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5 - 완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5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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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자세히 보라. 인생은 도처에 형벌을 느끼도록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 285쪽

긴 터널을 통과하는 것처럼 빛과 그림자가 수없이 교차했다. 롤러코스터를 타다가 질끈 감았던 눈을 뜨면 주변의 사물이 보이고 속도감을 느낄 수 있다. 정기수 번역본(민음사) 『레 미제라블』 5권은 2,556쪽이다. ‘위대한 작가’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빅토르 위고는 이 글을 통해 자신의 생애와 사상을 모두 담았다. 단순히 장편소설이라고 분류하기 어려운 긴 글이다. 팡틴, 코제트, 마리우스, 장 발장 등 주요 인물이 등장하고 자베르, 테나르디에 등 조연과 엑스트라까지 수백 명이 출연하지만 소설의 형식을 빌린 당대의 역사이며 철학이고 사회사에 해당한다. 재미있는 스토리를 넘어 신을 향한 질문과 고민, 인간이 사는 사회에 관한 성찰, 인간의 욕망과 본능에 대한 고뇌가 담긴 이 긴 텍스트를 읽는 이유는 독자마다 다를 터. 터널 안에 스치는 불빛과 명멸하는 그림자를 뒤로 하며 달리는 자동차는 저 멀리 희미한 빛을 향해 질주한다. 동전만큼 아주 작은 크기의 희미한 빛을 우리는 ‘희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체 5부로 구성된 이 소설은 1부 팡틴, 2부 코제트, 3부 마리우스, 제4부 플뤼메 거리의 서정시와 생 드니 거리의 서사시, 5부 장 발장으로 나뉜다. 유일하게 사람을 앞세우지 않은 4부는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사랑 그리고 1832년 6월 혁명을 설명한다. 서정시와 서사시가 교차하는 건 비단 4부뿐만이 아니다. 1부에서 미리엘 주교를 등장시켜 종교적 삶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성찰을 요구하며 출발한 작가는 2부에서는 워털루 답사를 통해 역사적 의미를 묻고 3부에서는 질노르망을 통해 왕당파의 입장을 전한다. 4부와 5부에서는 바리케이드로 상징되는 혁명의 역사와 시가전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소설 너머 작가의 현실 인식을 직,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현대 소설의 문법에 전혀 맞지 않는 4부 7장 ‘곁말’의 등장처럼 빅토르 위고는 이 거대한 텍스트를 마치 자기 삶의 비망록처럼 다루고 있는 느낌이다. 1802년생인 작가가 간접 경험한 1815년 워털루, 혁명에 한복판에 서 있었던 1832년 6월이 서사의 중심축이다. 주인공이자 신의 현신, 고뇌하는 작가의 페르소나로 등장하는 장 발장은 1815년에 출소한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돼 장 발장이 죽음에 이르는 10여 년에 불과하지만, 시작은 1789년 7월 14일이며 글을 쓰고 있는 1861년 현재 시점으로 직접 등장하기도 한다. 당대의 시론時論 혹은 시평時評에 해당하는 내용이 서사의 흐름 사이사이에 등장하며 독자를 괴롭힌다.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신은 우리에게 무엇이냐고. 지금은 어떤 시대며 우리에게 혁명은 무엇이냐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는 이 소설에도 적절하게 등장하며 기막힌 우연과 비현실적 문제해결로 주인공들은 숱한 위기를 넘긴다. 기본적인 서사와 스토리는 진부하나, 성경 다음으로 프랑스에서 많이 읽힐 만큼 주목받았던 이유는 자명하다. 빅토르 위고의 문체와 주제 의식이다. 인간의 삶에 대한 현실적 고뇌가 주인공을 통해 생생하게 드러나며 세밀화처럼 기막힌 묘사는 당대 소설로는 넘사벽이었을 듯싶다. 2023년에도 전혀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 문장의 힘이 남다르다. 결국 좋은 글은 작가의 고민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진정성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부와 5부의 중심인 1832년 6월은 작가의 나이 서른이었다. 직접 목격하고 고민했을 장면들을 통해 프랑스의 기나긴 혁명사, 아니 유럽과 인류 전체에 미친 그 영향은 여전히 유효한 현재 진행형의 역사다. 그래서 이 소설은 지나간 옛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생생하게 전달되는 고민과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코제트와 에포닌의 사랑은 왜 다른가. 마리우스가 왕당파 할아버지와 달리 워털루에 참전한 공화주의자 혹은 민주주의자 아버지 사이에서 마리우스가 흘린 눈물은 얼마나 많은가.

시가전은 바리케이드 이쪽과 저쪽을 모두 담진 못했다. 객관적 역사 서술과 달리 소설가는 인물을 통해 혁명의 당위성과 의미를 담아낼 뿐이다. 그 장엄하고 숭고한 장면들을 통해 ‘진보는 국민들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작가의 목소리를 전달하면 그뿐이다. 해석과 평가는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전멸한 시민군을 통해 혁명, 즉 폭동과 반란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했다는 평가는 지나치게 협소한 해석일 것이다. 빅토르 위고는 역사적 ‘진보’의 힘을 믿었다.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사상과 관념은 낭만주의와 계몽주의가 아니라 사랑과 우정, 혁명과 진보, 용서와 화해 그리고 속죄 의식이다.

악인으로 등장해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자베르와 테나르디에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자베르가 자신의 신념과 고뇌를 통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데 비해 테나르디에는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악역을 감당한다. 에포닌과 가브로슈가 묘한 인연의 연결고리로 소설 곳곳에 등장하지만 결국 코제트와 마리우스 그리고 장 발장을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ABC의 벗들’이나 파리의 부랑자들이 다수 등장하며 이야기는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본질적인 문제에 천착하면서도 다양한 인간의 욕망과 선택의 고뇌를 보여주려는 작가의 노력은 조금 지루하고 사색적인 문장과 숨 가쁘고 긴박한 호흡의 적절한 배치로 빛난다. 다만 소설의 마무리는 못내 아쉽다. 결국 장 발장의 긴 행로가 상속을 위한 것이었을까.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행복을 위해 전한 60만 프랑을 어떻게 벌었는지 설명하며 그것이 정당한 돈임을 역설하는 장면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500프랑을 남겼다는 설명은 신의 아바타 역할을 해온 장 발장의 캐릭터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것이 설령 당대 부르주아의 일반적 상식과 서민들의 소망이었다 할지라도 소설은 세습과 상속, 불로 소득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미리엘 주교의 삶을 묘사하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5부 장 발장은 시가전과 마리우스를 살려내는 장 발장의 초인적 노력을 보여준다. 특히 파리의 하수구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이후 해피엔딩을 향한 스토리의 수습과 얽힌 실타래를 풀어가는 과정은 반전 없이 진행된다. 장 발장으로 대표되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의 프랑스가 궁금해서 지금 이 소설을 읽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고전을 읽는 이유가 대개 그러하듯이 변치 않는 인간의 보편성, 당대 사회와 역사의 단면이 보여주는 특수성 그리고 그 숱한 알레고리가 오늘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놀라운 기시감 때문이 아닐까.

빅토르 위고는 이 소설을 1845년부터 1862년까지 17년간 집필했다. 1815년 6월 워털루 전투, 왕정복고, 1832년 6월 혁명은 물론 수도원 생활, 파리의 부랑자들, 시가지의 모습과 하수도 등 당대의 역사이며 풍속화인 이 소설은 그 어떤 작품과 비교 불가능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작품을 작가는 이렇게 겸손하다.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 책 같은 종류의 책들도 무익하지는 않으리라.”

시적 서정성과 거대 담론을 오가며 서사의 힘을 보여주는 빅토르 위고는 미움받는 자를 사랑하고 타락한 자를 구원하는 종교철학을 보여주기 위해 긴 시간 고민하지는 않았으리라. 이 세상에는 절대 악이란 존재하지 않고 모든 인간 속에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 역사는 진보를 거듭하며 혁명을 통해 한발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겪는 평범한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이 곳곳에 배치되어 이 길고 긴 텍스트가 남긴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도스토옙스키『죄와 벌』이나 톨스토이가『부활』보다 먼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신과 인간의 문제를 역사적 진보와 혁명으로 다룬 이 소설에 더 애정이 가는 건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지만 『레 미제라블』은 내게 ‘사랑과 혁명’에 대해 조금 더 깊이 고민하는 시간을 주었다. “인류의 일반적인 생활을 ‘진보’라 부른다. 인류의 집단적인 걸음걸이를 ‘진보’라고 부른다. 진보는 전진한다. 그것은 천국적이고 신적인 것을 향해 지상적이고 인간적인 대여행을 한다.”라는 말에 공감했고, “혁명은 사고에서가 아니라 필연에서 나온다. 하나의 혁명은 인위에서 실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혁명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존재한다.”라는 문장에 숙연해졌다. 나로부터의 혁명, 자기 안에 사랑이 먼저다. 어쩌면 불가능한 꿈일지라도.

사랑하는 것 또는 사랑한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런 다음엔 아무것도 원하지 마라. 인생의 어두운 주름살 속에서 찾아낼 진주는 그밖에 없다. 사랑하는 것은 하나의 완성이다. - 352쪽

미완의 인생이면 어떤가. 그 또한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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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2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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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1815년 6월 17일과 18일 사이의 밤에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유럽의 미래는 달라졌으리라. - 2권, 22쪽

보나파르트의 꿈이 아니라 프랑스, 아니 유럽의 미래가 뒤바뀐 역사적 전투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여전하다. 우리가 기억하는, 아니 기록된 순간이 갖는 의미는 실제보다 해석의 문제다. 그것은 국가 혹은 인류가 아니라 개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돌이켜 보게 되는 일, 선택의 순간들 사이에 ‘실수’는 없다. 축적된 경험과 상황 판단, 정보 분석...휴리스틱이 작동한 최선은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할 뿐이다. 벨기에 수도 브뤼셀 남동쪽에 위치한 워털루에 선 빅토르 위고를 상상해 본다. 1861년의 빅토르 위고의 눈에 비친 전투는 시간을 거슬러 46년 전의 현장을 사진처럼 선명하다.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순간들, 아쉬움과 감탄이 혼재한 상황을 그림처럼 묘사하는 2권 ‘워털루’는 왜 빅토르 위고를 위대한 작가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보나파르트의 자신감과 판을 읽는 능력, 웰링턴의 위기와 불안감, 장교와 병사들의 애국심과 용기, 전투의 치열함과 비극적 결말이 주는 카타르시스까지 완벽한 드라마를 본 듯한 환영에 사로잡힌다.

역사적 해석과 인물에 대한 평가는 현대 소설과 달리 작가의 직접 개입으로 이뤄진다. 빅토르 위고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고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온다. 현장 답사를 통해 지형, 지물을 세세히 파악한 빅토르 위고는 워털루 전투 관련 보고서와 통계를 인용하며 입체적 시선으로 1815년 6월 18일을 살핀다. 전체 5부로 구성된 ‘레 미제라블’은 빵 한 조각을 훔쳐 18년간 감옥살이를 한 억울한 사내 장 발장의 인생 이야기라고 요약될 수 없다. 2권의 주인공은 코제트다. 워털루 전쟁에서 살아남은 퐁 메르시의 아들 마리우스와 테나르디에가 3권의 주인공으로 다시 등장하니, 소설 전체 구성에서 소환당한 과거 혹은 역사는 거대한 복선이거나 생의 부조리와 불가해한 삶의 필연을 설명하기 위한 주제 의식에 해당한다.

이 이야기는 인간 삶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추동하는 힘의 근원에 관한 고찰이다. 신에게 부여받은 삶의 원리, 즉 종교적 윤리와 신이 부여한 운명을 대하는 삶의 태도를 묻는다. 빅토르 위고가 스스로 밝히듯 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등장시킨 어떤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다. 코제트를 찾아나선 마들렌 영감은 고르보 누옥을 거쳐 수도원에 잠입한다. ‘감옥과 죄수’는 ‘수녀원과 수녀’와 같으면서 다르다. 인간은 원죄와 속죄로 신에게 현실을 저당잡힌다. 중세적 세계관, 즉 종교적 절대주의와 계급사회의 모순에 대한 작가의 통찰은 날카롭다. 신랄한 비판과 감정적 증오 대신 냉정한 평가와 이성적 분노를 담아낸다.

혁명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것을 ‘진보’라고 불러 보라. 그리고 만약 진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것을 ‘내일’이라고 불러 보라. ‘내일’은 억제할 수 없게 자신의 일을 하는데, 그 일을 바로 오늘부터 한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언제나 제 목적에 도달한다. - 85쪽

코제트를 착취하던 테나르디에 부부는 고르보 누옥에 종드레트라는 이름으로 스며든다. 워털루 전투에서 테나르디에게 목숨을 빚졌다고 믿는 퐁 메르시의 아들 마리우스가 3권의 주인공이다. 철저한 왕당파 외조부 질노르망의 손에 자란 마리우스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과정과 공화주의자 혹은 민주주의자로 거듭나는 과정은 시간의 사슬에 묶여 사는 우리는 미래를 위해 결국 현실의 구조를 파악하고 근본적인 원인과 객관적 사실을 파악해야 한다고 충고하는 듯하다. 부르주아의 논리와 상퀼로트의 이익이 충돌하듯 혁명은 계속되고 ‘레 미제라블’이 혼거하는 현실에서 개별 독자는 스스로 자신을 어디에 위치시킬지 궁금해졌다.

재탈옥 8년 만인 1831년, 뤽상부르 공원에 나타난 르블랑과 라누아르는 숙명적으로 마리우스와 연결된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일상과 다름없이 기막힌 우연과 피할 수 없는 우연은 소설 내내 지속된다. ‘ABC의 벗’들과 ‘파트롱 미네트’로 불리는 인간 군상이 대거 등장하는 3권에서 주목할 만한 이야기는 없다. 종드레트의 아들 가브로슈부터 질노르망, 앙졸라, 콩브페르, 쿠르페락 등 인물에 집중한 작가는 혁명 전후의 프랑스 사회를 묘사하고 인물 묘사를 통해 당대 현실을 다양하게 보려주려 노력한다. 소설적 장치로서 장 발장과 코제트가 등장하지만 인물과 인물들 사이의 질긴 인연과 자베르로 상징되는 악인과의 대결구도는 서사 구조의 한 축일 뿐이다.

또다시 위기를 넘긴 장 발장과 코제트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남은 4, 5권에서는 또 어떤 이야기를 통해 신과 인간 그리고 현실과 운명의 문제를 풀어낼까. 몇몇 주인공 혹은 몇몇 사건으로 정리할 수 없는 ‘레 미제라블’의 이야기는 오늘도 계속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현재적 유용성을 가진다.

나는 승리를 별로 존중하지 않는다. 이기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참다운 영광은 설득하는 것이다. 그러니 뭔가를 좀 논증하도록 애써 보아라! -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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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사
알베르 소불 지음, 최갑수 옮김 / 교양인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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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자유여! 그대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범죄가 저질러지는가?”(롤랑 부인) - 87쪽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얼마나 많은 말이 허망해지는가.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약속이 부질없어지는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앞에 ‘자유’를 붙여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는 얼치기가 날뛰고 준엄한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위정자들이 또 얼마나 개인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 불철주야 헛된 말들과 약속을 남발하고 있는가.

독학자의 서재를 채우는 귀한 가르침을 만날 때마다 옷깃을 여민다. 알베르 소불의 『프랑스 혁명사』는 대중의 인기와 시류에 영합했던 작가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와 대조되는 위대한 작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시작하며 필연적으로 만난 책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일처럼 어떤 책과의 인연도 시절과 맥락이 존재한다. 선택이 오롯이 개인의 자유의지가 아니듯 숱한 책을 만나고 읽고 잊는 일도 경험과 나이와 시기에 따라 자연스레 물 흐르듯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 나간다.

알베르 소불은 프랑스 혁명을 계급 충돌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습격 사건으로 상징되는 혁명을 제3신분 부르주아가 헤게모니를 거머쥔 사건으로 규정한다. 대다수 농미노가 장인은 신흥자본가와 이해관계가 다르다. 성직자, 귀족을 위한 앙시앙 레짐의 혁파에는 공감하지만 국가의 질서와 체제에 대해서는 관점이 같을 수 없다. 1792년 8월 10일 혁명이 민주주의 혁명에 가깝다면 그 이후에 벌어진 공포정치와 밀물처럼 밀려왔던 반동과 또 다른 혁명과 좌절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과 프랑스의 역사를 다시 보게 한다. 빅토르 위고가 『레 미제라블』 2권 ‘워털루 전쟁’에서 장엄하게 묘사했듯 “만약에 1815년 6월 17일과 18일 사이의 밤에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유럽의 미래는 달라졌으리라.” 유럽의 헤게모니를 넘겨준 프랑스는 1830년, 1848년 그리고 1968년에도 계속해서 ‘혁명’의 끈을 놓지 않았다. 마치 혁명의 활화산처럼 폭발하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준비하며 유럽의 역사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792년 이후, 유럽의 모든 혁명들은 프랑스혁명에 불과하다. 자유는 프랑스로부터 사방으로 비쳐 간다. 그것이야말로 태양의 행위 같은 것이다. 그것을 보지 못하는 자는 소경이다! 그렇게 말한 것은 보나파르트다.”라는 빅토르 위고의 말이 프랑스 혁명의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우리에게 각인된 1789년 이전과 이후의 전후 맥락을 상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영국과 프랑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역학관계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동한다. 합스부르크가의 이야기가 여전히 숱한 영화, 드라마로 재생산되며 흥미를 유발하는 건 단순히 지나간 시간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니라 숱한 우연과 필연이 빚어내는 결정적 순간에 대한 아쉬움 혹은 환희가 아닐까.

알베르 소불의 이야기에 파묻혀 3박 4일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혐오, 분노, 좌절, 환희, 안타까움, 희망, 비참, 안도, 허망...... 거대한 파노라마처럼 숱한 감정의 회오리를 경험했다. 여전히 논쟁 중인 혁명에 대한 분석과 해석은 ‘관점’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최갑수가 역자 후기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듯 소불에 대한 다양한 평가는 역사들의 몫이다. 지구 반대편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프랑스 혁명사를 들여다보며 느낀 감회는 남다르다. 문학, 역사, 철학, 사회,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그 빛과 그림자가 여전한 프랑스 혁명의 세세한 기록을 살피는 일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1789년 조선은 영조 13년으로 수원 팔달산 화산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현륭원을 조성한다. 11살에 뒤주에서 죽어가는 아버지를 목격한 아들의 슬픔이 수원화성으로 빚어질 무렵이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보나파르트의 워털루 패배가 밤새 내린 비와 숱한 우연의 겹침인 것처럼 역사는 때때로 아이러니하게도 ‘가정법’을 허락하지 않는다. 성직자와 귀족의 비율, 그들이 점유한 토지...왕의 절대 권력과 신의 이름을 팔아 교회와 수도원, 성직자들이 누린 특권, 세습 귀족이 가진 부와 명예를 필연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이라는 생각은 결과론적 판단이 아니다. 오로지 생존의 극단에서 벌어진 반란과 혁명의 불씨가 횃불로 번진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그것이 당대 프랑스와 유럽 그리고 현재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그들의 생각과 삶의 태도를 반영한 정치인들의 발언이 단순한 ‘말실수’ 용인되고 친 재벌 정책과 사학재단의 비리에 관대한 시민들의 시선과 태도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경제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간극이 메워지지 않는 건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알지 못하는 부족한 현실 인식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와 그냥 민주주의는 어떻게 다른가. 프랑스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끝날 수 없다.

구체제에 위기가 부르주아 혁명과 민중 운동을 초래하고 혁명정부가 들어섰으나 결국 유산자가 지배하는 부르주아 공화국으로 귀결됐다. 알베르 소불은 결론을 덧붙여 혁명과 현대 프랑스를 조망한다. 국민적 통합과 권리의 평등 그리고 혁명의 유산을 살피는 과정은 대한민국의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현대사회는 거대한 인류 공동체로 기능하기 때문에 당연할 수도 있으나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과 미래를 돌아보는 데도 『프랑스 혁명사』는 매우 중요한 텍스트다.

혁명, 그것은 ‘위로부터’ 강제될 수 없다. ‘개혁’이 ‘위로부터’ 주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혁명은 필연적으로 ‘아래로부터’ 강제되는 것이다. 개혁은 사회의 기본 구조를 흔들지 않으며, 오히려 지배적인 사회 범주들의 지속적인 이익을 위해 기존의 구조를 보듬는다. - 혁명이란 무엇인가(‹사상› 제217~218호, 1981년 1월~2월, ‘국가’와 ‘사회’ 특집호), 7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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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1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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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2년생인 빅토르 위고는 1862년에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을 발표한다. ‘불쌍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상충한다. 기준과 범주에 따라 ‘가난’도 다르다. 프랑스어 ‘misérable’은 형용사와 명사로 불쌍하고 비참한 상태와 사람, 매우 가난한 상태와 사람을 가리킨다. 고전은 대개 역사가 담아내지 못한 현실의 모순을 담아낸다. 무명씨들의 집합이 실제 역사라는 생각은 미시사微時史 연구의 출발이지만 부분이 전체를 담아낼 수 없듯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 조각난 개별적 사실들이 모여 흐름을 이루고 커다란 흐름에는 반드시 미처 확인하지 못한 지류와 흔적들이 남는다. 그것이 비록 주류가 아니더라도 엄연히 존재했던 사람들이며 사실들이다.

1부 팡틴, 2부 코제트, 3부 마리우스, 4부 플뤼메 거리의 서정시와 생 드니 거리의 서사시, 5부 장 발장 중 1부 팡틴을 읽었다. 소설의 시작은 ‘올바른 사람’이다. 빅토르 위고는 미리엘 주교를 올바른 사람의 전형으로 내세운다. 신의 뜻을 실천하는 자, 이상적 종교인을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가톨릭 사제로서 갖춰야 할 삶의 자세와 마음가짐이 새삼스럽지 않다. 태도가 한 인간의 본질을 결정한다. 인간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미리엘 주교는 언행일치를 보여주는 존재로 레 미제라블 중 하나인 장 발장을 자연스레 신에게 인도한다. 설교와 바이블이 아니라 일상적 태도와 진정성으로.

뒤이어 등장하는 1부의 주인공 팡틴은 당대 사회의 비정함을 보여주기 위한 희생양이다. 코제트의 양육자 테나르디에 부부와 자베르는 악인의 전형이 아니다. 그저 모두 레 미제라블이다. 곤궁하면 가난한 이웃을 먼저 물어뜯는다. 갑이 아닌 을, 병, 정들의 난투극은 오랜 역사다.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는 그 자체로 모순된 표현이나 도달하기 어려운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누가 장 발장을 손가락질 할 것인지 묻기 전에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모든 레 미제라블이 오늘을 사는 나의 모습은 아닌지 되돌아본다.

조르조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란 사람들이 범죄자로 판정한 자를 말한다.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는 않는’ 존재라고 말한다. 팡틴과 같은 희생양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는 없었다. 우리는 그들을 추방(터부)되어야 존재로 인식한다. 사케르Sacer란 건드렸을 경우 자신이나 남을 오염시키는 그런 사람 혹은 사물을 가리킨다. 여기서 ‘신성한’ 또는 (대략 유사하게는) ‘저주받은’이라는 이중적 의미가 유래한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에서 루시 마네트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여성의 전형으로 등장했다면 팡틴은 레 미제라블 조차 배제하고 싶었던 호모 사케르의 전형이 아닐까.

아라스는 유서 깊은 곳이다. 국왕 처형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던 급진파 로베스피에르가 제3신분 대표로 선출된 곳이다. 장 발장이 아라스로 가지 않기 위한 필연적 이유를 찾는 본능과 인간적 양심 사이에서 고뇌하는 장면이 1권의 압권이다. 마차를 들어올리고 자베르와 대면하고 법정에서 내가 장 발장이라고 외치는 장면은 표면적 서사에 불과하다. 미리엘 주교로 출발한 이야기는 장 발장의 고민으로 절정을 이룬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장소, 공간적 배경은 작가의 의도와 주제를 읽는데 유의미하다. 예를 들어 가짜 장 발장으로 오해받는 샹 마티외 재판이 열리는 법정은 아라스에 있다. 로베스피에르는 이 곳에서 《아라스 국민nation에게 드리는 호소》를 발표했다. 또한 미리엘 주교의 은그릇을 훔친 장 발장의 이야기는 프랑스혁명 당시 제헌의회 의원들은 교회가 소유한 재물을 공격했으며 관련 법령은 ‘예배의 규범 유지’에 꼭 필요하지 않은 모든 은그릇을 처분하라고 규정과 관련해서 어떤 해석이 가능할까.

역사는 현실을 넘어설 수 없고 현실은 역사보다 비극적이다. 빅토르 위고는 역사와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며 “법률과 풍습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문명의 한복판에서 지옥을 만들고 인간적 숙명으로 신성한 운명을 복잡하게 만드는 영원한 사회적 형벌이 존재하는 한, 무산계급에 의한 남성의 추락, 기아에 의한 여성의 타락, 암흑에 의한 어린이의 위축, 이 시대의 이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떤 계급에 사회적 질식이 가능한 한, 다시 말하자면, 그리고 더욱 넓은 견지에서 말하자면,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 책 같은 종류의 책들도 무익하지 않으리라.(1862년 1월 1일, 오트빌 하우스에서)”라는 말로 소설을 시작한다.

2부의 주인공 코제트를 내세워 또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지 모르겠으나 숱한 뮤지컬과 영화를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스토리 너머에 숨어 있는 텍스트 사이사이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지루한 장광설과 만연체 문장, 개성적 인물에 대한 아쉬움이 있으나 “도시에는 말 많은 사람은 흔해도 생각 있는 사람은 드물다.”와 같은 경구, 소설 내용과 별 상관없이 빅토르 위고의 속내를 내비치는 문장을 읽는 재미가 긴 호흡의 소설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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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찰스 디킨스 선집
찰스 디킨스 지음, 권민정 옮김 / 시공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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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하라, 지옥문이 열릴 것이다.

인스타그램에는 불행이 없다. 헬스와 필라테스로 관리한 몸, 최신 유행 패션과 소품, 세련된 인터레리와 수입 가구, 화려한 조명과 미슐랭 가이드 음식점, 오마카세 데이트와 다양한 취미, 풀빌라 휴양지와 풍경 사진.... 자기 삶의 가장 아름답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 기록하고 싶은 욕망은 권장할만하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광고와 밴드왜건 효과는 불행을 양산하고 욕망을 창출하며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천국의 열쇠 대신 지옥문의 손잡이를 돌린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차리리 모든 걸 전복하는 혁명이 장기적 관점에서 쉽고 빠른 방법이다. 점진적 변화와 발전에 대한 희망은 신기루처럼 현실의 고통을 견디고 미래를 위해 남겨둔 비밀 처방전이 아닐까. 범주가 다르지만 남자와 여자, 청년과 노인, 동양과 서양, 서울과 지방, 한국과 일본, 대구와 광주, 유럽과 미국, 과거와 현재, 오늘과 내일을 비교하는 건 어떤가. 빅토리아 여왕 시절, 찰스 디킨스의 장편 소설은 대중의 폭발적 지지와 관심의 대상이었다. 헐벗고 굶주린 대다수 평민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냈기 때문이다. 낭만적 사랑과 연애가 아니라 현실적 고통과 일상적 삶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대한 유산』과 달리 『두 도시 이야기』는 읽는 내내 불편했다. 프랑스 혁명의 주체로 등장하는 대표적 개인 ‘드파르주’와 주변사람들에 대한 묘사, 마네트 박사의 투옥 원인부터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적 여성상을 보여주는 루시 마네트, 객관적 사무원으로 등장하는 자비스 로리 등 등장인물들에 대한 찰스 디킨스의 심리적 거리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현실을 담아내 고고학에 버금가는 고현학考現學이라 평가받았던 박태원의 『천변풍경』,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등은 서술자가 풍경에 개입하지 않는 관찰자의 역할에 머문다. 이 소설도 전지적 작가 시점을 유지하고 있으나 18세기 중반 영국의 노동 현실, 말하자면 페르낭 브로델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Ⅱ-2 교환의 세계』에서 “도시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곳은 주지하다시피 근대성의 원형이며, 근대 국가와 국민경제가 탄생할 때 모델이 되었다. 도시는 늘 다른 사회를 희생해가면서 축적과 부의 장소가 되었다.”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21세기의 도시도 다르지 않다. 자본의 축적과 경쟁 이외의 장소로 평가받을 만한 요소가 남아 있을까. 그래서 사람 사는 곳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마을을 이루고 삶이 이어지지만 기본적으로 도시적 삶의 원형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비교하는 두 도시, 즉 런던과 파리는 유럽의 근대적 삶을 적확하게 드러낸다. “젠트리(gentry)라는 말은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상층을 가리킨다. 이 층은 상업을 통해서 부를 쌓았지만 한두 세대 전부터 상점과 계산대를 떠나서, 즉 상품을 직접 다루고 장부를 작성하는 일로부터 해방되어서 이제는 대토지를 경영하거나 돈놀이를 하거나 안전한 가산(家山)이 된 국왕 정부의 관직을 구입함으로써 부와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알뜰하고 보수적인 사람들이다.”, 또한 “부르주아지(bourgeoisie)라는 용어는 부르주아(bourgeois)라는 용어와 운영을 같이했다. 두 용어 모두 12세기부터 사용한 말이다. 부르주아란 한 도시의 특권 시민을 가리켰다. 그러나 이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이 말은 지역이나 도시에 따라 16세기 말이나 17세기 초에 가서 널리 퍼졌으며, 18세기에 가서 일반화되었고, 프랑스 혁명이 이 말을 대단히 널리 쓰이도록 만들었다.” 젠트리와 부르주아는 전체 인구의 극소수에 해당한다. 이들은 마르크스의 분석을 실천하며 축적에 축적을 더해 자본이 굴러가며 증식하는 신비한 꿈과 환상의 미래를 맞이한다. 그런데 노동자와 농민들은?

1775년 11월 현재를 작가는 “최고의 시절이었고, 최악의 시절이었고,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고, 믿음의 세기였고, 불신의 세기였고,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고,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고,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에 아무것도 없었고, 우리는 모두 천국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고 있었고, 우리는 모두 천국을 등진 채 반대로 나아가고 있었다.”라고 회고한다. 1859년, 그러니까 프랑스 대혁명을 거쳐 공화정이 수립된 파리의 모습을 런던에서 바라보는 찰스 디킨스는 오래된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휴머니즘도 인류애도 아닌 시드니 카턴의 마지막 바꿔치기 기술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시대의 모순 혹은 혁명에 따른 부작용, 또는 헤게모니를 가진 인간의 속성에 대해 조금 더 깊이 고민할 순 없었을까. 런던에서 도버 바다 건너 칼레에서 생탕투안을 왕복하며 벌어지는 마네트 박사 일가와 얽힌 혁명의 뒷담화를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지 궁금해졌다.

문학은 현실원칙을 넘어선 자리에 놓인 인간의 쾌락원칙을 위한 면죄부가 아닌가. 소설적 상상력과 구성의 탄탄함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1775년은 조선의 영조 51년, 미국 독립 전쟁이 한창인 시절이다. 프랑스 민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며 혁명의 횃불을 지켜든 1789년이 인류사에 남긴 족적은 형언하기 어렵다. 유럽의 민주주의는 왜 미국가 다른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왜 비판적 성찰 없는 진영논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가. 스스로 왕의 목을 쳐 본 시민들의 자유와 평등과 우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외침이 당대 사회와 인류의 역사를 어떻게 뒤바꿔 놓았는가. 역사소설로서 가져야 하는 무게와 역할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큰 탓이었는지 모르겠으나, 거시적 관점에서 다루기엔 너무 버거운 주제였을 지도 모르겠으나 두 도시 이야기는 시대의 산물로서 당대를 살아냈던 혁명 과정의 희생양 혹은 윤리적 딜레마에 관한 보고서로 읽혔다. 당대의 기나긴 만연체 문장과 고대 영어를 번역하며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는 번역자의 고백까지 찬찬히 살폈으나 아쉬움이 지워지진 않는다. ‘근대’가 주는 위로, 당대성을 배제한 고전읽기의 어려움은 모든 독자들이 겪는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 독법 차이일 수도 있다. 그래도, 고전이 주는 의미는 현재적 유용성에서 관한 고민에서 출발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상상력이 기록되기 시작한 이래 상상된 것들 가운데 온갖 게걸스럽고 탐욕스러운 괴물들을 하나로 융합하여 만들어낸 것이 있었으니, 바로 기요틴이었다. - 6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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