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착각 - 뇌는 어떻게 인간의 정체성을 발명하는가
그레고리 번스 지음, 홍우진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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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함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안목과 신체적 능력을 표현한다. 보통 사람에게 발견할 수 없는 예민함과 날카로움 혹은 지적 상상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철학은 이제 뇌과학이나 신경과학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한 걸까. 주체성, 자유의지, 자아의 문제까지 다양한 주제가 ‘과학’의 영역과 중첩된다. 인공지능이나 챗GPT에게 내줄 수 없는 고유한 인간의 영토가 점점 줄어든다면 최후의 순간까지 ‘나’를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 ‘나’는 무엇일까.

스스로 생각하고 분석하며 자아라고 믿는 대상이 망상에 불과하다는 도발적인 발언은 심리학자, 신경과학자, 정신과 의사인 저자의 탁월한 분석일까. ‘나’는 과거의 서사에 바탕을 둔 기억의 집합일 뿐이다. 그것도 수많은 사건 중에서 특정 부분을 편집하고 맥락을 이어 붙인 ‘나에 대한 편집된 이야기’. 그러면 끊임없이 현재를 살며 이야기를 만들고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상황에 대처하고 일상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나’는 누구일까. 연속선상에서 과거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추론은 가능하지만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같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순간도 시간 위에 머물지 않으며 변화, 발전, 성장하거나 후퇴하고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유동하는 자아에 대한 확신은 용감한 오해가 아닐까.

내가 너를 잘 안다는 착각보다 내가 나를 잘 안다는 믿음이 더 위험해 보인다. 기억나지 않는 장면이나 모호한 기억 속에서 내가 그랬을 리 없다는 확신,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다른 존재라는 주장, 그보다 너는 너를 잘 몰라도 오래 너를 지켜본 내가 너를 잘 안다는 생각들이 모두 ‘망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의 이면을 들여다보라. 자아가 뇌의 발명품이라면 믿음과 확신은 사전적 의미가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닐까.

수만은 다중인격에 관한 드라마와 영화들이 떠올랐다. 서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한다면 편집된 자아에 불과한 나는 누구일까. 진화는 개인주의를 싫어하기 때문에 나의 선택이라는 착각이 만들어진다. 만들어진 ‘신’을 주장하는 리처드 도킨스보다 만들어진 ‘나’를 주장하는 그레고리 번스의 주장이 낯설다. 하지만 이 주장의 이면에는 ‘내가 원하는 나’와 ‘내가 믿는 나’ 사이의 간극에 대한 고민이 놓여 있다. 우리가 가진 몸은 분명한 실체가 있으나 그 안에 깃든 자아는 불안정하며 다양한 면을 갖는다. 자아 정체성이라는 개념이 뇌가 만들어낸 허구라면 ‘나’라고 말할 수 있는 무엇은 실체가 없다. 무수히 많은 자아가 내 안에 숨어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라고 노래하던 가수의 노랫말이 떠올랐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나’ 하나로 규정할 수 있는 ‘나’는 착각과 망상에 불과하다면 진짜 나의 모습을 찾으려는 노력보다 지금, 이 순간에 나에 집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무엇을 선택하든 그 결과의 총량이 각자의 인생이다.

결국 이러한 노력은 후회를 줄이고 변화를 지향하며 미래를 준비하기 위함이다. 저자가 안내하는 우리의 마음, 생각, 뇌의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는 강박과 불안, 후회와 갈등에서 조금 자유롭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했다. 정답 없는 문제집을 푼 적이 없는 학창 시절을 거치고 세상에 나가면 단 하나의 정답도 찾을 수 없는 순간들, 그 결과를 책임져야 하는 선택지들이 만기가 도래한 어음처럼 우리를 기다린다. 내가 해봐서 안다는 충고도 도움이 되지 않고, 고전과 철학에게 물어도 답이 없으니 현대인의 혼란과 번뇌는 계속된다. 각자 정답을 외치는 세상에서 목소리 큰 사람이나 쉽고 빠른 비법을 파는 사람에게 속기도 쉽다. 자연과학이나 예술 분야의 책이 진정한 자기계발서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건 뇌가 착각한 ‘나’처럼 인생의 의미나 성공한 삶에 대한 망상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책은 책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현실로 고개를 돌리면 또 다시 책 속에서 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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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계급론 - 비과시적 소비의 부상과 새로운 계급의 탄생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 지음, 유강은 옮김 / 오월의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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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대한민국의 교수와 경제관료들은 토마 피케티나 장하준 등 유럽 경제학자들의 이론과 주장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듯하다. 폴 크루그먼 등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유력한 경제학자들의 주장과 이론을 인용하거나 정책에 반영한 사례도 듣지 못했다. 대개 하이에크와 프리드먼 등 시카고 학파의 경제 이론이 ‘그들’의 지적 토대를 이룬다. 자본주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비주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 계급론』이 여전히 영감을 주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건 슬픈 일이지만, 일레자베스 커리드핼킷은 ‘야망 계급론’으로 유한 계급론을 오마주한다.

물론 1899년 소스타인 베블런이 비판했던 유한계급은 엘리트 계급으로 바뀌었고 중간 계급이 두터워졌으나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과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규범에 대한 믿음이 오히려 또 다른 문제를 양산한다. 계급 재생산에 몰두한 ‘그들’을 저자는 물질적 소비보다 자신의 지위를 구별짓는 ‘야망계급’이라 명명한다. 야망계급의 소비 문화에 대한 비판은 날카롭다. 나름 피시한 사람들과 의식 있는 소비자로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경고는 뼈아프다. 이 책을 읽는 독자 중 상당수는 바로 자신의 이야기임을 직감할 터. 저자는 왜 야망계급의 소비 문화가 과거 유한계급의 소비문화보다 훨씬 더 유해한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을까.

새로운 야망계급은 소득수준이 아니라 문화수준으로 묶인다. 물질적 재화가 아니라 사회와 환경을 의식하는 가치관, 삶의 철학과 표지가 뚜렷한 교양과 문화자본으로 무장한 계급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경고는 타당한가. 저자의 분석은 야망계급의 구별 짓기가 아니라 ‘비과시적 소비’에 초점을 맞춘다. 육아, 교육, 의료 등 비가시적이고 암묵적인 소비는 상당한 정보와 돈이 없으면 모방하기 어렵다. 단순히 돈으로만 해결되지 않는 지식과 정보와 취향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과거 유한계급보다 은밀하고 심각한 계급 격차의 원인은 단순한 과시적 소비가 아니라 과시적 생산, 과시적 여가, 비과시적 소비에 있다. 이는 불평등은을 은폐하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단순한 경제적 격차가 아니라 문화적 격차를 포괄하는 삶의 태도 전반을 아우른다. 이를 선택할 수 없는 중간계층이나 자신의 지위 표지를 식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일상과 태도는 다소 모호하다. 미국 사회를 분석한 저자의 이야기가 한국 사회와 동떨어져 있지는 않으나 다양성보다는 대개 ‘소득’으로 수렴하며 거대한 욕망이 일방향으로 흐르는 우리와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속성과 본능은 베블런의 지적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100년이 훌쩍 넘는 간극에도 불구하고 사회 변동과 수정 자본주의가 계층과 계급의 ‘차이’를 바꾸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설국열차의 맨 앞칸과 꼬리 칸은 시간이 흘러도 바뀌지 않고 앞칸으로 이동하려는 욕망도 변하지 않기 때문일까. 야망계급이든 소비 계급이든 희망 계급이든 모호한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의 구별 짓기가 더 두려울 때가 많다. 지금 우리는 괜찮지 않다. 아니 어쩌면 괜찮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상상하며 꿈꾼 사회를 이룬 적이 없으나 여전히 멈추지 않고 꿈을 꿀 수밖에 없는 걸까. 저자의 명쾌한 분석도 ‘과거’와 ‘현재’일 뿐 ‘미래’를 전망하거나 대안을 제시하진 못한다. 아니, 그걸 한다고 해도 현실이 될 수는 없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다는 정도면 충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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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혁준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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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죄가 없습니까?” 그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K가 말했다.

자신의 모든 유고를 불태워달라는 카프카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던 막역한 친구 막스 브로트 탓에 우리는 카프카의 장편을 읽는 고역을 감내하는 걸까. 도대체 왜?, 라는 의문은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책장을 덮고서도 해결되지 않는다. ‘내가 널 안다.’, ‘내가 그걸 이해했다’라고 생각한 순간 오해가 시작되어 스스로 불신을 만들고 배신감에 몸을 떨기도 한다. 스스로 자신의 원고를 태울 용기가 없었거나 미련을 남긴 카프카에게 요제프 K가 묻는다. 미완의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하고픈 말은 아도르노의 분석대로 “모든 문장이 ‘나를 해석해보라’고 하면서 어떤 문장도 그것을 허용하려 하지 않는다.” 이게 뭥미?

소설 도입부를 읽다 내려놓은 책들이 꽤 많다. 어디 소설뿐인가. 첫인상에 기대 선입견을 갖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모든 텍스트는 저마다의 역할이 있고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독자에게 발화되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읽었다는 만족감을 위해, 또 누군가는 문제를 해결하고 색다른 방식의 위로를 받으려고, 그리고 누군가는 망각과 도피의 수단으로 책 속에 숨기도 한다. 목적이 무엇이든 내게 50쪽을 넘기는 책은 나와의 인연이 없다고 판단한다. 카프카의 『소송』을 꺼내 다시 읽기 시작한 건 필연을 가장한 우연일 테다. 인생 전체가 우연히 휘말린 소송에 불과하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고, 아무 상관없이 욕을 먹고, 영문도 모른 채 불이익을 감내하며, 남의 잘못으로 손해를 보는 게 인생이라면 지나치게 부정적일까. 낭만적 사랑과 긍정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 곁에 머물러야 행복도 전염된다면 요제프 K 같은 사람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아야 한다. 바틀비는 물론.

소송의 원인을 알지 못한 채 소설이 끝난다. 공소장을 확인하지도 못한 주인공은 건물 꼭대기층 다락에 설치된 법정을 기웃대며 이들의 피를 빠는 훌트 변호사와 법원 중재인 화가 티토렐리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다소 그로테스크하고 초현실적인 장면들이 이어지는 음울한 분위기의 소설을 읽는 내내 식은땀으로 젖은 속옷을 벗지도 못하고 뜨거운 선풍기 바람이 오히려 온몸에 열기가 올라오는, 바람 한 점 없는 여름밤에 읽지 말아야 할 소설 맨 윗자리에 올리고 싶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주의로 흘러가는 현대 관료 체제는 매일 뉴스를 통해 목도한다. 상식과 합리에 바탕을 둔 판단과 선택과 거리가 먼 경찰과 검찰과 법원의 판단이 오로지 증거와 법리에 따라 선악을 결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듯싶다. 원고와 피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억울하다고 아우성인 세상에서 요제프 K가 선 법정은 종교 혹은 인간 존재에 대한 은유로 읽히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 혹은 종교적 가르침에는 인과관계가 성립할까. 비인간화된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느끼는 소외와 불안은 법정으로 상징되는 권위, 가치, 규범들이 내면화된 죄의식을 만들어 낸다.

1883년 체코에서 태어나 1924년 겨우 40년을 살다 간 프란츠 카프카는 파혼으로 인한 죄책감, 자기 증오, 자기 처벌의 심정으로 이 소설을 썼을 것이라는 추론은 그의 생애와 무관치 않다. 제1차 세계전을 일으킨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를 ‘빌렘’과 ‘프란츠’로 등장시켜 우회적이고 은밀한 방식으로 1914년의 세계를 반영했다는 해석도 일리가 있겠다. 그러나 세계가, 아니 우리 삶 전체가 법정과 다름없다는 설정은 공화정 아래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에 산다고 믿는 근대 이후 인류에게 던지는 카프카의 질문이다. 넌 괜찮으냐고, 과연 그게 맞는 거냐고.

“개 같군!” 그가 말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살아남을 것 같았다.


* 등장인물

요제프 K : 서른 번째 생일을 맞은 은행 재무담당 부장, 주인공 화자

감독관 : 요제프를 감독

프란츠, 빌렘 : 감시인

그루바흐 부인 : 하숙집 주인

뷔르스트너 양 : 타이피스트, 건너편 방 거주자

라벤슈타이너, 쿨리히, 카미너 : K의 은행 동료들

엘자 : 술집 여종업원

법정 정리, 그의 아내 : 법정이 열리는 장소를 제공하며 살아감

베르톨트 : 법학 전공 대학생, 예심판사 밑에서 일하며 법정 정리의 아내를 짝사랑

알베르트(카를) : 요제프의 숙부

에르나 : 사촌인 숙부의 딸

훌트 변호사 : 숙부의 동창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대변자

레니 : 홀트 변호사의 시중 드는 아가씨

사무처장 : 홀트 변호사의 지인

티토렐리 :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이자 비공식적 법원 중재인

블로크 : 상인으로 변호사의 의뢰인

*

체포

그루바흐 부인과의 대화 이어서 뷔르스트너 양

첫 심리

텅 빈 법정에서 / 대학생 / 법원 사무처

태형리

숙부 / 레니

변호사 / 제조업자 / 화가

상인 블로크 / 변호사와의 해약

대성당에서

종말

**미완성 장들

B의 여자친구(몬타크)

검사(하스테러)

엘자에게로

부행장과의 싸움

관청

어머니에게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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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힐리스트로 사는 법 - 삶이 무겁고 힘든 사람에게 니체의 니힐리즘이 전하는 지혜
문성훈 지음 / 이소노미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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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힐nihil은 ‘없다無’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유래한다. 기존의 가치 체계와 이에 근거를 둔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는 니힐리즘을 실천하는 사람이 니힐리스트라 하겠다. 임승수는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에 대해 그 이유와 태도를 설명한 적이 있고, 지승호는 유시민을 ‘소셜 리버럴리스트’로 규정한 적이 있다. 라벨링 혹은 낙인이론은 한 인간을 프레임에 가두는 못된 방법인지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자기 삶의 가치와 목표를 설정하고 인간과 세계를 향한 삶의 방법을 결정할 수 있다는 건 숭고한 일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과 선택의 문제라면 나름대로 의미 있는 삶의 태도가 아닐까.

자기 삶의 창조자가 되어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으로 가득 채우려는 주체적인 사람은 아름답다. 그것은 학벌과 직업, 명예와 권력, 부의 척도로 가늠할 수 없는 인간적 향기와 가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특정 이념에 가두거나 몇몇 프레임으로 가두기보다 나름대로 각자 만들어가는 삶의 방법과 태도는 그래서 소중하다. 인상 깊게 들여다봤던 악셀 호네트의 『인정 투쟁』의 번역 소개자라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던 철학자 문성훈의 글은 단단하게 여며져 있다. 합리적이고 빈틈없는 논리로 무장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깊은 사유와 오랜 경험이 녹아있지만 주관에 치우치지 않고 담담하게 저자의 생각을 사례와 함께 풀어내고 있어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에세이다. 좋은 글은 결국 깊이와 넓이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니힐리스트는 세상의 허무함 속에서도 ‘사자의 꿈’을 꾼다!”라는 문장과 함께 시작하는 이 책은 니체 철학에 바탕을 두면서도 쇼펜하우어와 키르케고르, 공자와 마르크스, 김예슬과 푸코, 법정 스님과 존 롤즈까지 다양한 사상가들과 실제 사례가 소개되어 현실적인 삶의 지침으로 삼기에 충분하다. 한 사람의 생각과 주장이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가늠할 수는 없다. 그가 가진 이력과 삶의 궤적과 무관하게 개별 독자의 현실 적용 가능성은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삶이 무엇인지, 그 태도와 방법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는 사람은 없다. 각자 선택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가족과 연인, 절친과도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할 때가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누적된 말과 행동의 결과는 그대로 자기 인생이 되고 돌이킬 수 없는 거리를 만든다.

삶이 무겁고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특별히 ‘니힐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하지 않더라도, 아니 그 어떤 이념과 주의, 주장으로 설명할 수 없더라도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지 점검하고 성찰하지 않는다면 배부른 돼지와 다를 바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자는 건 아니다. 문성훈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법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통해 자유 정신을 되찾고 자기 창조적 삶을 권한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김연자도 외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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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 - 우리 몸 안내서
빌 브라이슨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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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하게도, 대한민국 헌법 제12조 신체의 자유를 떠올렸다. 인간의 몸은 자유의 본질이며 출발이다. 원하지 않는 신체 접촉은 물론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적 합의는 인간다운 삶의 기본이다. 건강한 몸을 유지하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 또한 인간의 기본권이다. 헌법에 보장된 권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존중받아야 할 권리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가 꿈꾸는 세상과 거리가 멀다. 시대와 맥락에 따라 매력적인 몸이 다르고 특정한 몸을 추앙하던 사람들도 변한다. 질병과 장애로 일그러진 표정과 뒤틀린 몸을 로트렉이나 에곤 실레처럼 색다른 관점으로 표현한 화가도 있으나 대개 몸에 대한 미의 기준과 사회적 관점은 본능에 가까운 직관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니 몸과 관련된 주제는 정치, 사회, 역사, 예술 분야에서 조금씩 다르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 빌 브라이슨은 이렇게 다양하게 변주되고 흥미로우며 미지의 대상인 인간의 몸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피부에서 뇌와 머리 입과 목, 심장과 피, 면역계와 소화기관뿐 아니라 음식, 잠, 직립 보행과 심호흡에 이르기까지 몸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한 이 책은 ‘우리 몸 안내서’라는 부제답게 외계인을 위한 인간 이해 매뉴얼 같은 느낌이다. 해부학 도판으로 충분한 설명을 굳이 텍스트로 설명할 이유는 없다. 『그림과 함께 읽는 바디』가 따로 출간된 사실을 토론 도중 알았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이 시대에 ‘라디오 드라마 극장’을 듣는 느낌이었으니까. 물론 빌 브라이슨의 목적이 인체 해부도 설명에 있지 않았으리라는 건 누구나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로 입증한 지식과 정보의 편집력, 유려한 문장과 매끄러운 설명력, 재치 있는 입담과 적절한 비유를 무기로 다양한 인문학적 양념이 뿌려진 책은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이 책 또한 의학 분야로 분류할 수 없을 만큼 잡학 다식한 읽을거리로 가득하다. 과장하거나 주관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새로운 시선으로 인간의 몸을 바라보며 다양한 고민거리를 제공하는 책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아무나 쓸 수도 없다. 지식과 정보의 깊이와 넓이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글쓰기 능력을 우리는 숱한 책에서 매일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생명을 담보로 한 의료 대란은 어느 쪽이 옳고 그름으로 판정할 수 없다. 응급 의료 체계부터 진료 과목 편중, 지방 의료 붕괴 등 이해관계로만 따질 수 없는 의료 문제는 교육보다 더욱 심각하게 공공성을 따져 거시적인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토론에서 다뤄진 ‘좋은 의학과 나쁜 의학’ 뿐만 아니라 ‘건강과 노화’, ‘뇌와 기억’ 등 우리는 몸을 통해 자기 삶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의대 증원 문제가 숫자놀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성적순으로 의대에 진학하는 동안 무너진 기초 과학, 특정 직역의 상상을 초월한 이기주의, 의료 보험의 보장성과 실비보험 문제 등 이야기는 결국 현실과 닿고 우리 몸이 곧 삶이 되는 현실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누군가는 더 오래 살기 위해 불노초를 캐오라던 진시황제를 떠올렸을 테고 누군가는 덧없는 삶에 대한 환멸로 자살한 숱한 예술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건강수명은 기대수명과 다르다. 우리는 언제까지 직립보행하며 살 수 있을까.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존엄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아니 그렇게 사는 방법은 무엇인가. 가장 기본적인 실존적인 몸과 건강 문제 앞에서 누구도 예외가 될 순 없다. 헌법에 보장된 신체의 자유만큼 건강권도 소중하다. 아프지 않고 건강한 몸으로 오늘을 살 수 있는 ‘행복’이 허락된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두 발로 사유하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남은 시간에 경의를.

문 : 건강한 사람을 정의한다면?

답 : 아직 검사를 받지 않은 사람. - 4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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