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추천받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재밌게 본 적이 있다. 고애신의 정혼자 김희성은 룸펜답게 “나는 이리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뭐 그런 것들.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다 죽는 것이 나의 꿈이라면 꿈이오.”라고 말한다. 그의 입에서 자주 반복되는 ‘아름답고 무용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이익이 되지 않는 건 관심도 없는 사람도 있다.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로 양분하기 어렵지만 모든 사람은 각자 선택한 삶의 방법과 태도를 찾는다. 삶에 필요한 실용적이고 유용한 것은 무엇이며,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무용한 것은 또 무엇일까. 사랑과 우정, 이상적 꿈과 희망은 무용한 걸까. 라캉은 오래전에 ‘욕망(desire)=요구(demand)-필요(need)’라는 공식을 만든 적이 있다. 그라데이션으로 물든 석양처럼 비율의 문제일 뿐 모든 인간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매일 좌절하는 게 아닐까.
수학자 하디는 ‘하찮은 수학은 유용하지만 지루하고, 진정한 수학은 아름답지만 무용하다’고 주장했다. 유시민은 전형적인 ‘문과’ 남자다. 사유 방식,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방식이 과학자의 태도와 크게 다르다. 분과 학문 내에서도 점점 전문 분야가 세분화되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지식과 정보량이 폭발적으로 늘고 좀 더 디테일하게 깊이 들여다봐야 할 일이 많아졌으니까. 하지만 이런 학문 풍토는 전문가 바보를 양산한다. 같은 전공 안에서도 연구 분야가 다르면 생각과 태도가 전혀 다를 수 있다. 하물며 인문학적 사고에 익숙한 사람에게 자연과학의 세계는 낯설기만 하다. 어쩌면 ‘인간’ 중심주의의 폐해에 가까운 재앙이다. 반면 과학적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없는 답을 찾아 헤매고 논쟁하는 인문주의자들의 말과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에드워스 윌슨은 ‘통섭consilience’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했고 수많은 비판과 논란에도 불구하고 최재천은 통합교육을 강조했으며 이는 교육과정에 일부 반영되어 현실적인 문제를 보완하고 수정하려 노력 중이다. 하지만 이미 고정 관념인 줄도 모르고 자기 관점과 견해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공부는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인간과 사회와 생명과 우주를 이해하는 일’이라는 유시민의 말은 유용한가, 무용한가. 단순히 책을 읽는 행위에 머물지 않고 지식과 정보를 탐하는 사람들의 호기심과 학습력은 인간과 세상을 향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곧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독서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부여잡고 무엇엔가 몰두하고 새로운 앎의 세계로 빠져든다. 영어 단어를 외고 수학 문제를 푸는 게 공부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면 아이들 컴퓨터게임과 다름없는 재미와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게 공부다. 호모 사피엔스의 ‘호기심’과 ‘궁금증’은 본능에 가깝지 않은가. 우리는 공부 DNA를 가진 채 태어난다. 그 유전자를 어디에 활용하며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지는 물론 오롯이 개인의 선택이다.
이 책은 자연과학 교양서에 관한 거대한 서평이다. 소개된 책이 너무 많아 다 소개하기 어렵지만 읽지 않았거나 다시 읽고 싶은, 관심이 가는 목록은 다음과 같다.
E. K. 헌트의 경제사상사, E. K. 헌트, 마크 라우첸하이저, 홍기빈 역, 시대의 창, 2015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스티븐 핑거, 김명남 역, 사이언스북스, 2014
물질의 물리학, 한정훈, 김영사, 2020
세계를 바꾼 17가지 방정식, 이언 스튜어트, 김지선 역, 사이언스북스, 2016
눈먼 시계공, 리처드 도킨스, 이용철 역, 사이언스북스, 2004
맹자,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길, 이혜경, 그린비, 2008
뇌 과학의 모든 역사, 매튜 코브, 이한나 역, 심심, 2021
진화하는 진화론, 스티브 존스, 김혜원역, 김영사, 2008
다윈주의 좌파, 피터 싱어, 최정규 역, 이음, 2011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라인홀드 니버, 이한우 역, 문예출판사, 2000,
화학 연대기, 장홍제, EBS, 2021
원소의 왕국, 피터 앳킨스, 김동광 역, 사이언스북스, 2005
통섭, 에드워드 윌슨, 최재천·장대익 역, 사이언스북스, 2005
엔드 오브 타임, 브라이언 그린, 박병철 역, 와이즈베리, 2021
불확실성의 시대, 존 K. 갤브레이스, 원창화 역, 홍신문화사, 2011
김상욱의 양자 공부, 김상욱, 사이언스북스, 2017
E=mc², 데이비드 보더니스, 김희봉 역, 웅진지식하우스, 2014
원자폭탄 만들기 1, 2, 리처드 로즈, 문신행 역, 사이언스북스, 2003
수소폭탄 만들기, 리처드 로즈, 정병선 역, 사이언스북스, 2016
내가 누구인지 뉴턴에게 물었다, 김범준, 21세기북스, 2021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박권, 동아시아, 2021
세상의 모든 수학, 에르베 레닝, 이정은 역, 다산사이언스, 2020
우리 수학자 모두는 약간 미친 겁니다, 폴 호프만, 신현용 역, 승산, 1999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사이먼 싱, 박병철 역, 영림카디널, 2022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등 대표적인 과학 분야의 책을 읽는 독자, 과학을 전공한 독자, 과학 분야에 평소 관심이 있는 독자가 아니면 이 책에 흥미를 느끼기 어렵다. 혹시 유시민에 대한 팬심이라면 더더욱 다른 책을 권한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았던 사람들이라면 인문학이 아니라 자연과학으로부터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와 같은 질문에서 ‘나는 무엇인가’로 질문을 바꾸라는 충고다. 개인적으로 지나치게 동의하고 지지하며 읽었다. 여러 과학 교양서에서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많고 물리, 화학, 생물, 수학 등 기본적인 과학 분야가 왜 필요하며 그것이 어떻게 ‘나’를 설명할 수 있는지, 또 그것이 왜 ‘우리’에게 필요한지 설득하는 글이다. 환원주의 위험성과 필요성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에서 조금 차이가 있다. 필립 볼의 『원소』나 김상욱의 양자역학 이야기를 읽을 때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무용하지만 아름다운 과학은 없다. 우주와 자연을 읽어낼 수 있는 언어인 수학을 포기한 지 오래라도 세상 만물에 대한 관찰과 지식은 어떤 방식으로든 각자의 삶에 실용적 유용성을 갖는다. 그것이 응용학문으로서 공학과 산업으로 연결되든 삶의 태도와 가치에 대한 고미이든.
과학을 공부하는 인문쟁이들의 목적과 태도는 각자 다를 것이다. 드물기는 하지만 수학과 공식이 아닌 인간의 언어로 세계를 설명하는 과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오해와 분노가 싹튼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내가 모른다는 사실 정도는 확인하며 살고 싶은 욕망이 책을 통해 조금은 실현된다고 믿는다. 유시민의 생각과 태도에 동의하고 공감하는 이유는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삶에 주어진 의미는 없다.’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찾지 못한다. 남한테 찾아 달라고 할 수도 없다. 삶의 의미는 각자 만들어야 한다. ‘내 인생에 나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 ‘어떤 의미로 내 삶을 채울까?’ 이것이 과학적으로 옳은 질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그런 것을 연구하지 않는다. 질문은 과학적으로 하되 답을 찾으려면 인문학을 소환해야 한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인문학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 1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