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격차 - 평등한 사회에서는 가난해도 병들지 않는다
마이클 마멋 지음, 김승진 옮김 / 동녘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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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말하면 ‘권력, 돈, 자원의 불평등이 피할 수 있는 건강 격차의 근본 원인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 229쪽

신문(언론)의 리드는 기사의 첫 문장이다. 눈에 띄는 제목(핵심을 전달하는 단어와 사건의 요약이 아닌 자극적 황색 저널리즘의 낚시용 제목과 다른)과 부제에 이어지는 기사의 첫 문장은 삼각형으로 수박을 따보던 시절의 추억처럼, 탑-다운top down 방식으로 사건을 들여다보는 구조다. 역삼각형으로 디테일에 접근하는 방식이니 어디에서 멈춰도 기사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책은 어떤가. 단 마이클 마멋은 건강 격차의 근본 원인이 권력, 돈, 자원의 불평등 때문이라는 한 마디를 던져 놓고 이 책을 시작하지는 않는다. 아니 어떤 책의 저자도 첫 문장에 목숨 거는 경우는 많지 않다. 소설이나 시의 경우는 조금 다르기도 하다. 우리가 기억하는 숱한 고전의 첫 문장을 사골처럼 우려먹으며 곱씹는 경우도 많지만 대개 한 권의 좋은 책은 유기체와 같이 부분의 합이 전체 볼륨을 넘어선다. 물론, 좋은 책과 나쁜 책의 기준도 각자 다르겠으나 일반적인 경우에 그렇다는 의미다.

책 첫머리에 붙은 의사의 추천사를 잠시 들여다보자. “건강의 문제가 단순히 의료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결정 요인의 문제라는 점을 일깨우는 책이기에 나이들수록 좁아져 가는 의과대학생들의 시각을 넓히는 광각렌즈 역할도 할 것”이라는 강영호의 추천의 말은 얼마나 나이브한가. 추천사에 시비 걸 생각은 아니지만 ‘나이들수록’이라니...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학생과 학부모의 목적과 기대 혹은 현재 벌어지는 이기적 행태를 온 국민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그들이 가진 직업 윤리, 사회적 관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 가능하지 않은가. 그래서 “건강은 의사들에게만 맡겨 두기에는 너무나 중요하다.”(43쪽)라는 저자의 일갈에 오랫동안 눈길이 머문다.

몸이 계급이다. 각자의 건강과 몸 상태가 직업, 소득, 교육 정도, 생활 환경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계급과 불평등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굳이 통계를 통해 확인할 필요도 없다.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부자들이 건강하고 선진국이 오래 산다. 예를 들어, 2012년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전 세계 평균 기대수명 70세에 도달했다. 그러나 시에라리온(46세)과 일본(84세) 사이의 격차는 38년이다. 평균의 함정. 대한민국에서도 지역별, 소득별 격차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건강 불평등은 결국 권력, 돈, 자원의 불평등을 증명한다.

인구, 교육, 취업, 주택, 연금, 노년 문제와 같은 맥락에서 개인의 선택과 노력 ‘탓’으로 돌리면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모든 게 구조적 모순이나 사회적 안전망과 복지로 해결 수도 없다는 걸 몰라서 이 책을 뒤적이는 독자도 없으리라. 그래서 저자는 근거 기반 낙관주의를 내세운다. 스스로 ‘낙관증, 선별적 청각장애증, 안구수분과다증’ 환자라고 주장하는 저자의 아재 개그는 심각한 내용을 중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상은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차이다. 소득 불평등과 건강 불평등의 원인을 해소하는 대신 격차를 공고히 하려는 정책과 이념들이 사회적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이 아닐까. 2008년 금융위기에 대처하는 아이슬란드와 아일랜드의 상반된 IMF 대처법에 관한 이야기가 이를 증명한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며 어디를 향해 걷고 있을까.

차례를 살펴보면 사회학 교과서와 다름없다. 공정, 평등, 교육, 노동, 노년, 지역공동체, 희망 같은 말들을 건강과 결합시켰을 뿐이다. 광범위한 주제와 근거 자료들로 인해 거대한 사회학적 보고서처럼 읽히지만 결국 공정한 사회(9장), 공정한 세계(10장), 희망을 조직하는 사회(11장)를 향한 기나긴 여정이다. 모임에 참석한 12명의 사회인의 관점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사회계층적 경사면에 대한 원인, 상대적 박탈감, 여성 건강, 빈곤 지표에 대한 생각들이 조금씩 차이가 났다.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문제를 인식하는 단계가 먼저다. 문제가 없으면 해결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원인의 원인은 무엇인지에서 시작해서 의료 보험, 노인 빈곤, 의사 파업 등 우리가 사는 세상 이야기와 현실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3개월간 이어진 몸/건강에 관해 함께 걸으면서 나눈 이야기들은 또 어떻게 우리 몸에 그 흔적을 남겼을까. 그 과정에서 각자의 생각과 고민은 조금 풀리거나 증폭되거나 혼란스워질 것이다. 한 권의 책은 또 다른 책을 읽게 할 것이며 그 변화와 성장이 어제와 나와 조금 다른 나로 성장시키는 동력이 될 뿐이다.

저자는 지속가능한 발전에는 경제 ․ 사회 ․ 환경, 세 가지 균형이 필요하다는 말로 책을 마무리한다. 우리는 지속 가능한 건강과 지속 가능한 행복과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해 잘 살고 있을까. 잘 산다는 말의 의미가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그 다양한 차이가 또 다른 책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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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론 - 어떻게 마주 앉아 대화할 것인가
최재천 지음 / 김영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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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統攝은 ‘consilience’의 번역어다. 그 의미를 포괄하지 못하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다며 용어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고 원어 그대로 컨실리언스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번에는 ‘숙론熟論’을 들고 나온 최재천의 생각과 의도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토론discussion이든 논쟁debate이든 숙론discourse이든 새로운 용어와 개념을 내세워 이론을 정리하는 일보다 중요한 건 지속 가능한 방법론이나 실천적 담론이다. 마르크스의 철 지난 충고대로 ‘해석’에 그치는 책은 차고 넘친다. 이제 변화를 이끌거나 실행에 옮겨야 할 때가 아닌가.

무용담과 자서전은 일기장이나 유튜브로 충분하다. 최재천의 책을 서너 권쯤 읽고 나면 강릉 어린 시절부터 유학 시절까지 그의 삶을 얼추 꿸수 있다. 숙론의 실천담으로 소개하기에 어려운 일화들이 200여 쪽에 불과한 분량에 절반이 넘어도 좋을만큼 중요한 사례라고 볼 수도 없다. ‘최재천 교수가 9년간 집필해 마침내 완성한 역작’이라는 광고 문구의 부끄러움은 왜 내 독자의 몫이어야 하는가. 이 정도면 너무한 거 아닌가. 쓸 게 없으면 원고 청탁을 거절할 때도 됐다.

마주 앉아 대화하는 기술이 부족한 게 아니라 상대를 ‘인정’하는 태도를 배우지 못한 대한민국의 교육, 경쟁에서 이기도록 기른 부모들의 양육 방식, 세컨 챈스second chance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에서 토론이나 토의가 가당키나 한가. 사교육으로 결정되는 대학 진학, 불안정한 고용과 사회 안정망, 청년 실업과 주거 문제를 외면한 채 내놓은 저출생 대책만큼 교육 부재 만능주의는 철지난 유행가처럼 들린다. 원인의 원인, 즉 교육에는 왜 숙론이 불가능한가.

숙론의 필요성과 목적에 치중하나 방법론과 대안은 부재하고 개인적 경험에 기댄 화려한 무용담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진지한 성찰과 반성, 그리고 실천 가능한 정책 변화, 발상의 전환, 공동체의 태도 변화가 아닐까. 물론 이것이 모두 특정 집단과 개인의 탓은 아니다. 우리 모두의 외면과 이기주의에 기인한다. 어쩌면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바뀌지 않는 것들에 대한 한숨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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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알랭 드 보통 지음, 박중서 옮김 / 청미래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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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헤어질 때, 배려의 말을 건네는 쪽은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 37쪽

알랭 드 보통은 베르나르 베르베르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Essays in Love, 1993년)로 깊은 인상을 남긴 후에도 결코 만만치 않는 책들이 계속 번역되었고 많이 읽혔다. 개인적으로는 『불안』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현대적 일상의 가치를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사랑에 관한 숱한 오해와 진실에 대해 어떤 작가든 한두 마디는 하기 마련이다. 프루스트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보통씨는 특별한 문장을 남긴다.

건축, 미술, 종교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친 다양하고 풍부한 저작들은 평균 이상이다.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기 전 에피타이저 혹은 읽은 후에 디저트로 좋은 책이다. 1871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프루스트는 평생 변변한 직장을 가져 본 적도 없고 병약한 몸으로 거의 일생을 침대에 누어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문제적 작가다. 숱한 상찬과 논쟁으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프루스트는, 아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몇 마디로 규정하기도 어렵고 재미와 감동이라는 전통적인 문학적 잣대로 가늠하기도 어렵다.

텍스트 자체보다 프루스트에게 집중한 저자는 ‘오늘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 ‘성공적으로 고통받는 방법’, ‘사랑 안에서 행복을 얻는 방법’ 등 원제처럼 프루스트가 당신의 삶을 바꾸는 방법 아홉 가지를 제시한다. 책 좀 읽는 독자들은 금세 눈치챈다. 비법과 방법을 제시하는 책은 실패하기 쉽다는 것을. 그건 니 생각이고 난 달라,와 같은 주관적 태도와 생각 등 비판적 관점이 개입되기 때문이며 어디에나 통용되는 방법론은 수학의 정석에도 모두 담아내지 못한다. 정해진 길이 있다면 세상에 단 한 권의 책만 존재할 테니까. 그러니 이 책도 프루스트나 텍스트를 읽는 동안 진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헤매려는 사람은 기필코 이해하고 말겠다는 오기보다 보상 심리로 읽는 것이 좋을 듯하다.

프루스트에 삶과 당대 상황들에 대한 이해는 기본이다. 어떤 고전이든 ‘당대성’을 간과한 채 서사에 몰입하기는 어려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없던 시대고 겨우 전화가 발명된 시기다. 잘 차려 입고 오프라인 모임인 살롱에 가지 않으면 사람을 사귈 방법이 없었고, 인스타가 없어 돈 많은 사람들이 자랑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는 걸 기억하자. 그러면 오늘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니, 프루스트가 자기 삶이나 사랑했는가. 친구도 없었을 것 같은데...질베르트, 알베르틴을 떠올려 보니 사랑이 뭔지도 모를 것 같은데...우리가 삶을 바꾸는 방법을 읽어낼 수 있다고?

그렇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독자’야말로 진정한 책을 완성시킨다. 무엇을 썼는지 중요하지 않다. 개별 독자가 어떻게 읽었는지가 핵심이다. 이 책은 알랭 드 보통이 읽은 프루스트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일 뿐이다. 물론 우리는 타인의 책읽기를 통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비밀에 감탄하고 전혀 다른 해석에 놀란다. 독서 토론이 아니라도 간접적인, 또 다른 방식의 독서 모임 같은 2차 저작물들에 손이 가는 건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프루스트 ‘보다’ 오히려 우리 입맛에 맞는 문장과 감수성을 가진 보통씨의 특별한 문장을 읽는 즐거움 때문이면 어떤가. 어차피 독서 유목민들은 짐을 챙겨 길을 떠나면 그뿐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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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백선희 옮김 / 책세상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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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어로 아이도스aidos, 라틴어로 푸도르pudor라 불리던 수치심의 어원은 중요하지 않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채 모든 인류가 알고 있는 그 감정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니, 어쩌면 ‘수치심’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레시피를 쓰고 싶었거나 지나친 수치심이 자기 모멸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람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 목적이 무엇이든 저자는 우리에게 각자의 수치심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고 오래도록 응시하라고 재촉한다. 무엇이 부끄러운가, 아니 그 부끄러움의 원인이 무엇인가.

부끄러움은 왜 나 혹은 우리의 몫인지에 생각한 본 적이 있다면 프레데리크 그로의 “수치심의 진영이 바뀌어야 한다!”라는 외침에 동의할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철학자는 무엇이 다를까. 제국주의 중심에 서 있으나 세계 경제, 문화, 사상을 이끄는 국가에 서서 바라보면 미국과 아시아 남미와 아프리카의 현실이 조금 달리 보일까. 이렇게 좁은 대한민국에도 자기가 가진 것들-이를테면 자본, 권력, 명예, 인맥 등등-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을 ‘소유’하고 ‘학습’하게 된다. 상식과 법률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용될 뿐 공동선을 추구하거나 사회적 합의와 다수의 의견조차 필요에 따라 달리 해석한다. 비단 정치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 자리에 있는지에 따라 관점이 달라지고 자기만의 논리와 주장으로 합리화한다. 인류 문명사의 변하지 않는 특성이지만 진영에 따라, 서 있는 자리에 따라 그것을 공정과 정의라고 외치거나 상식과 합리라고 주장하니 ‘수치심’이 설 자리가 없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모든 관계에 적용되는 말이다. 거리 두기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부모자식, 형제자매뿐만 아니라 친구, 연인, 선후배, 직장동료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혈육이라서, 사랑하니까, 친한 사이라는 이유로 ‘선’을 넘는다. 각자의 선이 다르니 문제가 생긴다. 인간관계는 교집합이다. 여집합의 욕망이 선을 넘게 하고 관계를 망치며 범죄를 저지르게 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배움과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서 있는 자리와 이해관계가 우선인 듯하다. 사회학적 상상력, 성인지감수성, 예의 바른 무관심을 입으로 주어섬겨도 일상적 ‘관계’에 적용하고 실천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물론 이 앎과 삶의 간극이 수치심을 유발하지만 그조차 인식하지 못하면 수치심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듯하다. 남 탓하기 바쁘고, 자기변명에 심혈을 기울이며 내 사전에 반성과 성찰은 없다고 항변한다.

이 책은 수치심의 중요성에 대해 독자 개인의 앎과 삶을 돌아보라고 재촉한다. 수치심의 종류와 성격을 지식으로 담아둘 필요는 없다. 어차피 육화되어 변화, 성장하지 못한다면 ‘감정’에 관한 숱한 철학적 담론과 심리학적 토대는 무용지물이다. 물론 이해한 만큼 공감하고, 공감도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수치심은 조금 다른 영역이다. 다양성의 존중은 합의된 질서의 존중 아래 가능한 분명한 공적 책무다. 다수가 항상 옳은 건 아니듯 개인차의 존중도 틀린 건 아니다. 그 불문명한 공백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에 대한 분분한 의견은 사람과 조직마다 많이 다르다. 갈등은 거기서 시작된다. 대개 수치심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 구별할 수 없고 그 대상과 상황에 따라 뻔뻔함으로 무장하는 사람이 생길 뿐이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건 성격과 습관뿐만 아니라 삶의 태도와 방법의 차이다.

* 속옷 차림의 여성의 뒷모습을 담은 에곤 실레의 표지 그림은 저자가 말하는 '수치심'과 무관하여 당혹스럽다. 출판사의 의도와 표지디자인에 딴지 걸고 싶지 않으나 의도적 오류라 해도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라는 제목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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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600
시의 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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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시인선 뒤표지 박스 안의 글이 좋아 서점에 가면 우선 시집을 뒤집어 먼저 읽어보고 내용을 살핀 적이 많다. 나만 그랬을까. 600권 기념호가 창비 500권 기념호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됐다. 이번에는 501~599권에 실린 시 모음 기념 시집이 아니다. 시인의 말, 아니 시의 말이라 명명한 뒤 표지 글을 모았다.

그동안 시는 나의 돛이자 덫이었다. 시가 부풀어 나를 설레게 했고 사해를 항해하게 했으며 닻 내릴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그리하여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글쓰기가 가능하도록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때로 시는 나를 괴롭혔다. 버리기 싫은 덫처럼 말이다.

_방부제가 썩는 나라┃최승호┃문학과지성 시인선 514「시작 노트」, 24쪽

한 편의 시는 시집 한 권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비교할 수 없다. 시 한 편은 소비하지만, 시집 한 권은 소화해야 한다. 그래서 시인들은 시작 노트 일부를 꺼내놓기도 했고, 시집을 출간하며 느낀 소회를 적기도 했으나 시인의 말이 따로 있으니 이 글들의 성격이 모호해졌나. 한 권의 시집에 모여 사는 시들이 내는 목소리라고 해도 좋다. 시의 말이든 시인의 말이든 행간을 건너 뛰어 미처 내뱉지 못한 한숨이어도 나쁘지 않았다. 허술한 푸념, 아니 단단하게 벼리지 못한 성긴 의미라서 머리보다 가슴에 닿았는 지도 모른다.

시의 목표가 사랑이 아니라면 그런 시는 내게 필요 없는 존재다. 왜냐면 세상은 보기보다 잔인하고 외롭고 힘들기 때문이다. 시는 삭막한 세상에서 상처 치유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_천사의 탄식┃마종기┃문학과지성 시인선 545, 58쪽

시가 삭막한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리라는 의사 시인 마종기의 생각은 나이브하다. 아니 시의 목표가 사랑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시를 쓸 수 없으리라. 알면서 펼치는 시집의 첫 페이지 그 숱한 서시를 읽기 위해, 그 두근거리는 ‘첫’을 위해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건 아닐까.

누구에게나 꿈이 있다. 남의 것과 비교할 수도, 비교해서도 안 되는 자기만의 꿈과 사랑은 제각기 다른 모양과 빛깔로 빛난다. 획일화된 세상, 자본주의적 기준으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을 무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시를 읽지 않을 테다. 아니 무용해서 아름다운 걸 아는 사람들이 여전히 시를 쓰고 그 소중함에 기꺼이 읽는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닐까.

어떤 스무 살은 마흔 속에 가 있고

어떤 마흔은 스무 살 속에 와 있다.

_겨를의 미들┃황혜경┃문학과지성 시인선 568┃시 「핵核」에서, 85쪽

어쩌면 어떤 마흔 살은 예순 속에 가 있고, 어떤 예순은 마흔 살 속에 와 있다. 시간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 존재는 없다. 어떤 틈에 대하여 알고 싶다고 양자물리학의 원자와 핵 사이를 들여다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때때로 오늘 지는 해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과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는 사람도 많지 않다.

강동호는 발문에서 문지시인선 뒤 표지의 글들을 “하나의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글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음악적 코다(coda)처럼 시집의 종결을 고지하는 자기 지시적 텍스트”라고 규정한다. 일종의 종결사라는 의미일 텐데, 나는 미련과 아쉬움이거나 그다음 시집의 서시를 고민하는 글로 읽힌다. 마지막이 아니라 미리 온 처음이라고 생각한다. 시간 앞에 한 인간의 죽음이 역사의 종말을 의미하는 게 아니듯이. 개별적 존재로서 하나의 우주와 같은 한 사람의 소멸이 세상의 끝이 아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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