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크 - 제2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희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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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을까. ‘그리움’이란 단어를 잊고 살았다. 잊고 사는 단어들을 떠올리는 순간이 온다. 제임스 W. 페니베이커는 『단어의 사생활』에서 “결국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의 총합이다.”라고 했다. 빈번하게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법이다. 그러니 한곳에 머물지 않고 흐르듯 사람도 변한다. 어제와 같은 나는 없다. 존재의 연속성은 단순히 습관과 기질 혹은 기억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비관적인 평가일지 모르나 모든 사람은 매일 죽는다. 그리고 매일 다시 태어난다.

그 허망함을 견디지 못한 인간의 최고 발명품이 종교다. 상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종 특성을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에겐 ‘믿음’이 내재한다. 대상이 무엇이든, 기간이 얼마든, 방법이 어떠하든. 김희재의 『탱크』는 종교소설이 아니다. 그러나 믿음의 이쪽과 저쪽을 다룬다는 점에서 해석의 다양성을 열어 놓은 좋은 소설이다. 소설의 탱크는 ‘Subconscious Tank(잠재의식 탱크)’의 준말이다. 텅빈 컨테이너 박스가 탱크 역할을 한다. 믿음의 대상과 종교적 도그마는 없다.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할 뿐. 통렬한 자기반성이든, 현실적 욕망 실현의 기원이든, 미래를 향한 염원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이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으로 데뷔한 김희재는 영화를 전공했다. 장면 전환이나 구성이 탄탄하고 인물에 대한 거리가 객관적이다. 서사는 기본이다. 재미없는 소설을 읽는 독자는 이제 거의 없다. 소설은 이제 ‘재미’로 경쟁이 불가한 대상이 너무 많아졌다. 과거에 누린 영광은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없다. 나름의 역할과 기능을 찾지 않으면 텍스트 시대의 추억만 곱씹게 된다.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지 않았더라도 이 소설은 흡입력이 높다. 등따시고 배불러 걱정 없는 인물이 소설에 등장할 리 없지 않은가. 실패와 좌절은 주인공의 필수 스펙이다. 문제는 일반화와 공감력이다. 도선과 둡둡과 양우와 황영경과 손부경과 강규산은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탱크를 향해 자기 서사에 충실하다.

그러나 개연성과 핍진성이 결여된 장면이나 표현은 홍범도 장군 영화 배경에 KTX가 지나가는 것과 같다. 회계사 시험 준비를 하는 황영경은 “내년에 시험 합격하면 나갈 세무사도 알아봤고.”라고 말한다. 1, 2차 시험 시기까지 확인한 작가가 왜 이런 표현을 수정하지 않았는지 편집과정에서 걸러내지 못했는지 안타깝다. 앞뒤 문맥을 몇 번이나 읽어봐도 당황스럽다. 춘천교대를 졸업한 손부경이 초등교사 임용시험에 계속 떨어지는 설정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지역별 경쟁률이나 합격률 등을 조사하지 않았을 리 없을 텐데. 옥의 티를 찾아내자는 게 아니라 재밌는 소설을 읽으며 잠시 몰입의 즐거움을 누리려던 욕심이 지나쳤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려는 이기심 때문일 수도.

어쨌든 감각적 문장과 표현을 즐기는 소설과 결이 다르지만 문제의식과 고민의 깊이는 충분해 보인다. 소설도 취향이다. 좋아하는 작가도 제각각이다. 논픽션을 읽는 재미와 달리 소설에서 찾고 싶은 혹은 찾으려는 ‘쾌락원칙’에 대한 욕망의 모양과 부피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리라. 적어도 내게는 충분했다. 입체적인 방식으로 인물과 사건을 배치한 구성뿐 아니라 인물에 대한 작가의 지나친 감정 몰입이나 감상적 태도가 없다고 느꼈다. 추천의 말에서 김건형은 “지리멸렬하고 상투적인 세속의 질서에 흡수되지 않도록, 고유한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자기 수행의 형식에 대한 믿음.”이라는 말로 이 소설을 평가했다. 어차피 문학은 현실 너머, ‘세계의 바깥’을 향한 그리움이 아니겠는가.

소설에 썼듯 “모든 미래는 빠짐없이 과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며, 그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계속” 쓰시기를. 소설가 김희재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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