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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백선희 옮김 / 책세상 / 2024년 3월
평점 :
고대 그리스어로 아이도스aidos, 라틴어로 푸도르pudor라 불리던 수치심의 어원은 중요하지 않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채 모든 인류가 알고 있는 그 감정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니, 어쩌면 ‘수치심’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레시피를 쓰고 싶었거나 지나친 수치심이 자기 모멸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람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 목적이 무엇이든 저자는 우리에게 각자의 수치심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고 오래도록 응시하라고 재촉한다. 무엇이 부끄러운가, 아니 그 부끄러움의 원인이 무엇인가.
부끄러움은 왜 나 혹은 우리의 몫인지에 생각한 본 적이 있다면 프레데리크 그로의 “수치심의 진영이 바뀌어야 한다!”라는 외침에 동의할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철학자는 무엇이 다를까. 제국주의 중심에 서 있으나 세계 경제, 문화, 사상을 이끄는 국가에 서서 바라보면 미국과 아시아 남미와 아프리카의 현실이 조금 달리 보일까. 이렇게 좁은 대한민국에도 자기가 가진 것들-이를테면 자본, 권력, 명예, 인맥 등등-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을 ‘소유’하고 ‘학습’하게 된다. 상식과 법률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용될 뿐 공동선을 추구하거나 사회적 합의와 다수의 의견조차 필요에 따라 달리 해석한다. 비단 정치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 자리에 있는지에 따라 관점이 달라지고 자기만의 논리와 주장으로 합리화한다. 인류 문명사의 변하지 않는 특성이지만 진영에 따라, 서 있는 자리에 따라 그것을 공정과 정의라고 외치거나 상식과 합리라고 주장하니 ‘수치심’이 설 자리가 없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모든 관계에 적용되는 말이다. 거리 두기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부모자식, 형제자매뿐만 아니라 친구, 연인, 선후배, 직장동료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혈육이라서, 사랑하니까, 친한 사이라는 이유로 ‘선’을 넘는다. 각자의 선이 다르니 문제가 생긴다. 인간관계는 교집합이다. 여집합의 욕망이 선을 넘게 하고 관계를 망치며 범죄를 저지르게 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배움과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서 있는 자리와 이해관계가 우선인 듯하다. 사회학적 상상력, 성인지감수성, 예의 바른 무관심을 입으로 주어섬겨도 일상적 ‘관계’에 적용하고 실천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물론 이 앎과 삶의 간극이 수치심을 유발하지만 그조차 인식하지 못하면 수치심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듯하다. 남 탓하기 바쁘고, 자기변명에 심혈을 기울이며 내 사전에 반성과 성찰은 없다고 항변한다.
이 책은 수치심의 중요성에 대해 독자 개인의 앎과 삶을 돌아보라고 재촉한다. 수치심의 종류와 성격을 지식으로 담아둘 필요는 없다. 어차피 육화되어 변화, 성장하지 못한다면 ‘감정’에 관한 숱한 철학적 담론과 심리학적 토대는 무용지물이다. 물론 이해한 만큼 공감하고, 공감도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수치심은 조금 다른 영역이다. 다양성의 존중은 합의된 질서의 존중 아래 가능한 분명한 공적 책무다. 다수가 항상 옳은 건 아니듯 개인차의 존중도 틀린 건 아니다. 그 불문명한 공백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에 대한 분분한 의견은 사람과 조직마다 많이 다르다. 갈등은 거기서 시작된다. 대개 수치심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 구별할 수 없고 그 대상과 상황에 따라 뻔뻔함으로 무장하는 사람이 생길 뿐이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건 성격과 습관뿐만 아니라 삶의 태도와 방법의 차이다.
* 속옷 차림의 여성의 뒷모습을 담은 에곤 실레의 표지 그림은 저자가 말하는 '수치심'과 무관하여 당혹스럽다. 출판사의 의도와 표지디자인에 딴지 걸고 싶지 않으나 의도적 오류라 해도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라는 제목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