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금껏 몰랐던 신화의 비밀, 명화의 비밀 - 풍요롭고 지적인 삶을 위한 교양 수업
제라르 드니조 지음, 배유선 옮김 / 생각의길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우리는 모두 상승과 하강 곡선을 그리며 산다. 사람들은 기복 없이 평탄한 인생을 꿈꾸지만 그런 인생은 없다. 멀리서 바라보면 남들은 평온한 일상을 즐기는 듯한데 왜 나는 이렇게 힘들게 사는지 억울할 때가 많다. 그것이 경제적인 문제이든 정신적 고통이든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건 타인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없다는 한계 때문일 뿐 누구나 당신만큼 힘들다. 쉬운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인간이 겨우 직립보행을 시작했을 무렵부터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갈망하는 인간의 욕망은 본능처럼 꿈틀거린 게 아닐까. 오로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생명체의 연약함은 외부 세계를 모두 경계와 공포의 대상으로 삼아 차츰 이성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다른 동물에 비해 특별한 능력이나 경쟁력 있는 신체를 갖추지 못했으니 당연한 생존 전략이었을 것이다. 천둥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지고 혹한의 겨울을 맞거나 가뭄을 견뎌야 했던 호모 사피엔스에게 자연은 경외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그 두려움은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게 했으리라. 세계가 저절로 작동하거나 자연현상이 누군가에 의해 지배된다는 생각은 그 시절 지나치게 합리적이서 의심할 수 없는 상식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신화는 어쩌면 잃어버린 인간의 오랜 꿈이거나 호기심과 질문을 쏟아내던 시절을 살아낸 인간의 흔적기관 같은 게 아닐까 싶다. 우리에겐 과거 혹은 고통과 슬픔을 견디는 기적의 물질이 분비된다. 그것은 ‘망각’이다. 지나간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지는 게 아니라 선택적 기억으로 남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만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 어떤 막장 드라마나 현대판 콩가루 집안의 서사를 모두 합쳐놓아도 신화를 능가하지는 못한다. 하늘과 바다, 삶과 죽음, 산과 강, 비와 바람 등 인간이 사는 세상 어디에나 신은 존재한다. 아니,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질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지나치게 인격화된 신은 당혹스럽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인간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라는 점을 외면할 수 있다. 다소 이타적 속성이나 특이한 개체가 없지 않으나 신도 인간을 닮았을 것이라는 오만함이 놀랍다. 명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신은 매우 인간적이다. 간을 뜯어먹히는 프로메테우스부터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까지 대부분 그렇다. 구름과 비 혹은 거위가 되어 욕심을 채우는 신도 없지 않으나 신도 결국 창조자인 인간의 삶에 복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싶어 오히려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합리의 세계, 과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21세기를 사는 인간의 오만일 수도 있으나 지금-여기에서 바라보는 신화 이야기 혹은 명화 속 신들의 모습이 내게는 그렇게 보이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신화>를 주제로 한 책 읽기가 이어지는 중이다. 이 책은 신화를 처음 시작하든 충분한 지식이 있든 상관없다. 그림 자체로도 충분한 예술적 감동을 선사하며 저자가 설명해주는 신화 이야기가 더욱 풍성한 그림 읽기를 가능케 한다. 도상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단 한 장의 그림으로 2시간을 ‘순삭’시켜버린 어떤 강의 때문이었다. 그림의 메인 테마뿐 아니라 구석구석 배치된 디테일을 보는 즐거움을 알게 된 계기가 됐다. 이후 그림도 아는 만큼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화가도 사람이다. 당대의 화풍, 문화적 흐름, 사회정치적 변혁 등은 자연스레 그림에 반영된다. 자기만의 문체를 갖고 싶은 게 모든 작가의 꿈이듯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려는 화가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우리는 누구의 그림을 좋아한다, 어떤 화가의 색감에 매료됐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각자 마음에 드는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새롭게 들여다 본 그림이 많다. 내가 꼽은 그림 두 개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와 피터르 브뤼헐의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이다.

산비탈에서 밭 가는 농부의 한가하고 평화로운 일상, 물에 빠져 두 다리만 허우적거리는 이카루스를 신경조차 쓰지 않는 낚시꾼, 바다가 아닌 산 쪽을 향해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긴 목동...이 모든 무신경과 평온함이 신화 따위와 무관한 인간의 일상을 전하고 있는 듯해서 처음 볼 때부터 한참을 들여다봤다. 다시 봐도 브뤼헬은 T발 C가 맞다. 이카루스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물에 빠져도 이렇게 표현했을까. 아니 다이달로스의 아들이라서 특별히 무심한 걸까. 추락하지 않으려면 낮게 기어라, 높이 오르지 말고 중간에서 서성여라, 빨리 올라가면 빨리 내려온다, 튀지 않게 중간만 해라...세상을 사는 지혜를 가르치고 싶었던 게 아니라면 충동 조절이 어려운 아들에게 왜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아줬단 말인가. 한 권의 책이 오롯이 독자의 몫이든 그림도 보는 사람 마음이라면 끝없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림들이 이 책 한 권에 가득하다.


각자 선택한 그림에 끌린 이유만큼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세상을 살아간다. 그래서 마티스는 붓을 잡을 수 없는 지경에도 가위를 들고 물감 대신 색종이를 오려 빨간 심장이 달린 이카루스를 창조했을까. 포기하지 않고 힘겨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는 의지가 아니라 무언가 ‘표현’하려는 욕구가 마티스의 존재 이유였기 때문이 아닐까. 수많은 이카루스 사이에서 우리는 여전히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과 부와 명예, 사랑과 우정, 건강과 행복이 언제든 ‘추락’할 수 있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서성거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