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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ㅣ 찰스 디킨스 선집
찰스 디킨스 지음, 권민정 옮김 / 시공사 / 2020년 3월
평점 :
비교하라, 지옥문이 열릴 것이다.
인스타그램에는 불행이 없다. 헬스와 필라테스로 관리한 몸, 최신 유행 패션과 소품, 세련된 인터레리와 수입 가구, 화려한 조명과 미슐랭 가이드 음식점, 오마카세 데이트와 다양한 취미, 풀빌라 휴양지와 풍경 사진.... 자기 삶의 가장 아름답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 기록하고 싶은 욕망은 권장할만하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광고와 밴드왜건 효과는 불행을 양산하고 욕망을 창출하며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천국의 열쇠 대신 지옥문의 손잡이를 돌린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차리리 모든 걸 전복하는 혁명이 장기적 관점에서 쉽고 빠른 방법이다. 점진적 변화와 발전에 대한 희망은 신기루처럼 현실의 고통을 견디고 미래를 위해 남겨둔 비밀 처방전이 아닐까. 범주가 다르지만 남자와 여자, 청년과 노인, 동양과 서양, 서울과 지방, 한국과 일본, 대구와 광주, 유럽과 미국, 과거와 현재, 오늘과 내일을 비교하는 건 어떤가. 빅토리아 여왕 시절, 찰스 디킨스의 장편 소설은 대중의 폭발적 지지와 관심의 대상이었다. 헐벗고 굶주린 대다수 평민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냈기 때문이다. 낭만적 사랑과 연애가 아니라 현실적 고통과 일상적 삶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대한 유산』과 달리 『두 도시 이야기』는 읽는 내내 불편했다. 프랑스 혁명의 주체로 등장하는 대표적 개인 ‘드파르주’와 주변사람들에 대한 묘사, 마네트 박사의 투옥 원인부터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적 여성상을 보여주는 루시 마네트, 객관적 사무원으로 등장하는 자비스 로리 등 등장인물들에 대한 찰스 디킨스의 심리적 거리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현실을 담아내 고고학에 버금가는 고현학考現學이라 평가받았던 박태원의 『천변풍경』,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등은 서술자가 풍경에 개입하지 않는 관찰자의 역할에 머문다. 이 소설도 전지적 작가 시점을 유지하고 있으나 18세기 중반 영국의 노동 현실, 말하자면 페르낭 브로델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Ⅱ-2 교환의 세계』에서 “도시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곳은 주지하다시피 근대성의 원형이며, 근대 국가와 국민경제가 탄생할 때 모델이 되었다. 도시는 늘 다른 사회를 희생해가면서 축적과 부의 장소가 되었다.”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21세기의 도시도 다르지 않다. 자본의 축적과 경쟁 이외의 장소로 평가받을 만한 요소가 남아 있을까. 그래서 사람 사는 곳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마을을 이루고 삶이 이어지지만 기본적으로 도시적 삶의 원형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비교하는 두 도시, 즉 런던과 파리는 유럽의 근대적 삶을 적확하게 드러낸다. “젠트리(gentry)라는 말은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상층을 가리킨다. 이 층은 상업을 통해서 부를 쌓았지만 한두 세대 전부터 상점과 계산대를 떠나서, 즉 상품을 직접 다루고 장부를 작성하는 일로부터 해방되어서 이제는 대토지를 경영하거나 돈놀이를 하거나 안전한 가산(家山)이 된 국왕 정부의 관직을 구입함으로써 부와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알뜰하고 보수적인 사람들이다.”, 또한 “부르주아지(bourgeoisie)라는 용어는 부르주아(bourgeois)라는 용어와 운영을 같이했다. 두 용어 모두 12세기부터 사용한 말이다. 부르주아란 한 도시의 특권 시민을 가리켰다. 그러나 이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이 말은 지역이나 도시에 따라 16세기 말이나 17세기 초에 가서 널리 퍼졌으며, 18세기에 가서 일반화되었고, 프랑스 혁명이 이 말을 대단히 널리 쓰이도록 만들었다.” 젠트리와 부르주아는 전체 인구의 극소수에 해당한다. 이들은 마르크스의 분석을 실천하며 축적에 축적을 더해 자본이 굴러가며 증식하는 신비한 꿈과 환상의 미래를 맞이한다. 그런데 노동자와 농민들은?
1775년 11월 현재를 작가는 “최고의 시절이었고, 최악의 시절이었고,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고, 믿음의 세기였고, 불신의 세기였고,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고,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고,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에 아무것도 없었고, 우리는 모두 천국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고 있었고, 우리는 모두 천국을 등진 채 반대로 나아가고 있었다.”라고 회고한다. 1859년, 그러니까 프랑스 대혁명을 거쳐 공화정이 수립된 파리의 모습을 런던에서 바라보는 찰스 디킨스는 오래된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휴머니즘도 인류애도 아닌 시드니 카턴의 마지막 바꿔치기 기술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시대의 모순 혹은 혁명에 따른 부작용, 또는 헤게모니를 가진 인간의 속성에 대해 조금 더 깊이 고민할 순 없었을까. 런던에서 도버 바다 건너 칼레에서 생탕투안을 왕복하며 벌어지는 마네트 박사 일가와 얽힌 혁명의 뒷담화를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지 궁금해졌다.
문학은 현실원칙을 넘어선 자리에 놓인 인간의 쾌락원칙을 위한 면죄부가 아닌가. 소설적 상상력과 구성의 탄탄함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1775년은 조선의 영조 51년, 미국 독립 전쟁이 한창인 시절이다. 프랑스 민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며 혁명의 횃불을 지켜든 1789년이 인류사에 남긴 족적은 형언하기 어렵다. 유럽의 민주주의는 왜 미국가 다른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왜 비판적 성찰 없는 진영논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가. 스스로 왕의 목을 쳐 본 시민들의 자유와 평등과 우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외침이 당대 사회와 인류의 역사를 어떻게 뒤바꿔 놓았는가. 역사소설로서 가져야 하는 무게와 역할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큰 탓이었는지 모르겠으나, 거시적 관점에서 다루기엔 너무 버거운 주제였을 지도 모르겠으나 두 도시 이야기는 시대의 산물로서 당대를 살아냈던 혁명 과정의 희생양 혹은 윤리적 딜레마에 관한 보고서로 읽혔다. 당대의 기나긴 만연체 문장과 고대 영어를 번역하며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는 번역자의 고백까지 찬찬히 살폈으나 아쉬움이 지워지진 않는다. ‘근대’가 주는 위로, 당대성을 배제한 고전읽기의 어려움은 모든 독자들이 겪는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 독법 차이일 수도 있다. 그래도, 고전이 주는 의미는 현재적 유용성에서 관한 고민에서 출발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상상력이 기록되기 시작한 이래 상상된 것들 가운데 온갖 게걸스럽고 탐욕스러운 괴물들을 하나로 융합하여 만들어낸 것이 있었으니, 바로 기요틴이었다. - 6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