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는 둥둥 창비시선 265
김승희 지음 / 창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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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들렸다

폭설의 밭 속에서 살고 있는 것들!
백설을 뻗치고 올라가는 푸른 청보리들!
폭설의 밭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들!
시퍼런 마늘과 꿈틀대는 양파들!
다른 색은 말고 그런 색들!
다른 말은 말고 그런 소리들!

하루를 살더라도 그렇게
사흘이나 나흘을 살더라도 그렇게!

<왼손을 위한 협주곡>으로 김승희를 처음 만났을 때 ‘언어의 테러리스트’라는 과격한 수식어에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오랜만에 다시 접한 그녀의 시는 많이 다르다. 시간의 무게도 세계관의 변화로도 설명할 수 없는 변화다. 시야가 넓어지고 생각이 깊어지는 것은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변화가 발전과 진화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변에서 너무 흔하게 발견한다. 표현과 상상력이 무뎌지지 않았다.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시인의 영혼과 만나는 일은 즐겁기만하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시인들에게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 중에 하나가 ‘사소함’의 발견이다.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 속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발견은 새로운 깨달음과 통찰이라기보다는 인식의 힘이다. 생명에 대한 관찰과 자연 속에서 발견되는 삶에 대한 단순한 성찰이 보편성을 획득한다. 누구나 나이 들어 그런 눈과 귀를 갖게 되는 것인지는 더 살아봐야겠다. 그것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이 감춰둔 사랑

심장은 하루종일 일을 한다고 한다
심장이 하루 뛰는 것이
10만 8천 6백 39번이라고 한다
내뿜는 피는 하루 몇천만 톤이나 되는지 모른다고 한다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가 1억 4천 9백 6십만km인데
하루 혈액이 뛰는 거리가
2억 7천 31만 2천km라고 한다
지구에서 태양까지 두 번 갔다올 거리만큼
당신의 혈액이 오늘 하루에 뛰고 있는 것이다
바로 너, 너, 너! 그대

그렇게 당신은 파도를 뿜는다
그렇게 당신은 꺼졌다 살아난다
그렇게 당신은 달빛 아래 둥근 꽃봉오리의 속삭임이다
은환의 질주다

그대가 하는 일에 나도 참가하게 해다오
이 사업은 하느님과의 동업이다
그 속에서 나는 사랑을 발견하겠다

김승희가 가져왔던 여성에 대한 관찰과 관심도 여전하다. 생활과 정치는 분리될 수 없다. 페미니즘이나 휴머니즘 같은 ism으로 거칠게 분류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시에는 뛰어난 상상력을 토대로 삶에 대한 지독한 사랑이 오롯이 솟아오른다.

한 가지 목에 걸리는 것은 신과 사랑의 문제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신과 사랑의 문제는 안일한 태도로 귀결되기 쉽다. 포근하고 따뜻한 신의 품에 안길 준비가 되어 있는 시인은 반쯤 눈을 가린 난독증 환자처럼 세상을 잘 못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법 아래서

가시오
서시오
대기하시오
일단 멈춤
우회
직진
비보호 좌회전
U턴
U턴 금지

口 속에서 사는 囚
口 속에서 쉬는 숨

계몽적 차원의 현실 비판은 독자들을 피곤하게 한다. 그러나 ‘口 속에서 사는 囚’는 언어의 형태와 의미를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한다. 부분으로 전체를 통찰하는 것은 어렵지만 참신한 상상력이 주는 힘은 무한하다. 현실에 대한 재해석은 새로운 상상력과 결합되어 시가 가지는 힘을 보여주는 듯하다. 고정희, 최승자, 김혜순 등 ‘여류’라는 편협한 시각과 한계를 지워버린 시인들의 시는 깊이와 넓이를 더해가리라 믿는다.


06092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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