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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 ㅣ 환상문학전집 23
크리스타 볼프 지음, 김재영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평점 :
고전의 재해석은 패러디라기보다 일종의 오마주가 아닐까 싶습니다. 현재적 유용성을 따지기 전에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은 인류가 공유하는 문화적 유전자인 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주는 재미, 서사를 통해 얻는 교훈, 인간 본성에 관한 성찰, 지나간 시간에 대한 추억뿐만 아니라 지금-여기 발 딛고 선 ‘나’를 위한 위로와 격려가 고전이 주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네 고통과 슬픔도 사실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부과 권력도 언젠간 스러지고 생은 언제든 비극적 결말을 준비하고 있다고.
크리스타 볼프는 프랑스 문학이론가 제라르 주네트Gérard Genette의 ‘아크로니achrony(시간의 흐름을 무시하고 사건들을 동시에 일어난 것처럼 배열하는 이야기 방식. 비시간적 서술.)’와 ‘마트료시카матрёшка(하나의 큰 인형 속에 여러 개의 작은 인형들을 크기가 점차 작아지는 순서로 집어넣은 러시아의 전통 인형. 비옥한 토지와 다산을 의미. 러시아어 여자 이름인 ‘마트료나Матрёна’의 애칭.)’를 소개하며 소설을 시작합니다. 문제적 여인 메데이아는 자식을 죽였는가, 동생을 살해한 범인도 메데이아일까, 아버지와 조국을 배반한 이유가 단순히 이아손을 향한 사랑때문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한 여인의 삶은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와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찾아 읽는 수고와 무관하게 독자 개인의 관점과 태도를 돌아보게 합니다.
평온한 일상일 때는 모릅니다, 한 인간의 본성과 내면을. 위기의 순간, 힘겨운 시절을 지나고 나면 알게 됩니다, 내 곁에 남은 사람을. 메데이아와 이아손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르고호 원정의 목적은 황금 양털이 아니라 이올코스의 왕위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메데이아의 도움을 받아 황금 양털을 얻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코린토스에 도착한 이아손이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로 끝낼 리 없습니다. 아버지 아이손이 잃어버린 왕권을 찾으려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아손의 어머니는 마미손이 아니라 알키메데입니다. 코린토스의 딸이 젊고 예뻐서가 아니라 자기 삶의 지향점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아손을 위한 변명은 비난받아 마땅한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쎈 언니의 대명사 메데이아가 눈뜨고 당할 리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메데이아는 물론, 이아손, 아가메다, 아카마스, 글라우케, 로이콘 등 6명의 등장인물이 각각 제 목소리를 냅니다. 도대체 그때 코린토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소설의 원제는 ‘Medea, Stimmen’, 메데이와 목소리들입니다. 살로메, 유디트 같은 팜 파탈로 보는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메데이아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에 대한 평가는 시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모임에서도 주된 논의는 메데이아에 대한 재평가, 이아손에 대한 논란, 아카마스의 욕망 뿐만 아니라 신화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평소 신화에 관심이 많고 배경지식이 풍부한 분이 사회를 맡아 논의가 풍성했습니다. 소설제목처럼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작가가 바라보는 주관적 해석과 평가가 아니라 다양한 인물의 목소리를 통해 메데이아와 당시 상황을 입체적으로 상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익숙한 이야기를 보다 깊게 들여다보고 각자의 입장과 위치에서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수많은 변명 혹은 그럴듯한 상황을 읽는 시간이었습니다.
메데이아의 동생과 이아손 사이에 낳은 아이 둘을 과연 메데이가 죽였을까요, 코린토스의 공주까지? 제작비를 고려한 흥행 압박으로 에우리피데스가 막장 드라마를 쓴 건지 알 수 없으나 가장 강력한 캐릭터 중 하나인 메데이아는 입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키르케, 판도라, 카산드라 등 새로운 시각으로 재조명해 보고 싶은 인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모임을 마무리했습니다.
생명과 분별력을 가진 만물 중에 우리 여자들이 가장 비참한 존재예요. 첫째, 우리는 거금을 주고 남편을 사서 우리 자신의 상전으로 모셔야 해요. 이 가운데 두 번째 불행이 첫 번째 불행보다 더 비참해요. 다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얻는 남자가 훌륭하냐 나쁘냐 하는 거예요. 헤어진다는 것은 여자들에게 불명예스럽고, 남편을 거절하기도 불가능하니까요. 새로운 관습과 규범 속에 뛰어든 여자는 집에서 배운 적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남편을 가장 잘 다룰지에 관해 점쟁이가 되지 않으면 안 돼요.
- 「메데이아」중에서, 메이아의 독백(코로스에게), 230행~(38쪽)
에우리피데스가 쓴 비극의 일부입니다. 번역가 천병희는 “메데이아는 결론에서 인간을 움직이는 대립적인 두 힘은 격정thymos과 숙고bouleumata며, 이 가운데 격정이 숙고보다 우세해지면 그것이 곧 인간에게 재앙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라고 해석합니다. 과연 우리는 ‘격정’과 ‘숙고’ 중 어느 쪽에 무게 중심을 두고 살까요. 나이, 성별, 직업,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열정과 냉정 사이에서 망설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메데이아의 목소리는 전혀 다르게 들릴 지도 모릅니다. 정답 없는 인생이라고 삶은 계속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