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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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삶에 대한 부족한 통찰력 때문이다. 살아보지 않은 인생에 대한대리 경험과 비록 유추의 방법이긴 하지만 타인의 인생을 경험해 보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소설을 읽는다. 물론 그 욕망은 단순한 소설 읽기를 통한 재미와 감동을 넘어선다.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궁극적인 고민과 애정이 바탕이 되어 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야트막한 산의 나무의 빛깔이 햇빛에 반짝이는 순간, 나는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러나 이내 ‘삶이란 무엇인가’하는 아주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에 부딪힌다. 대략 난감하다. 언제부터였는지, 혹은 언제까지일지도 모르는 이 부질없는 생각과 고민들은 어쩌면 모든 순간들을 견뎌내게 하는 힘이고 현재를 확인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확인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나는 소설을 선택한다.

다양한 소설가들과 만나는 일은 공허한 울림의 대화보다 농밀한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지나치게 관심과 조명을 받아온 작가 ‘김훈’은 부담스러웠을거라는 짐작을 해 본다. 환갑을 눈 앞에 두고 그의 첫 소설집이 나왔으니 그의 문학적 성과와 무관하게 평범하지는 않은 일이다. 국내의 권위있는 상들을 휩쓸며 문학적 성과를 검증(?) 받은 김훈의 소설집을 읽고 나서야 김훈이 제대로 보인다. 지금까지 김훈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의 문체만을 즐겼다. 특히 <현의 노래>의 경우 내용과 상관없이 아무 데나 펼쳐들고 읽어도 눈부신 그의 문장과 만나게 된다. 그저 아름다운 문장 속에 빠져들다 보면 내용은 허공을 맴돈다. 정확하고 살아있는 수식과 표현들은 한국어의 또 다른 영역을 보여주는 소설들로 기억될 것이다. 소설가에게 문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김훈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소설집 <강산무진>은 여덟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소설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들은 선명하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에 대한 탐구 정신이다.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든 없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대기업 중역이든 택시기사이든, 복서든 등대 수로직 공무원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정확한 묘사가 압권이다. 직업의 속성과 성향을 단순한 관찰만으로 그려내는 방법은 옳지 않다. 그 직업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보여 줄 것인가가 사실 더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김훈은 일단 철저한 취재와 관찰로 직업의 속성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상황과 직종이 가져올 사건들을 내용 속에 기막히게 녹여낸다. ‘머나먼 속세’처럼 링 위에서 권투를 하는 선수의 눈을 통해 1인칭 시점으로 상대방을 읽어내는 내면 서술은 1라운드가 끝나고 2라운드가 이어지듯 불연속적인 소설의 흐름을 보여준다. 복서의 상황이 아니라 그가 걸어온 시간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른 상황과 시간 속에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새롭다.

주인공들은 대개가 중년 이후의 삶을 보여준다. 인생의 저물녘에 서 있는 사람들의 심리는 서늘하고 쓸쓸하기보다 공허하다. 젊은이의 열정이 보여주는 삶의 활력이 아니라 그로테스크한 삶의 비애가 주인공들을 통해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 적확한 묘사와 서술에 감정은 배제된 채 ‘개연성 있는 허구’인 소설을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그려내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모든 죽음과 이별에 ‘돈’이 개입된다. ‘언니의 폐경’, ‘강산무진’ 등에서 보여주는 죽음은 모두 ‘돈’으로 정리된다. 일상과 현실을 지나치게 세밀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그의 방법들이 오히려 불편하다. 환상과 욕망의 실현이 아니라 현실과 구체성의 철저한 보여주기에 충실하다. 김훈의 매력은 문체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미시적 관찰과 정확한 관찰에 있다.

중년 이후의 삶에서 사람들은 인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생활을 보여주고 일상을 이야기한다.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는 우리의 삶을 김훈은 ‘허무’하게 바라본다. 그 시선에는 감상도 준엄함 심판도 없다. 인생은 이것이다라는 전언도 없다. 그저 담담하게 삶의 순간들과 지루한 일상과 비루한 죽음과 인간의 본질을 담아낸다. 그것을 담아내는 김훈의 방식은 낯설고 각박하다. 소설들의 결말은 죽음이나 허무에 대한 김훈의 태도를 보여준다. 극적 반전과 긴 여운에 대한 유혹을 이겨낸 냉정하고 단호한 결말이 오히려 긴 울림을 준다.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를 통해 시간과의 대화를 시도했던 김훈이 이제 <강산무진>을 통해 ‘지금’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분명히 매혹적이거나 아름답지 않다. 생의 단면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담아내는 것이 단편의 미덕이라면 김훈은 장편 뿐만 아니라 단편에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그의 단편이 더 읽고 싶다. 다작과는 거리가 먼 작가이기 때문에 기다림에 값하는 그의 다음 작품을 또 기다린다.

걸출한 대가의 탄생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선입견을 갖지 않고 김훈을 읽는다면 참 많은 것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다음 작품을 기다릴만한 작가를 갖게 되는 것은 독자에게도 큰 기쁨이다.


06042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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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오퍼스 9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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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병과 고통은 생물학적 속성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자연의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는 당연하고도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죽음이다. 단 한 번의 생이기 때문에 소중하면서도 극적이다. 특히 질병과 그로 인한 고통은 물질적 존재로서 인간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누구나 한 번은 병들고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는 이 절대 공평의 원리는 삶에 대한 비극성을 인식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원칙에 대한 확인이다. 죽음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실로 다양하다. 어떤 병에 걸려 어떻게 죽느냐, 하니면 불의의 사고로 죽느냐에 따라 그 삶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까지 한다. 축복받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모든 사람의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죽음도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수잔 손택이 ‘은유metaphor’로서 ‘질병illness’을 분석한 책이 <은유로서의 질병>이다. 이 책은 ‘에이즈와 그 은유’라는 글과 묶여 합본으로 출판됐다. 10년의 간격을 두고 쓰여진 글 두 편이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후 <타인의 고통>을 펴낸 손택은 사람들의 인생에서 질병과 고통 그리고 그것이 주는 이미지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확인하는 일관된 작업을 벌이고 있다. 그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고 사회 속에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짚어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인간으로 태어나 질병으로 고통을 얻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는 실로 다양한 의미와 은유가 내포되어 있다. 의학의 발달과 더불어 점차 질병의 실체가 밝혀지는 과정에서 그 은유들은 점차 사라지는 듯 보이지만 ‘에이즈’라는 질병으로 과거로 회귀하는 듯하다.

  이 책에서 특히 관심을 갖는 질병은 결핵과 암이다. 저자가 두 번이나 암에 걸려 극복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책은 관찰과 사유로 이루어진 책이 아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결핵으로 사망했다. 아버지의 죽은 이유조차 감추었던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녀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당시 ‘결핵’이라는 질병이 지닌 은유에 대해, 이후 그녀가 걸렸던 ‘암’이라는 질병이 지닌 은유에 대해 이 책은 다양한 시각과 방법을 보여주는 문학적 에세이로 판단해야 한다. ‘은유’라는 말은 문학적 용어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부딪히는 은유는 유사성에 바탕을 둔 비유법이다. 손택은 은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은유라는 표현을 쓸 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간결한 정의,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내린 정의를 따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은유란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용轉用하는 것이다.” 그것이-아닌-다른 것으로, 또는 그것이-아닌-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어떤 사물을 부르는 것은 철학이나 시만큼 오래된 정신 작용이며, 과학적 지식과 표현력을 포함해 각종 이해 방식을 낳은 기초이다. P. -129

  질병이 우리에게 주는 대표적 은유는 병의 원인에 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 병에 걸리는가에 대한 문제가 질병에 대한 은유의 시작이다. 앞서 말한대로 의학 지식이 부족하거나 병의 증상이 보여주는 이미지가 그것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질병을 바라보는 방식이 치료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또한 개인적 차원의 치료를 넘어 주변 사람들과 죽음까지도 처리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죽은 사람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남은 생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무지는 질병 자체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환자들에게 다가온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시선들, 예를 들어 동성애자,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병역거부자 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 보다 오히려 더 크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에이즈 환자에 대한 시선일 것이다. 그 감염 경로와 치료 과정과 무관하게 널리 퍼져 있는 칼날같은 시선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나와 무관하다는 안도감만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는 문제다. 페스트처럼 제 1차 세계대전의 희생자 수를 넘는 죽음을 불러온 질병들에 대해 인류는 속수무책이었다. 암의 정복 즉 질병의 정복은 단순히 생명 연장의 꿈이 아니라 질병에 대한 은유들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고통을 넘어 선 고통을 받는 ‘질병들’을 주의하고 조심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수잔 손택이 보여준 ‘질병으로서의 은유’의 역사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다. 더구나 10여년의 간격을 둔 두 편의 글이 시간을 뛰어 넘어 하나로 읽힌다. <해석에 반대한다>를 읽기 위해 거슬러 올라가는 책읽기도 재미있었다.


060428-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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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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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갖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다. 글쓰기가 행복하냐고. 글을 쓰는 일이 직업일 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거나 그 일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다른 일과 다르게 적성과 취미가 맞아야 할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글을 쓰는 능력과 노력까지도 갖추어야 하니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글을 쓰는 직업은 작가 이외에도 많은 직종이 있다. 글의 종류에 따라 대상과 내용이 결정되면 한결 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작가에 비해서. 하지만 어떤 글이든 쓴다는 행위 자체가 두려움이 아닌 창조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공통점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추측이지만 다른 직업과는 달리 세상에 유일무이한 나만의 창조물이 남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느낌이 색다를 것 같다.

글쓰기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글쓰기의 목적과 대상, 내용과 범위에 상관없이 기본적인 사실들을 나열하는 책부터 문학적인 글쓰기와 실용적인 글쓰기를 나누어 구체적인 방법과 기술을 전수하는 책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책들도 주관적인 또 하나의 창작물로 보인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소양과 배경지식 태도와 관점에 따라 쓰는 글은 천차만별이다. 사람의 생김만큼 다양한 글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로 다른 경험에 따라 글을 쓰는 목적과 방법에 따라 다른 글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독자들이 그런 종류의 책을 읽는 목적도 각기 다르다. 실용적 목적과 배움의 목적에서부터 단순한 호기심과 책을 쓴 사람에 대한 관심까지 책을 읽는 목적만큼 얻어내는 결과도 다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많은 글쓰기에 관련된 책들이 나올 이유가 없다. 결국 글쓰기에 왕도는 없다는 것이다. 비법도 없다. 그냥 쓰면서 스스로 익히고 다른 사람의 글을 읽으면서 배우는 방법이 최선이다. 그러면서 차별화시키고 개성을 만들어가는 것이 글이다. 그런 자세를 얼마나 진지하게 그리고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물론 타고난 재능은 양념이다.

미국의 작가 나탈리 골드버그가 쓴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는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자신의 한계를 확인해보지 못한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행복할 수 없다. 글을 쓰는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에게 쓸 능력은 있는지, 무엇을 쓸 것인지, 왜 써야 하는지 하는 근원적이고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 해결될 때까지 글을 쓰지 않고 읽기만 하면 안 된다. 나탈 리가 말하는 방법은 자신의 글쓰기를 극한까지 몰고가라는 주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써라’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무조건 써야 한다. 쓰면서 생각하라. 준비가 될 때까지 쓰지 않는다면 쓸 수가 없다는 평범한 진리에 부딪힌다. 저자가 주문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볼 때 아주 간단하고 명확하다. 그래서 더 깊이 고민하게 한다. 전체적인 전략과 신념이 문제인 것이다. 이 책은 개별 전술보다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짧은 단상들에 제목을 붙혀 놓고 있어서 쉽게 읽히지만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어 실감나고 진지하다. 폭넓은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일단 전달이 쉬워야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확인한다.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이 책의 비결은 쉬운 표현과 명료한 전달에 있다. 독자들에게 명령형을 사용하는 일은 쉽지 않다. 더구나 제각각일 수 있는 글쓰기의 방법을 단정적인 어조로 말하는 것은 정말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이 책의 저자는 그렇게 했다. 그 방법이 거부감이 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을 담아 진심어린 마음을 전하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다소 딱딱하거나 이론적인 내용이 되기 쉬운 글쓰기의 방법론을 이렇게 편안하고 쉬운 말로 써내려갈 수 있는 것도 물론 저자의 능력이다. 그래서 이 책은 글쓰기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학교 현장에도, 글을 쓰고 싶었지만 가슴 속에 꿈으로만 묻어둔 어른에게도 좋은 안내서와 지침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주변 사람을 돌아보고 세상을 돌아보고 결국 다시 자신을 확인하는 방법이다. 시나 소설을 쓰는 전문 작가가 되기 위한 글쓰기가 아니라도 글쓰기는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어떻게 쓸 것인가는 문제보다 왜 쓰지 않고 버티는가하고 물어보는 편이 빠르다고 나탈리는 충고한다. 쓰면서 생각하고 정리하고 살아가라. 일단 쓰고 있다면 절반은 성공했다. 작가로서 성공이 아니라 인생을 성공하기 위해 글을 쓰라고 충고하고 싶어지는 책이다. 물론 그 충고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먼저 해야 할 것이다.

06050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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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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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축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감각적인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를 단숨에 읽어버렸다. 체감 재미도 100점을 줘도 아깝지 않다. 워낙 평소에 축구를 좋아하는 개인적인 성향도 한 몫 했겠지만,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충분히 ‘재미있게’ 빠져 볼 수 있는 소설을 간만에 만났다. 그 재미라는 것도 단순하거나 뻔한 스토리와 분위기를 몰아가는 통속(?)소설과는 거리를 분명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 소설의 재미는 독특한 형식과 참신한 내용에 바탕을 두고 있다.

소설의 의무는 재미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반론의 여지가 많다. 하지만 재미없는 소설은 의미만 있을 뿐 소설의 역할을 다시 한 번 고민해 봐야 한다. 재미라는 모호한 말 속에 많은 함의가 들어 있다. 감각적 쾌락과 지적 즐거움을 동시에 가져다 줄 수 있는 탁월한 작품을 우리는 주저없이 명작이라 부른다. 이 소설을 명작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는 물론 없다. 하지만 소설이 거둘 수 있는 극단적 재미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김영하와 성석제를 비벼놓은 듯한 감각적인 문장과 키치세대를 떠올리게 하는 스피디한 전개와 직설적인 화법은 그대로 TV 드라마나 영화 한 편을 본 느낌이다.

소설이 발표되자마자 10여개 영화사에서 판권을 사겠다고 덤볐다는 후일담에 고개를 끄덕일만하다. 연애와 결혼 부부와 가족이라는 작은 주제를 순서대로 나열하며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생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니 일단 모든 사람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충분하다. 거기다가 2002년 월드컵의 흥분이 가라앉기 전에 50여일 앞으로 다가온 2006년 독일 월드컵을 기다리는 국민들을 겨냥한(?) 시의성 또한 기막히다. 한 남자의 연애사와 축구 이야기라는 두 개의 축은 소설의 구성을 탄탄하게 받쳐주고 있다. 각각 따로 국밥이 아니라 하나로 어울어지는 교묘한 합체와 분리가 소설의 흥미를 배가 시킨다. 작가 박현욱이 작가의 말에서 이야기했든 문학이라는 넓은 바다에 이런 소설가가 발끝을 적신다고 해서 큰 누가 되지는 않을 것이며 쓰면 쓸수록 글은 계속 늘 것이라는 믿음이 지켜지길 바란다. 독자의 입장에서 다양한 소설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미식가가 느끼는 그 즐거움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축구 때문에 시작된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만남은 필연을 가장한 우연이다. 물론 작고 사소한 계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만남은 우연이고 그 우연 속에서 서로에게 혹은 스스로에게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바로 연애의 시작이다. 연애와 결혼에 관한 사회사적 고찰과 전 지구적 자료를 뒤적이며 다양한 형태의 결혼 제도와 형태를 소설 속에 녹여내고 있지만 현실에서 용인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현실의 잣대로 소설을 비추어 보는 멍청이가 있다면 당연히 책을 덮어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만을 놓고 살펴보아도 일부일처제가 갖는 의미와 역사는 너무 짧다. 주인공 남자의 아내 인아의 말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말 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주인공은 오로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의 논리와 눈물에 설득 당하고 만다. 아내가 결혼하다니? 누구나 제목을 읽고 나면 전처의 이야기에 관한 소설일 거라고 짐작하기 쉽지만 작가는 허를 찌른다. 전처가 아니라 아내가 결혼 하겠다고 남편에게 청첩장을 보내오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우습고 혹은 비참한 제도 중의 하나를 끝까지 고수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렇게 지켜내면서 얻어야 하는 그래야만 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작가는 근본적으로 인간과 사회, 그 중에서도 결혼 제도의 모순을 한 사내를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풍자나 비판의 목소리가 아니라 솔직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아주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재치있는 문장과 유머는 내용의 황당함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축구에 관한 많은 자료와 역사는 인류에게 특별한 의미를 준다. 다른 스포츠와 달리 축구는 특별하다. 여기에 동의하지 못하는 독자들도 이번 기회에 축구와 친해지거나 호기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전통적인 서사구조에서 벗어나 있는 이 소설은 결말이 없다. 물론 궁금하지도 않다. 결말이 별 볼일 없다는 것은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순간순간 상황이 보여주는 선택과 갈등 미묘한 움직임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랑과 연애, 결혼과 부부 그리고 가족의 의미를 독자들에게 되묻고 있는 듯하다. 도대체 인생이 무얼까. 낯설게 바라보는 인간 생활과 귀찮아서 묻어둔 이야기들을 이렇게 재미있게 풀어낼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작가의 탁월한 능력이다. 단 세 명의 주인공을 등장시켜 장편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 낼 수 있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박현욱은 그걸 해냈다. 대단하다. 긴 말이 필요 없는 책이 가끔 있다. 이 책은 그냥 읽으면 된다. 재밌으니까.


060503-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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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학의 종언 바리에테 5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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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의 기점과 개념에 관한 논의는 어떤 면에서 길고도 지루하다. 그만큼 중요하고 인류사에서 전환기적 시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살고 있는 지금을 현대라고 한다. 현대는 ‘현재’라는 개념과는 물론 구별되어야 한다. 불과 200여년 사이에 인류의 삶과 사상은 그 이전의 어느 시대도 빠르게 변화해 왔다. 중세를 넘어 근대로의 이행기의 특징은 거칠게 표현하면 인간 중심 사회로의 전환이다. 신 중심 사회의 미망에서 벗어나 인간과 이성이 중시되는 사회로 변화한다. 민족과 국가를 앞세운 파시즘은 맑시즘에 대한 반발로 파악하기도 하지만 1,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인류 문명은 급격한 변동을 겪었다.

  종교와 과학의 대립은 근대의 분수령이 되었으며 예술은 그 언저리에서 언제나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의 역할을 했왔다. 특히 문학은 사회 변혁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문학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지루한 논쟁은, ‘요즘 애들 버릇없다’는 함무라비 법전의 문구처럼 ‘문학의 위기’ 또한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끊임없이 논의되는 지루한 반성문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문학은 어디에 자리매김 될 수 있을까하는 문제가 되기 된다. 이 문제는 언제나 있어왔다는 반성적 고찰로 끝날 수도 있으나 그대로 넘길 수도 없다.

  일본의 지성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 문학의 종언>은 이러한 문제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문학의 위기를 논하는 문학계의 엄살이 아니라 ‘근대 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가라타니의 논문은 한국문학계에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2003년 10월 긴키대학에서 발표된 논문이 <문학동네>를 통해 국내에 소개된 이후 비평계가 아니라 언론에서 더 관심을 보였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앞서 말한것처럼 문학의 위기 운운이 아니라 ‘근대 문학의 종언’에 대한 선언적 의미는 가히 충격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제 문학의 위기를 넘어 ‘종언’이라고 마침표를 찍어버리는 가라타니의 말은 여러 가지 논쟁을 가져왔다. 한국 사회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선언인가하는 문제부터 일반화될 수 없는 문학에 대한 종언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짚어 볼 사항은 복잡하고 다양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가라타니가 던진 화두이다. ‘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문학의 종언’이라니?

  여기서 문학의 범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가라타니는 근대 문학을 특히 소설로 한정 시키고 있다. 사회와 제도를 넘어서서 문학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는 끝이 없어 보였다. 소설로 표현되는 사상들은 어떤 장르와 매체로도 감당할 수 없는 위력과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것이 가라타니의 판단이다. 사르트르의 <구토>를 예로 들면서 사르트르의 사회적 역할과 위상은 소설가 이상이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의 역할과 기원은 18세기 러시아와 유럽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본 문학에서는 소세키의 ‘문학론’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회화의 역할과 의미가 재정립 되었듯이 영화의 출발과 더불어 소설은 존재 자체에 대한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이 비평가들의 부정적 전망이었다. 그러나 회화처럼 소설은 그 위치와 역할의 무한한 위협과 도전 속에서도 근근이 버텨내고 있다. 가라타니는 여기에 종지부를 찍는 선언을 한 것이다. 아메리카 문학은 50년대에 그리고 일본 문학은 80년대에 이러한 현상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국에도 여러번 방문한 적이 있는 가라타니는 한국에서 만큼은 아직도 문학의 역할에 대해서 낙관적 전망을 보았다고 한다. 물론 일본에 비교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근대문학의 종언’은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는 함의를 이끌어 낸다. 과연 그의 말은 진실인가?

  물론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종언’이라니. 작가들에게는 귀에 들리지도 않을 말이다. 가라타니가 특히 비판의 화살을 겨누고 있는 것은 문학 비평가들인지도 모른다. 그가 본격적으로 문학 비평가로서 비교문학을 연구한 것은 시기적으로 대략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내놓은 80년부터 대략 10여년이라는 짧은 기간이다. 이후 철학자로서의 행보를 보여준 가라타니의 견해는 아직 확신에 찬 선언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그 선언적 의미가 주는 화두에 대해서는 우리가 고민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가라타니는 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영문학으로 석사를 받았다. 이 책에서 그는 ‘근대문학의 종언’을 심도 있게 다루거나 논리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쳐 나가고 있지 않다. 짧은 논문은 발표문 형식으로 그가 가지고 있는 고민의 일부를 던져주고 있을 뿐이다. 1부에서 번역가 시메이와 소세키의 문학론을 살펴보고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논문을 실었다. 나머지 2부 ‘국가와 역사’,3부 ‘텍스트의 미래로’에서는 가라타니 사상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60년 주기의 역사의 반복에 관한 특이한 견해와 교환과 폭력에 관한 국가관, 그리고 자신만의 어소시에이션이즘 이론을 펼치는 대담은 흥미롭다. 책 전체가 강연과 대담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가독성이 높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부터 <공산당 선언>을 통해 경제 체제와 국가의 역할에 대한 견해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생산단계에서 자본과 노동자의 충돌과 투쟁보다 소비 단계에서 ‘선택’의 문제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본도 최종 소비단계에서 한 번은 약자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산업 사회에서 물질을 토대로 한 자본의 경우에 한정되는 문제가 있지만 한 번도 주목한 적이 없는 부분에 대한 고민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질 만하다. 또 대담에 참여한 학자들의 자신감이 눈여결 볼만하다. 겉으로 드러난 자신감이 아니라 일본의 학문이 아메리카와 유럽에서 갖는 의미와 세계성에 대한 고민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독자성과 주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외국에서 학위를 받아 온 교수들에 의해 무분별하게 소개에 급급한 우리 학계의 현실을 잠깐동안 돌아보았다. 비판과 반성을 위한 계기로 삼을 만하다. 비난과 자조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지만 대담자들이 보여주는 논의의 범위와 이론들은 우리의 그것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다양한 문제들이 계통 없이 뒤섞여 있다는 느낌보다는 가리타니 고진에 대한 최근의 견해와 이론들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는 책이다. 보다 깊이 있는 관심과 고민은 물론 다른 책을 통해 확인해 보아야 할 문제다. 아쉬웠던 것은 일본 문학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기 때문에 그가 예를 들어 설명하는 일본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한 거지만 모든 분야에 통달한 전문 독자는 없다고 위로할 뿐이다. 이 책뿐만 아니라 다른 책에서도 자주 접하게 되는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과 <다중>이 숙제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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