을 빌려와 성공을 거둔다면 더없이 좋은 새로움을 얻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장 뤽 고다르의 <아워뮤직>을 보면 영화 형식과 인간의 폭력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진지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우리들의 음악은 과연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소리인지 악몽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화면에 펼쳐지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잔혹한 전쟁장면의 이미지들을 소설은 흉내내지 못한다. 파편화된 개별적 이미지들의 편집과 완성된 그림을 향한 조각 퍼즐들의 역할은 훌륭한 지적 유희가 된다. 하지만 그 특별한 재미를 위해 뻔한 ‘사랑’이야기를 소재로 사용한 것은 많이 아쉽다. 추리 소설 형식을 취하고 색다른 이야기를 이런 형식에 담아 냈다면 정말 재밌는 소설이 되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섬세한 감성의 세계를 다루어야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입장에서 내밀한 고백과 관찰을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과 대상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작가의 노력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방식이라면 <라 빠르망>같은 영화 한편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이 소설은 현실과 소설의 경계를 넘나든다. 현존했던 유태인 작가 ‘브루노’가 등장하기도 하고 소설 속의 소설과 소설 속의 현실이 뒤섞이며 실제 현실과 조우하기도 한다. 마치 세상의 모든 존재가 ‘사랑의 역사’라는 한 권의 책을 매개로 매트릭스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네트워크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각 장마다 다른 주인공의 시점으로 서술되기 때문에 한 권의 소설을 통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재미가 있지만 자칫 다른 생각을 하거나 실마리를 놓쳐 버리면 처음부터 다시 봐야하는 영화처럼 사건과 인물들이 금세 엉켜버린다. 독자들의 긴장과 작가의 복선들이 적절하게 만날 수 있다면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 되겠지만 실패하면 짜증나는 소설이 된다. 독자의 책임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를 읽어달라는 주문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소설이다. 밑줄 그을 문장 하나도 건지지 못하는 소설이 내게는 별 의미가 없다. 재미나 감동,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 주기도 힘들다. 다만 잘 짜여진 미스터리 영화를 보는 즐거움은 있다. 그렇다면 소설이 아니라 영화를 선택해야 한다. 이 모든 요소들이 적절히 배합된 종합선물세트 같은 소설을 내가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만 그런가? 060920-105
경찰청장의 아들이 마트에서 사라졌다. 배꼽에 악어 모양의 문신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모든 아이들의 배를 까볼 수는 없다. 사라진 아이 때문에 전국에는 미아 찾기 열풍이 불고 아이의 부모들은 미아 방지를 위해 아이 몸에 문신을 새겨 준다. 안보윤의 <악어떼가 나왔다>는 이렇게 코믹한 시트콤처럼 시작된다. 악어 문신은 사실 배꼽 옆에 난 점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 아이를 기점으로 순환적 알레고리가 형성되는 중편소설 <악어떼가 나왔다>는 10회 문학동네 작가상 수상작이다. 스물 다섯의 여성인 작가 안보윤의 ‘가능성’을 보고 선정했다는 성민엽의 말을 듣고 보니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소설의 완성도보다 가능성을 보고 읽어 내는 것은 평론가의 몫이지 독자들이 감당할 몫은 아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소설은 일단 재미있고 감동적이거나 정수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쏟아 부어줄 정도는 되어야 한다. 안보윤의 소설은 미지근한 물에 발을 담근 느낌이다. 코믹잔혹극이라는 장르가 존재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럴듯한 표현이라서 인용한다면 적절하게 어울릴만한 소설이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은 전통적인 미의식의 반영이다. 그 전통을 고전문학에서 찾을 필요도 없지만 오래동안 우리에게 큰 즐거움은 웃음을 통한 카타르시스였다. 후련한 배설과 같은 감정의 정화 작용은 소설의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는 아이들에 대한 과잉 보호, 미아에 대한 사회적 관심, 외모 지상주의, 자살과 살인에 대한 추억 등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되면서 혼란스럽기도 하다. 중편 소설의 분량에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얽히다 보니 간결하고 깔끔한 맛은 없다. 하지만 잔혹한 살인 장면과 일상의 필연성을 뛰어넘는 도약적 상상력은 이 소설의 가장 큰 재미이다. 빠른 속도로 사건을 진행시키다가 인물의 심리를 간접적으로 서술하는 장면에서는 작가의 의도인지 미숙함인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이후의 작품들을 통해 그녀를 판단해 볼 일이다. 영화 <조용한 가족>이 주는 재미와 긴장을 비교한다면 적절할 것 같다. 비일상적이고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문제가 현실에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것을 소설과 비교해서 소설같은 현실이라고 말하거나 현실같은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소설은 이미 나름의 영역을 구축해야 한다. 특정한 분야나 역할을 한정시키는 일이 아니라 활자 책의 종언을 예고하는 시대에 더구나 소설이라는 장르가 가진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만한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영화와 소설의 장르를 동종교배한다고 해서 슈퍼맨이 탄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은 특집극 분량 정도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어 영화가 아니어도 영상물로 읽힌다. 다소 긴장과 극적인 재미가 떨어진다. 옴니버스식의 몇 가지 이야기들이 꼬리를 무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악어떼’가 말하는 진한 감동이나 충격은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 한강에서 무더기로 떠오르는 익사체가 ‘악어떼’인 것 같지만 현실에서 ‘악어’가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이 실감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꿈과 환상의 세계로 안내하는 마술적 리얼리즘과도 거리가 멀다. 새롭고 낯선 것을 나와야지 신인은 아니다. ‘가능성’만 믿고 나올 수도 없다. 나이가 무기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박민규의 쓰잘데 없는 인터뷰도 작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아직은 그녀의 보다 많은 작품들을 통해 독자들이 그녀를 알아가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문학의 위기(?)라고 불리워졌던 수많은 시대에 등장했던 작가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즐거운(?) 소설들을 독자에게 선보일 수 있는 작가가 되길 바란다. 독자가 기다리는 작가가 될 것인가의 여부는 그녀의 다음 작품이 말해줄 것이다. 060921-106
갑자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들렸다폭설의 밭 속에서 살고 있는 것들!백설을 뻗치고 올라가는 푸른 청보리들!폭설의 밭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들!시퍼런 마늘과 꿈틀대는 양파들!다른 색은 말고 그런 색들!다른 말은 말고 그런 소리들!하루를 살더라도 그렇게사흘이나 나흘을 살더라도 그렇게!<왼손을 위한 협주곡>으로 김승희를 처음 만났을 때 ‘언어의 테러리스트’라는 과격한 수식어에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오랜만에 다시 접한 그녀의 시는 많이 다르다. 시간의 무게도 세계관의 변화로도 설명할 수 없는 변화다. 시야가 넓어지고 생각이 깊어지는 것은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변화가 발전과 진화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변에서 너무 흔하게 발견한다. 표현과 상상력이 무뎌지지 않았다.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시인의 영혼과 만나는 일은 즐겁기만하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시인들에게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 중에 하나가 ‘사소함’의 발견이다.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 속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발견은 새로운 깨달음과 통찰이라기보다는 인식의 힘이다. 생명에 대한 관찰과 자연 속에서 발견되는 삶에 대한 단순한 성찰이 보편성을 획득한다. 누구나 나이 들어 그런 눈과 귀를 갖게 되는 것인지는 더 살아봐야겠다. 그것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신이 감춰둔 사랑심장은 하루종일 일을 한다고 한다심장이 하루 뛰는 것이10만 8천 6백 39번이라고 한다내뿜는 피는 하루 몇천만 톤이나 되는지 모른다고 한다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가 1억 4천 9백 6십만km인데하루 혈액이 뛰는 거리가2억 7천 31만 2천km라고 한다지구에서 태양까지 두 번 갔다올 거리만큼당신의 혈액이 오늘 하루에 뛰고 있는 것이다바로 너, 너, 너! 그대그렇게 당신은 파도를 뿜는다그렇게 당신은 꺼졌다 살아난다그렇게 당신은 달빛 아래 둥근 꽃봉오리의 속삭임이다은환의 질주다그대가 하는 일에 나도 참가하게 해다오이 사업은 하느님과의 동업이다그 속에서 나는 사랑을 발견하겠다김승희가 가져왔던 여성에 대한 관찰과 관심도 여전하다. 생활과 정치는 분리될 수 없다. 페미니즘이나 휴머니즘 같은 ism으로 거칠게 분류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시에는 뛰어난 상상력을 토대로 삶에 대한 지독한 사랑이 오롯이 솟아오른다.한 가지 목에 걸리는 것은 신과 사랑의 문제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신과 사랑의 문제는 안일한 태도로 귀결되기 쉽다. 포근하고 따뜻한 신의 품에 안길 준비가 되어 있는 시인은 반쯤 눈을 가린 난독증 환자처럼 세상을 잘 못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법 아래서가시오서시오대기하시오일단 멈춤우회직진비보호 좌회전U턴U턴 금지口 속에서 사는 囚口 속에서 쉬는 숨계몽적 차원의 현실 비판은 독자들을 피곤하게 한다. 그러나 ‘口 속에서 사는 囚’는 언어의 형태와 의미를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한다. 부분으로 전체를 통찰하는 것은 어렵지만 참신한 상상력이 주는 힘은 무한하다. 현실에 대한 재해석은 새로운 상상력과 결합되어 시가 가지는 힘을 보여주는 듯하다. 고정희, 최승자, 김혜순 등 ‘여류’라는 편협한 시각과 한계를 지워버린 시인들의 시는 깊이와 넓이를 더해가리라 믿는다. 060922-107
철학에 대한 수많은 질문들이 쏟아져도 우리가 쉽게 답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철학은 실용적인 학문이어야 한다. 실생활에서 부딪히는 문제 상황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삶의 목적과 가치를 생각해 보는 관념론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부딪히는 질문들에 대해 안내자와 길잡이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부단한 훈련과 노력은 개인의 몫으로 돌리더라도 생각하는 방식과 세상과 삶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들은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 어렵지도 않고 비현실적이도 않은 철학은 불가능한가? 김용옥의 <논술과 철학강의 2>는 1권 논술편에 이어 ‘철학강의’로 구성되어 있다. 발에는 오른발과 왼발이 있지만 신발에는 없다. 왜 오른쪽과 왼쪽 신을 구분해서 신어야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도올의 어린 시절은 암담했다.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던 것들에 대한 관찰과 생각으로부터 철학은 시작된다. 철학은 보편을 지향하지만 절대를 말하지는 않는다. 상식에 대한 반론으로 시작된 철학의 길은 정치와 종교에 대한 당연한 질문으로 연결된다. 철학으로 가는 길은 쉽고 간단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렵고 복잡해서 현실과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도올은 말한다. 철학은 서양언어에서 비롯된 ‘지혜의 사랑’도 아니고 일본식 한자어인 ‘밝은 배움’도 아니다. 철학은 정의 자체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철학을 정의하는 사람의 관심의 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가치를 내세우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지식도 아닌 철학을 우리는 왜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 들려주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중고생을 위한 논술과 철학을 위한 강의록이라는 명분으로 쓰여졌지만 누구나 한번쯤 스스로 ‘돌대가리’라고 선언하는 도올의 철학 이야기에 귀기울여 볼만하다. 근엄한 제목과 들어본적도 없는 용어들 사이에서 좌절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철학의 길을 제시해 준다. 우리의 삶이 텍스트이고 세상이 콘텍스트일 때 철학은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모든 가능성을 전제로 한 무전제의 전제가 철학이라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우상과 편견들을 깨뜨리는 일이 철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내 마음의 우상을 깨뜨리고 개방적인 시선과 비판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서 철학은 시작된다. 그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당연하고도 다양한 전제 중의 하나이다. 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고 말한 화이트 헤드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현실과 이상을 분리해서 인식할 때 철학은 우주 밖으로 멀어진다. 존재하지도 않는 ‘이데아’에 대한 탐구와 믿음은 현실과 유리된 철학을 낳았다. 동양의 장자가 이야기한 우물한 개구리는 소견이 좁을 뿐 분리되어 있지는 않다. 큰 흐름속에 작은 흐름을 포함시켜 관견管見을 이야기할 뿐이다. 대롱으로 하늘을 보는 개구리도 결국 현실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도올의 관점과 방식이 정답일 순 없다. 그가 이미 밝히고 있듯이 철학에는 절대가 없으므로. 이 책은 동서양의 철학의 차이를 통해 동양 철학의 우월성을 밝히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책은 아니다. ‘철학은 문화사’라고 말할 정도로 문화적 토양과 삶의 방식에 뿌리를 둔 철학을 맹목적으로 따를 이유가 없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 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언어의 차이와 생각의 차이를 낳고 결국 철학적 사유를 결정 짓는다. 우리가 발붙히고 살고 있는 이 땅에서 필요한 철학은 지금, 여기, 그리고 우리들의 삶을 이야기 해야 한다. 철학은 인간학이 되어야 한다는 도올의 말이 철학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방식중 하나라고 하더라도 공감할 수 있는 많은 부분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 도올이 보여준 삶의 이력들과 그가 말해온 많은 이야기들을 배경으로 읽는다면 도올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만한 책이다. 글은 곧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이해하고 편견없이 그 사람의 생각을 들어보는 일은 독자가 판단할 일이지만 도올을 지우고 그의 주장만을 놓고 보더라도 크게 실망할 만한 책은 아니다. 다만 이 책을 ‘대학 입시를 위한 논술과 철학강의’로 읽는다면 조금 거리가 멀다. 실전과는 다소 거리가 있겠지만 결국 우리가 지향해야할 논술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뚜렷한 자신의 목소리와 나름의 독특한 해석으로 철학과 세상을 읽어내는 도올의 목소리는 내게 신선한 울림을 준다. 서양 철학자 하나를 붙잡고 목숨거는 철학 교수보다 그를 비교 우위에 두는 이유는 교수가 아니라 철학자라는 이름으로 이 책에서 보여주는 생각 때문이다. 도올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를 떠나 그의 주장이 언제나 비판과 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도 지나친 확신과 소신에서 비롯된 뚜렷한 신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독선이나 아집과는 거리가 멀다. 철학에 대한 수많은 생각과 방법들 중의 하나로 도올의 말에 귀기울여 보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060925-108
서른여섯을 넘긴 다음부터거을 앞에 서지 않는다 거울에 비친 내가내게 무슨 말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혹은 내가 거울에 비친 내게 무슨 말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서른여섯 거울 속의 나는 죽고텅 빈 거울 속에 더 이상 나는 비치지 않고거울 속 어두운 물 저편으로 흘러가나는 흑사병이 도는 폐허의 도시에 도착한다 - ‘베니스에서 죽다’ 중에서인간에게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재산이다. 소중한 이유는 선악, 오호의 감정을 넘어서 한 사람에게 인생은 단 한 번 밖에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직접 경험이든 간접 경험이든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의 마디 마디가 모여 우리의 전 생애를 이루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든 그것이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고 쌓여온 세월이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만든 것이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뒤로 한 채 하늘을 올려다 보아야 바뀌는 것은 크지 않다. 모든 경험은 자신의 세계에서 비롯되지만 ‘용기’만으로 인생이 뒤바뀌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윤동주의 ‘파란 녹이 낀 청동거울’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은 너무 많다. 눈을 뜨는 순간 만나는 모든 것들이 바로 거울이고 내 얼굴의 다른 모습들이다. 갇힌 공간과 좁은 현실에서 부딪히는 모든 것들이 부정할 수 없는 나의 자화상이다. 모든 사람들은 사물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꺼린다. 선택적 기억과 자신에 대한 안일한 태도, 미래에 대한 쓸데 없는 희망으로 치장한다. 계산된 위장과 가식이 아니라 눈감고 싶은 현실과 특별할 것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남진우의 시집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는 이런 현실에서 일탈한다. 쉽게 일탈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는 꿈꾼다. 영원히 우리의 일부이면서 ‘타자’로 인식하는 죽음까지도.그 대상들이 사자와 악어 같은 짐승이다가 낯선 장소이다가 비가 내리는 기후이기도 하다. 낯선 세계를 꿈꾸는 자는 현실에 부유하는 의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길들여진 습관은 쉽게 벗어나기 힘들다. 지금-여기에 단단히 뿌리박지 못한 꿈은 유토피아를 꿈꾼다. 없는 곳을 꿈꾸는 자의 절망은 쉽게 드러나지 않고 현실과 환상 사이를 오간다. 남진우의 시는 그렇게 마술 같은 현실을 반영하는 만화경이다. 프리즘처럼 환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방 연속 무늬를 반복하는 만화경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보여준다. 내게는 그렇다.얼마나 먼 길을 걸어 빗소리는내 곁에 찾아온 것인지깊은 밤 잠 깨어 내 머리맡 적시는 빗소리를 듣는다 비를 맞지 않아도 이미 빗소리만으로 나는 축축히 젖어잠자리 위를 아득히 떠내려가고연못가 흰옷 입은 여인들 버드나무 아래 울고 있다그 울음 다 그치기 전 이 비는 또 누구를 깨우기 위해먼 길 떠나는 것인지가고 또 가버려도 빗소리는 남아서 내 머리맡을 적시고 있다 - ‘오래된 정원’ 중에서누구에게나 비에 대한 기억은 있다. 오래된 정원에서 들리는 빗소리가 특별하진 않다. 세상 자체가 오래된 정원이다. 이 세상에 내리는 모든 비는 누군가를 찾아간다. 먼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는 주관적 판단과 인식이 독자와 공감할 때 시는 의미가 있다. 세상과 소통하는 모든 방식은 이기적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객관과 이성과 합리를 가장한 모든 주과적이고 개인적인 방식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혼란을 가져온다. 때때로 차갑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시인의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막 꿈에서 깨어난 듯한 나른함이 묻어난다.여기가 어디인가, 새벽 세시에 목마른 사자 한 마리가 방 문 앞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 방문을 열자 사자의 꼬리만 슬쩍 비친다. 그가 기다린 것은 과연 사자일까. 동화적 상상력을 넘어선 자리에 대입할 수 있는 주관적 대상은 모두 독자의 몫으로 파악해야만 하는 막막함! 독서독이 묻은 페이지를 넘긴다나를 암살하기 위해 누군가 발라놓은 독을 침과 함께 나는 삼킨다독 묻은 책을 읽는 것은 독에 잠겨 서서히 익사해가는 일피 속에 움트는 날카로운 외침에 귀 기울이며다시 페이지를 넘긴다그 어느 시인도 독으로 일생을 살진 못했다그가 남긴 독이 책에서 책으로 돌고 돌다어느 한가로운 일요일 아침책을 펼쳐든 나를 깨문다서서히 독에 마비되어가는 몸을 젖히고나는 책 속을 빠져나가는 독사 한 마리를 본다무릇 모든 독서란독사 한 마리씩 길들이는 일이니이 시집의 마지막을 ‘독서’가 차置構?있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이후 특별할 것 없는 그의 시들은 여전히 낯선 감각 속에 살아 있다. 독서는 책을 읽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을 읽고 나를 읽는 것이다. 물론 ‘너’를 읽기 위한 모든 독서는 ‘너’를 길들이기 위한 행위이다. 독사와 독서의 유사성은 치명적인 ‘독’에 대한 해석이다. 읽는 행위가 독이 된다는 전제는 그 대상이 책이든 세상이든 사람이든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시인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반복되는 일상 속의 치명적 ‘독’은 아닐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중독성은 뿌리칠 수 없는 강렬한 유혹만큼 치명적이다.06101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