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 신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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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끔찍한 형벌은 없다’라고 생각하고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카뮈는 삶의 ‘의미’를 묻는다. 그래서 자살할 거니?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너무 유명한 문장이라 마치 그 책을 읽었다고 믿고 싶은 책 중의 하나가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가 아닐까. 무용하고 희망 없는 반복적 노동과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 왜 사냐고 묻는다면 할말이 많아진다. 너는 그런 고민을 하는 거 보니 배가 부르구나, 태어났으니 사는 거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죽지 못해 사는 거지 뭐 별거 있냐, 등의 대답부터 세계 평화와 인류 구원이 자기 삶의 목적인 사람까지 사는 이유와 방법은 80억 인구수만큼 다양할 것이다. 각자 나름대로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인생의 가치를 찾기 위해 고민한다. 그러나 아무도 찾은 사람은 없다, 지금까지.


숱한 철학자와 종교인 등 선각자들의 이야기도 정답이 아니다. 난 너와 다르고, 너는 또 그와 다르니 하나의 진리와 방법을 찾았다고 믿으며 다른 사람에게 전하려 몸부림치는 사람은 어떤가. 하나의 도그마는 시지프가 산정으로 밀어 올리는 바위보다 무겁고 단단하다. 절대 굴러떨어질 리 없다는 믿음이 반대편 사람들을 악마로 만들고 신념과 종교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집단학살, 제노사이드의 역사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뒷담화에서 패거리 문화까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무리 짓기와 구별 짓기는 세상을 사는 방법이며 본능이 아닐까 싶을 만큼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 묻는다. 자살하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를 찾으려 고민했던 카뮈의 생각이 시대와 공간을 넘어 지금-여기에 당도해 있는 건 또 어떤 의미일까.

시지프가 형벌을 받는 이유는 ‘신들에 대한 멸시, 죽음에 대한 증오 그리고 삶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그 형벌은 대다수 현대인의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듯하다. 지루한 반복과 노동의 수고로움이 시지프의 형벌과 닮았기 때문이다. 루틴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은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카나리아 같은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언젠가 끝날 생에 대한 소중함을 위해 ‘질’보다 ‘양’의 축적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누군가의 삶, 누군가의 선택, 누군가의 노력, 누군가의 경험이 비교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싶다. 재벌 회장의 하루와 11월의 따스한 햇살 한줌을 찾아 자리를 옮기는 노숙자의 하루가 다르지 않다는 데 동의할 수 있겠는가.

1인 가구가 급증하며 한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편의점 도시락과 클릭 몇 번이면 집앞으로 배달되는, 동네마다 빠르게 번지고 있는 반조리 식품은 우리 삶의 부조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과정은 달라도 우리는 모두 조리된 음식을 원한다. 조리되지 않은 음식이 아니라 희망과 죽음이 서로 응수하며 벌이는 비인간적 유희가 바로 부조리다. 침묵하는 세계와 열정적인 인간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거리가 부조리다. 의미 없는 인생, 무의미한 세계에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색을 입히고 의미를 부여하며 각자의 길을 걷는다. 자살로 시작한 카뮈의 이야기가 행복한 시지프를 떠올리며 마무리되어 당황스럽긴 하지만 반항하는 자가 자유를 얻고 생의 열정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한다.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대표적 저작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쓴 프란츠 파농은 “원칙적으로 무언가를 기술한다는 것의 의미는 비판적 접근을 내포한다. 따라서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는 해결책을 모색해 보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나 이미 등급 외 인생이 마련된 카뮈의 고민은 어쩌면 자기 삶의 조건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지닌 듯하다. 1차 세계대전에서 병을 얻어 일찍 죽은 아버지와 거의 듣지 못해 침묵의 세계를 안고 살아야 했던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아이에게 삶은 계란이 아니라는 이유,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거대한 인 삶의 ‘부조리’에 관한 에세이는 자살에 관한 성찰로 시작되어 희망을 거쳐 행복한 시지프의 이미지로 끝난다. 텍스트의 난이도, 독해의 어려움을 치워두면 결국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느끼는 삶의 부조리만 남는다. 부조리한 인생이든, 부조리한 사회든 조리에 닿지 않는 일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헛되고 헛될지 모른다. 우리가 통제하거나 알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햇빛이 반짝여 총을 쏘아버린 뫼르소도, “이 세상의 악이란 거의 대부분 무지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배움이 없는 선의는 악의와 마찬가지로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있다.”라는 베르나르 리유의 선언도 이해할 수 없거나 동의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카뮈의 생각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자유의지를 믿는 인간이라면 시지프가 밀어 올린 돌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때 느끼는 생각과 감정을 추론하는 대신, 만약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 보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표현은 사고가 끝난 곳에서 시작된다, 산다는 것은 곧 부조리를 살려 놓는 것이다, 존재는 허망한 것이다,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은 침묵한다. 등등. 분량은 짧지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긴 텍스트. 아포리즘 같은 문장 하나하나를 붙잡고 며칠씩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라서 가까이 두고 들여다 볼만한 책이다. 카뮈의 다른 저작들이나 생애와 사상, 실존주의와의 차이점, 이 책에서 거론하는 철학자와 다른 작가들의 작품까지 들여다볼 수 없더라도 시지프의 어깨와 뺨에 밀착된 차갑고 단단한 바위의 질감과 무게는 느껴지지 않는가. 그 고통과 슬픔 혹은 반항과 행복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건 결국 거울을 보는 것처럼 각자의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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