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세계 신화 여행 - 오늘날 세상을 만든 신화 속 상상력
이인식 지음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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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와 코스모스. 혼돈과 질서는 우리 인생처럼 경계가 모호합니다. 평온한 일상이 질서정연하고 안정된 삶이라면 불안하고 흔들리는 미래는 혼돈일 겁니다. 카오스는 가이아를, 다시 가이아는 타드타로스와 닉스와 헤메라를....카이아와 우라노스는 12명의 티탄과 크로노스를...크로노스와 레아는 헤라, 데메테르, 헤스티아, 하데스, 포세이돈, 제우스를...제우스는 수많은...

이 책으로 세계 신화를 처음 시작하는 건 어떠냐고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편적인 사건과 사고, 신들의 에피소드는 훗날 그려진 명화를 설명하고 뒤이어 과학적 사실과 현실의 문제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신화 본래의 맛과 멋과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다만 신화는 어차피 모두 허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신화가 주는 의미,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가 반영된 인류의 무지와 공포와 지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듯 싶습니다. 판테온pantheon에는 12명의 신이 있습니다. 제우스(최고의 신, 신과 인간의 아버지), 헤라(결혼), 아테나(지혜, 예술, 정의), 아폴론(빛, 음악), 포세이돈(바다), 아르테미스(술, 사냥), 아프로디테(미, 사랑), 헤파이스토스(대장장이), 데메테르(농업), 헤르메스(상업), 아레스(전쟁), 헤스티아(가정). 이들은 알 수 없는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인격화한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이해할 수 없는 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합리화하는데 필요했을 거라 짐작합니다. 대표적인 그리스와 로마 신화 뿐 아니라 북유럽, 인도의 신화까지 정리해서 소개한 과학자의 수고로움에 경의를 보냅니다. 다만 신화와 관련된 과학적 사실과 현실의 이야기는 ‘통섭’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신화와 종교라는 전혀 다른 영역을 뒤섞어 독자들에게 혼란을 주는 부분들이 많아 아쉬웠습니다. 모든 걸 뒤섞는 게 통합이나 통섭적 사고가 아니라는 걸 모를 리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어쨌든 이 책은 서른네 가지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구성이지만 중복출연하는 신들이 있으니 서로 연결 고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틈틈이 한 편씩 읽어도 좋은 책입니다. 신화를 많이 읽었다면 과학적 해석에 흥미를, 읽지 않았다면 신화 이야기 자체로도 충분히 재밌게 읽을 수 있습니다. 모임에서는 인어, 바벨탑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동성애, 임사체험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주제는 신화를 떠나 각자의 경험과 생각을 나눴습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든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유토피아와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변치 않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 너무 복잡한 이해관계, 서로 다른 삶의 목적과 방향으로 매일매일 부딪치면서도 함께 사는 사람들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어떤 곳일까요.

이인식은 “세속적인 천년왕국주의는 여러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로버트 오언Robert Owen(1771~1858)의 유토피아 사회주의, 카를 마르크스Karl Marx(1818~1883)의 공산주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의 나치주의가 대표적인 사례이다.”(548쪽)라고 황당한 주장을 하고 세속적 이념과 정치경제적 지향점은 천년왕국주의의 여러 형태가 아닙니다. 이 책의 마무리에 해당하는 유토피아는 신들이 꿈꾼 적도 없고 인간들이 실현할 가능성도 없어 보입니다. 부정적 현실 인식이 아니라 지금-여기보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꿈꿀 권리, 현실적 희망을 놓지 않는 용기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멀리서 오프 모임에 참석해 주신 회원님이 참석하신 모든 분께 선물해 주신 캘리그라피 필통이나 직접 육포를 만들어오신 사회자님의 정성을 감탄하며 사람들이 가진 따뜻함, 이타심에 다시 한번 놀라움을 느낌니다. 저마다 다른 빛깔과 향기로 빛나는 인간은 또 그만큼의 슬픔과 고통을 안고 살아갑니다.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이 부딪치는 자리, 오로지 단 한 권의 책으로 연결된 분들과 이야기 나눌 수 있어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 또 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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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 창비시선 491
유현아 지음 / 창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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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겨울이라고 어는 건 아니다. 몸이 봄이라고 건강해지는 게 아니듯이. 찬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해가 지면 해가 지는 대로 오늘은 과거가 되고 어제와 조금씩 멀어진다. 오래된 기억은 추억으로 갈아입고 선택적으로 갈무리된다. 지나간 모든 일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슬픔과 고통을 외면하고 싶어 즐겁고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려 노력한다. 그러나 치유되지 않는 상처는 현재를 지배하며 영혼을 잠식하고 미래를 채운다.

PTSD로 고통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억울함과 분노를 억압하거나 절망과 슬픔을 눌러 담은 사람에게도 다르지 않다.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이라고 다독여도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시는 슬픔의 미학이다. 유현아의 슬픔은 다른 시인의 슬픔과 다르지 않다는 게 아니라 허무와 냉소, 슬픔과 고통, 절망과 분노의 틈으로 자라는 작은 희망 같은 걸 믿고 싶은 마음에 우리는 시집을 뒤적이는 게 아닌가.

오늘의 달력

어제의 꿈을 오늘도 꾸었다

아무도 위로할 수 없는 절망의 바닥을 보았다

바닥 밑에 희망이 우글우글 숨어 있을 거라고 거짓말했다

한 장을 넘겨보아도 똑같은 달의 연속이었다

못 하는 게 없는 것보다 어쨌거나 버티는 게 중요했다

바닥 밑에 바닥, 바닥 밑에 바닥이 있을 뿐이라고

그럼에도 우리는

바닥에 미세한 금들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보았다

바닥의 목소리가 뛰어올라 공중에서 사라질 때까지

당신의 박수 소리가 하늘 끝에서 별처럼 빛날 때까지

오늘도 달력을 넘기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

당신의 애인에게서 내일의 꿈을 들었다

서시에 해당하는 이 시에서 제목을 골랐다. 양경언은 해설에서 이 시집을 「사라지는 세상을 위한 시」라고 명명한 다음, “유현아의 시에서 희망의 얼굴은 바닥에서 나타난다.”라고 말한다. “아무도 위로할 수 없는 절망의 바닥을 보았다”면 희망은 디폴트 값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사람들은 절망은 바닥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절망의 바닥을 뚫고 내려가려 애쓰기도 한다. 대책 없는 희망, 실현 불가능한 기대는 더 큰 절망을 예비하거나 엄청난 분노로 전환된다.

질문들

광장에서

오늘도 침묵이 침묵처럼 번지고 있다

거짓말들은 모여 거짓말이 되지 않는다

거품처럼 달아난 목소리는 지워진 경계처럼 낯설게 오다 도망친다

저녁이 되면 희미한 빗살무늬 기억이 켜지는 그곳에 치켜뜬 눈들이 박혀 있다

완벽하게 행복해,라는 대답은 새빨간 비문이다

입에서 수많은 물이 넘쳐흘러 도시를 습하게 만들었다


그날 밤에는 별 모양 하나가 반짝이며 광장의 눈동자 속으로 들어왔다

울음을 흡수하지 못한 별의 흉터가 하나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도 침묵이 아니다. “완벽하게 행복해,라는 대답이 새빨간 비문”인 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완벽하게’라는 수식어가 없어도 비문이 아닌 건 아니다. 게으른 햇살이 길게 눕는 아침과 금세 어두워지는 저녁이 멀지 않다. 울음을 흡수하지 못한 별들이 반짝이는 건 눈물 때문이 아니라 투명한 슬픔 때문이다. 외로움과 심심함을 구별하지 못하듯 슬픔과 눈물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 흉터 난 자리마다 이유가 새겨지듯 애써 외면한 일들은 언제나 반드시 정면을 바라본다. 외로 튼 고개를 스칠 때마다 굳이 슬퍼할 이유가 없다.

때때로 찬 바람이 불어야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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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껏 몰랐던 신화의 비밀, 명화의 비밀 - 풍요롭고 지적인 삶을 위한 교양 수업
제라르 드니조 지음, 배유선 옮김 / 생각의길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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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우리는 모두 상승과 하강 곡선을 그리며 산다. 사람들은 기복 없이 평탄한 인생을 꿈꾸지만 그런 인생은 없다. 멀리서 바라보면 남들은 평온한 일상을 즐기는 듯한데 왜 나는 이렇게 힘들게 사는지 억울할 때가 많다. 그것이 경제적인 문제이든 정신적 고통이든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건 타인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없다는 한계 때문일 뿐 누구나 당신만큼 힘들다. 쉬운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인간이 겨우 직립보행을 시작했을 무렵부터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갈망하는 인간의 욕망은 본능처럼 꿈틀거린 게 아닐까. 오로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생명체의 연약함은 외부 세계를 모두 경계와 공포의 대상으로 삼아 차츰 이성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다른 동물에 비해 특별한 능력이나 경쟁력 있는 신체를 갖추지 못했으니 당연한 생존 전략이었을 것이다. 천둥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지고 혹한의 겨울을 맞거나 가뭄을 견뎌야 했던 호모 사피엔스에게 자연은 경외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그 두려움은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게 했으리라. 세계가 저절로 작동하거나 자연현상이 누군가에 의해 지배된다는 생각은 그 시절 지나치게 합리적이서 의심할 수 없는 상식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신화는 어쩌면 잃어버린 인간의 오랜 꿈이거나 호기심과 질문을 쏟아내던 시절을 살아낸 인간의 흔적기관 같은 게 아닐까 싶다. 우리에겐 과거 혹은 고통과 슬픔을 견디는 기적의 물질이 분비된다. 그것은 ‘망각’이다. 지나간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지는 게 아니라 선택적 기억으로 남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만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 어떤 막장 드라마나 현대판 콩가루 집안의 서사를 모두 합쳐놓아도 신화를 능가하지는 못한다. 하늘과 바다, 삶과 죽음, 산과 강, 비와 바람 등 인간이 사는 세상 어디에나 신은 존재한다. 아니,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질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지나치게 인격화된 신은 당혹스럽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인간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라는 점을 외면할 수 있다. 다소 이타적 속성이나 특이한 개체가 없지 않으나 신도 인간을 닮았을 것이라는 오만함이 놀랍다. 명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신은 매우 인간적이다. 간을 뜯어먹히는 프로메테우스부터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까지 대부분 그렇다. 구름과 비 혹은 거위가 되어 욕심을 채우는 신도 없지 않으나 신도 결국 창조자인 인간의 삶에 복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싶어 오히려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합리의 세계, 과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21세기를 사는 인간의 오만일 수도 있으나 지금-여기에서 바라보는 신화 이야기 혹은 명화 속 신들의 모습이 내게는 그렇게 보이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신화>를 주제로 한 책 읽기가 이어지는 중이다. 이 책은 신화를 처음 시작하든 충분한 지식이 있든 상관없다. 그림 자체로도 충분한 예술적 감동을 선사하며 저자가 설명해주는 신화 이야기가 더욱 풍성한 그림 읽기를 가능케 한다. 도상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단 한 장의 그림으로 2시간을 ‘순삭’시켜버린 어떤 강의 때문이었다. 그림의 메인 테마뿐 아니라 구석구석 배치된 디테일을 보는 즐거움을 알게 된 계기가 됐다. 이후 그림도 아는 만큼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화가도 사람이다. 당대의 화풍, 문화적 흐름, 사회정치적 변혁 등은 자연스레 그림에 반영된다. 자기만의 문체를 갖고 싶은 게 모든 작가의 꿈이듯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려는 화가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우리는 누구의 그림을 좋아한다, 어떤 화가의 색감에 매료됐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각자 마음에 드는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새롭게 들여다 본 그림이 많다. 내가 꼽은 그림 두 개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와 피터르 브뤼헐의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이다.

산비탈에서 밭 가는 농부의 한가하고 평화로운 일상, 물에 빠져 두 다리만 허우적거리는 이카루스를 신경조차 쓰지 않는 낚시꾼, 바다가 아닌 산 쪽을 향해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긴 목동...이 모든 무신경과 평온함이 신화 따위와 무관한 인간의 일상을 전하고 있는 듯해서 처음 볼 때부터 한참을 들여다봤다. 다시 봐도 브뤼헬은 T발 C가 맞다. 이카루스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물에 빠져도 이렇게 표현했을까. 아니 다이달로스의 아들이라서 특별히 무심한 걸까. 추락하지 않으려면 낮게 기어라, 높이 오르지 말고 중간에서 서성여라, 빨리 올라가면 빨리 내려온다, 튀지 않게 중간만 해라...세상을 사는 지혜를 가르치고 싶었던 게 아니라면 충동 조절이 어려운 아들에게 왜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아줬단 말인가. 한 권의 책이 오롯이 독자의 몫이든 그림도 보는 사람 마음이라면 끝없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림들이 이 책 한 권에 가득하다.


각자 선택한 그림에 끌린 이유만큼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세상을 살아간다. 그래서 마티스는 붓을 잡을 수 없는 지경에도 가위를 들고 물감 대신 색종이를 오려 빨간 심장이 달린 이카루스를 창조했을까. 포기하지 않고 힘겨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는 의지가 아니라 무언가 ‘표현’하려는 욕구가 마티스의 존재 이유였기 때문이 아닐까. 수많은 이카루스 사이에서 우리는 여전히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과 부와 명예, 사랑과 우정, 건강과 행복이 언제든 ‘추락’할 수 있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서성거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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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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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끔찍한 형벌은 없다’라고 생각하고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카뮈는 삶의 ‘의미’를 묻는다. 그래서 자살할 거니?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너무 유명한 문장이라 마치 그 책을 읽었다고 믿고 싶은 책 중의 하나가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가 아닐까. 무용하고 희망 없는 반복적 노동과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 왜 사냐고 묻는다면 할말이 많아진다. 너는 그런 고민을 하는 거 보니 배가 부르구나, 태어났으니 사는 거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죽지 못해 사는 거지 뭐 별거 있냐, 등의 대답부터 세계 평화와 인류 구원이 자기 삶의 목적인 사람까지 사는 이유와 방법은 80억 인구수만큼 다양할 것이다. 각자 나름대로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인생의 가치를 찾기 위해 고민한다. 그러나 아무도 찾은 사람은 없다, 지금까지.


숱한 철학자와 종교인 등 선각자들의 이야기도 정답이 아니다. 난 너와 다르고, 너는 또 그와 다르니 하나의 진리와 방법을 찾았다고 믿으며 다른 사람에게 전하려 몸부림치는 사람은 어떤가. 하나의 도그마는 시지프가 산정으로 밀어 올리는 바위보다 무겁고 단단하다. 절대 굴러떨어질 리 없다는 믿음이 반대편 사람들을 악마로 만들고 신념과 종교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집단학살, 제노사이드의 역사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뒷담화에서 패거리 문화까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무리 짓기와 구별 짓기는 세상을 사는 방법이며 본능이 아닐까 싶을 만큼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 묻는다. 자살하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를 찾으려 고민했던 카뮈의 생각이 시대와 공간을 넘어 지금-여기에 당도해 있는 건 또 어떤 의미일까.

시지프가 형벌을 받는 이유는 ‘신들에 대한 멸시, 죽음에 대한 증오 그리고 삶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그 형벌은 대다수 현대인의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듯하다. 지루한 반복과 노동의 수고로움이 시지프의 형벌과 닮았기 때문이다. 루틴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은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카나리아 같은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언젠가 끝날 생에 대한 소중함을 위해 ‘질’보다 ‘양’의 축적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누군가의 삶, 누군가의 선택, 누군가의 노력, 누군가의 경험이 비교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싶다. 재벌 회장의 하루와 11월의 따스한 햇살 한줌을 찾아 자리를 옮기는 노숙자의 하루가 다르지 않다는 데 동의할 수 있겠는가.

1인 가구가 급증하며 한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편의점 도시락과 클릭 몇 번이면 집앞으로 배달되는, 동네마다 빠르게 번지고 있는 반조리 식품은 우리 삶의 부조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과정은 달라도 우리는 모두 조리된 음식을 원한다. 조리되지 않은 음식이 아니라 희망과 죽음이 서로 응수하며 벌이는 비인간적 유희가 바로 부조리다. 침묵하는 세계와 열정적인 인간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거리가 부조리다. 의미 없는 인생, 무의미한 세계에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색을 입히고 의미를 부여하며 각자의 길을 걷는다. 자살로 시작한 카뮈의 이야기가 행복한 시지프를 떠올리며 마무리되어 당황스럽긴 하지만 반항하는 자가 자유를 얻고 생의 열정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한다.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대표적 저작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쓴 프란츠 파농은 “원칙적으로 무언가를 기술한다는 것의 의미는 비판적 접근을 내포한다. 따라서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는 해결책을 모색해 보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나 이미 등급 외 인생이 마련된 카뮈의 고민은 어쩌면 자기 삶의 조건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지닌 듯하다. 1차 세계대전에서 병을 얻어 일찍 죽은 아버지와 거의 듣지 못해 침묵의 세계를 안고 살아야 했던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아이에게 삶은 계란이 아니라는 이유,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거대한 인 삶의 ‘부조리’에 관한 에세이는 자살에 관한 성찰로 시작되어 희망을 거쳐 행복한 시지프의 이미지로 끝난다. 텍스트의 난이도, 독해의 어려움을 치워두면 결국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느끼는 삶의 부조리만 남는다. 부조리한 인생이든, 부조리한 사회든 조리에 닿지 않는 일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헛되고 헛될지 모른다. 우리가 통제하거나 알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햇빛이 반짝여 총을 쏘아버린 뫼르소도, “이 세상의 악이란 거의 대부분 무지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배움이 없는 선의는 악의와 마찬가지로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있다.”라는 베르나르 리유의 선언도 이해할 수 없거나 동의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카뮈의 생각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자유의지를 믿는 인간이라면 시지프가 밀어 올린 돌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때 느끼는 생각과 감정을 추론하는 대신, 만약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 보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표현은 사고가 끝난 곳에서 시작된다, 산다는 것은 곧 부조리를 살려 놓는 것이다, 존재는 허망한 것이다,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은 침묵한다. 등등. 분량은 짧지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긴 텍스트. 아포리즘 같은 문장 하나하나를 붙잡고 며칠씩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라서 가까이 두고 들여다 볼만한 책이다. 카뮈의 다른 저작들이나 생애와 사상, 실존주의와의 차이점, 이 책에서 거론하는 철학자와 다른 작가들의 작품까지 들여다볼 수 없더라도 시지프의 어깨와 뺨에 밀착된 차갑고 단단한 바위의 질감과 무게는 느껴지지 않는가. 그 고통과 슬픔 혹은 반항과 행복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건 결국 거울을 보는 것처럼 각자의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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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증보판
라인홀드 니버 지음, 이한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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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건 무엇일까. 이성과 감정의 경계에 서서 매번 흔들린다. 이성은 사람을 설득하기 어렵고 감정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인간의 본성에 새겨진 윤리와 이타심조차 DNA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사회화 과정의 학습효과가 절대적이다. 이 과정에서 가족, 지역사회, 국가가 타인에 대한 태도와 예의를 가르치고, 개인은 기질과 성향에 따라 고유한 도덕과 가치를 내면화한다. 그러니 모든 인간이 가진 공통적 본능과 함께 각자 서로 다른 도덕적 기준이 마련된다.

그런데 문제는 개인적 도덕과 윤리적 기준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흔들린다는 데 있다. 사회가 정한 질서 즉, 법과 규정은 공동체 생활의 최소한이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말은 언제나 옳다. 해결되지 않는 분쟁, 서로 다른 생각, 개인 간 이해관계, 신체적 폭력과 상해 등 갈등 없는 관계는 불가능하고 문제없는 사회는 없다. 군중은 개인보다 우매하며 타인은 단순하게 악하고 자신은 복잡하게 선할까.

목사 라인홀드 니버는 90년 전에 미국에서 인간의 도덕과 인류 사회의 비도덕성을 신랄하게 분석한다. 하느님의 말씀과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전쟁과 폭력, 이기심과 불평등은 합일될 수 없다. 현실은 대체로 참혹하고 종교적 실천 윤리는 이상적이다. 게다가 20세기 초반에 벌어진 세계사의 폭력과 전쟁, 산업사회로 진입한 자본주의의 불평등이 과거의 어느 시기보다 삶의 방법과 태도에 혼란을 가져왔다. 인간과 인간, 나와 탕니이 함께 살아가는 법은 없을까.

이 책은 기독교 윤리가 현실의 모순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듯하다. 더 나은 세상, 보다 많은 사람을 위한 종교는 언제나 인류에게 평화와 안식을 주고 성찰의 시간을 제공했다. 자기 삶의 목적과 이유를 고민하게 하는 순기능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치가 문제가 아니라 정치인이 문제이듯 종교가 아니라 언제나 종교인의 태도와 생각, 말과 행동이 종교적이지 못할 때 문제가 생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기독교 윤리를 해석하거나 비판하는 데 머물러 있는 건 아니다. 글쓴이가 목사라고 해서 교리를 앞세워 도그마에 갇혀 있는 건 아니다. 매우 폭넓은 시각으로 사회생활을 위한 개인과 민족, 특권 계급을 살핀다. 프롤레타이라 계급은 물론 당대 정치와 혁명을 살피며 도덕적 가치를 점검한다.

개인의 도덕과 사회의 도덕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다. “사회의 권력 불균형에 의해 생겨난 사회적 갈등의 해소는 그 불균형이 지속되는 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회학자는 별로 없다.” 권력과 자본을 가진 자들의 도덕과 사회 구조를 견고하게 유지하려는 자들의 이익이 합치된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서로 극과 극 대척점에 서 있는 건 아니지만 대개 개인의 도덕과 사회적 윤리는 충돌하기 마련이다. ‘도덕적 인간’이라는 라인홀드 니버의 말에 동의하지 않으나 ‘비도덕적 사회’라는 표현에는 공감한다. 인간과 사회를 도덕과 비도덕으로 대립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 민족과 계급으로 나뉜 개인의 도덕성은 상황에 따라 흔들리고 맥락없이 부정된다. 공리주의가 표방하는 다수의 행복이라는 관점에서도 사회적 관점의 비정함은 변함없다. 급변하는 시대를 반영한 윤리 문제가 아니라 인류 사회가 지향해야 할 혹은 극복해야 할 정의, 불평등, 분배 문제를 정치의 역할과 기능의 관점으로 살피고 있으나 답답함과 한계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개인과 사회가 지닌 모순과 부조리는 21세기가 되어도 진정되거나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치의 역할과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소수의 이기주의와 이해관계로 단단하게 얽힌 현실은 라인홀드 니버가 보여준 당대의 고민이 현재진행형임을 깨닫게 한다. 적어도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엄격해지는 잘못을 시정하려면,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의 이기주의보다 자기 자신의 이기주의를 더욱 가혹하게 억제하는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법이 도덕의 최소한이라면 자기 객관화는 이기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이 아닐까.

특권과 권력의 유혹에 굴복해버린 모든 사회주의 지도자는 의심할 바 없이 개인적인 야심과 영달이라는 아킬레스건을 갖고 있었다. 일반대중은 진정한 지도자라면 이러한 결점을 갖고 있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3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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