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한은경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의 내용과 형식은 분리할 수 없다.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인다. 생물로 비유하자면 뼈와 살을 분리해서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비유와 유추의 속성은 ‘유사성’에 있기 때문에 동일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소설도 마찬가지다. 내용과 형식의 유기적 관계에 대해서는 부연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소설을 읽다보면 어느 한 쪽이 도드라지는 경우를 만나게 된다.
니콜 클라우스의 <사랑의 역사>가 그런 경우다.

미국의 주목받는 작가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흥미를 불러일으키지만, 장편의 분량에 비해 긴장감이나 극적인 재미는 부족하다. 개인적인 취향일 수 있겠지만 형식에 치중할 경우 내용은 진부하다. 창의력과 상상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품의 깊이는 기발한 상상력과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깊이와 넓이를 더할 수 없다면 노력해야 한다. 그 노력이 재기 발랄한 재치와 빠른 두뇌회전에 의존한다고 해서 해결되지는 않는다.

수많은 ‘사랑’ 속에서 한 작가의 ‘사랑’이 의미를 지니려면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거나 특별한 안타까움, 기막힌 우연 등 여러 가지 요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 소설은 마치 직육면체 입체 퍼즐을 맞춰나가는 느낌이다. 영화적 상상력이 이 소설의 독특함을 나타내는 적절한 표현이다. 소설과 영화의 형식이 다르듯 상상력과 표현도 달라진다. 각각의 장점을 잘 살려내야 한다. 물론 다른 장르의 표현법을 빌려와 성공을 거둔다면 더없이 좋은 새로움을 얻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장 뤽 고다르의 <아워뮤직>을 보면 영화 형식과 인간의 폭력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진지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우리들의 음악은 과연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소리인지 악몽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화면에 펼쳐지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잔혹한 전쟁장면의 이미지들을 소설은 흉내내지 못한다. 파편화된 개별적 이미지들의 편집과 완성된 그림을 향한 조각 퍼즐들의 역할은 훌륭한 지적 유희가 된다. 하지만 그 특별한 재미를 위해 뻔한 ‘사랑’이야기를 소재로 사용한 것은 많이 아쉽다.

추리 소설 형식을 취하고 색다른 이야기를 이런 형식에 담아 냈다면 정말 재밌는 소설이 되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섬세한 감성의 세계를 다루어야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입장에서 내밀한 고백과 관찰을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과 대상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작가의 노력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방식이라면 <라 빠르망>같은 영화 한편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이 소설은 현실과 소설의 경계를 넘나든다. 현존했던 유태인 작가 ‘브루노’가 등장하기도 하고 소설 속의 소설과 소설 속의 현실이 뒤섞이며 실제 현실과 조우하기도 한다. 마치 세상의 모든 존재가 ‘사랑의 역사’라는 한 권의 책을 매개로 매트릭스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네트워크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각 장마다 다른 주인공의 시점으로 서술되기 때문에 한 권의 소설을 통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재미가 있지만 자칫 다른 생각을 하거나 실마리를 놓쳐 버리면 처음부터 다시 봐야하는 영화처럼 사건과 인물들이 금세 엉켜버린다. 독자들의 긴장과 작가의 복선들이 적절하게 만날 수 있다면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 되겠지만 실패하면 짜증나는 소설이 된다. 독자의 책임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를 읽어달라는 주문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소설이다.

밑줄 그을 문장 하나도 건지지 못하는 소설이 내게는 별 의미가 없다. 재미나 감동,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 주기도 힘들다. 다만 잘 짜여진 미스터리 영화를 보는 즐거움은 있다. 그렇다면 소설이 아니라 영화를 선택해야 한다. 이 모든 요소들이 적절히 배합된 종합선물세트 같은 소설을 내가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만 그런가?


06092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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