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대한민국의 교수와 경제관료들은 토마 피케티나 장하준 등 유럽 경제학자들의 이론과 주장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듯하다. 폴 크루그먼 등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유력한 경제학자들의 주장과 이론을 인용하거나 정책에 반영한 사례도 듣지 못했다. 대개 하이에크와 프리드먼 등 시카고 학파의 경제 이론이 ‘그들’의 지적 토대를 이룬다. 자본주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비주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 계급론』이 여전히 영감을 주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건 슬픈 일이지만, 일레자베스 커리드핼킷은 ‘야망 계급론’으로 유한 계급론을 오마주한다.
물론 1899년 소스타인 베블런이 비판했던 유한계급은 엘리트 계급으로 바뀌었고 중간 계급이 두터워졌으나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과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규범에 대한 믿음이 오히려 또 다른 문제를 양산한다. 계급 재생산에 몰두한 ‘그들’을 저자는 물질적 소비보다 자신의 지위를 구별짓는 ‘야망계급’이라 명명한다. 야망계급의 소비 문화에 대한 비판은 날카롭다. 나름 피시한 사람들과 의식 있는 소비자로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경고는 뼈아프다. 이 책을 읽는 독자 중 상당수는 바로 자신의 이야기임을 직감할 터. 저자는 왜 야망계급의 소비 문화가 과거 유한계급의 소비문화보다 훨씬 더 유해한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을까.
새로운 야망계급은 소득수준이 아니라 문화수준으로 묶인다. 물질적 재화가 아니라 사회와 환경을 의식하는 가치관, 삶의 철학과 표지가 뚜렷한 교양과 문화자본으로 무장한 계급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경고는 타당한가. 저자의 분석은 야망계급의 구별 짓기가 아니라 ‘비과시적 소비’에 초점을 맞춘다. 육아, 교육, 의료 등 비가시적이고 암묵적인 소비는 상당한 정보와 돈이 없으면 모방하기 어렵다. 단순히 돈으로만 해결되지 않는 지식과 정보와 취향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과거 유한계급보다 은밀하고 심각한 계급 격차의 원인은 단순한 과시적 소비가 아니라 과시적 생산, 과시적 여가, 비과시적 소비에 있다. 이는 불평등은을 은폐하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단순한 경제적 격차가 아니라 문화적 격차를 포괄하는 삶의 태도 전반을 아우른다. 이를 선택할 수 없는 중간계층이나 자신의 지위 표지를 식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일상과 태도는 다소 모호하다. 미국 사회를 분석한 저자의 이야기가 한국 사회와 동떨어져 있지는 않으나 다양성보다는 대개 ‘소득’으로 수렴하며 거대한 욕망이 일방향으로 흐르는 우리와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속성과 본능은 베블런의 지적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100년이 훌쩍 넘는 간극에도 불구하고 사회 변동과 수정 자본주의가 계층과 계급의 ‘차이’를 바꾸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설국열차의 맨 앞칸과 꼬리 칸은 시간이 흘러도 바뀌지 않고 앞칸으로 이동하려는 욕망도 변하지 않기 때문일까. 야망계급이든 소비 계급이든 희망 계급이든 모호한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의 구별 짓기가 더 두려울 때가 많다. 지금 우리는 괜찮지 않다. 아니 어쩌면 괜찮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상상하며 꿈꾼 사회를 이룬 적이 없으나 여전히 멈추지 않고 꿈을 꿀 수밖에 없는 걸까. 저자의 명쾌한 분석도 ‘과거’와 ‘현재’일 뿐 ‘미래’를 전망하거나 대안을 제시하진 못한다. 아니, 그걸 한다고 해도 현실이 될 수는 없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다는 정도면 충분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