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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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삶에 대한 부족한 통찰력 때문이다. 살아보지 않은 인생에 대한대리 경험과 비록 유추의 방법이긴 하지만 타인의 인생을 경험해 보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소설을 읽는다. 물론 그 욕망은 단순한 소설 읽기를 통한 재미와 감동을 넘어선다.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궁극적인 고민과 애정이 바탕이 되어 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야트막한 산의 나무의 빛깔이 햇빛에 반짝이는 순간, 나는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러나 이내 ‘삶이란 무엇인가’하는 아주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에 부딪힌다. 대략 난감하다. 언제부터였는지, 혹은 언제까지일지도 모르는 이 부질없는 생각과 고민들은 어쩌면 모든 순간들을 견뎌내게 하는 힘이고 현재를 확인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확인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나는 소설을 선택한다.

다양한 소설가들과 만나는 일은 공허한 울림의 대화보다 농밀한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지나치게 관심과 조명을 받아온 작가 ‘김훈’은 부담스러웠을거라는 짐작을 해 본다. 환갑을 눈 앞에 두고 그의 첫 소설집이 나왔으니 그의 문학적 성과와 무관하게 평범하지는 않은 일이다. 국내의 권위있는 상들을 휩쓸며 문학적 성과를 검증(?) 받은 김훈의 소설집을 읽고 나서야 김훈이 제대로 보인다. 지금까지 김훈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의 문체만을 즐겼다. 특히 <현의 노래>의 경우 내용과 상관없이 아무 데나 펼쳐들고 읽어도 눈부신 그의 문장과 만나게 된다. 그저 아름다운 문장 속에 빠져들다 보면 내용은 허공을 맴돈다. 정확하고 살아있는 수식과 표현들은 한국어의 또 다른 영역을 보여주는 소설들로 기억될 것이다. 소설가에게 문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김훈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소설집 <강산무진>은 여덟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소설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들은 선명하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에 대한 탐구 정신이다.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든 없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대기업 중역이든 택시기사이든, 복서든 등대 수로직 공무원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정확한 묘사가 압권이다. 직업의 속성과 성향을 단순한 관찰만으로 그려내는 방법은 옳지 않다. 그 직업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보여 줄 것인가가 사실 더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김훈은 일단 철저한 취재와 관찰로 직업의 속성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상황과 직종이 가져올 사건들을 내용 속에 기막히게 녹여낸다. ‘머나먼 속세’처럼 링 위에서 권투를 하는 선수의 눈을 통해 1인칭 시점으로 상대방을 읽어내는 내면 서술은 1라운드가 끝나고 2라운드가 이어지듯 불연속적인 소설의 흐름을 보여준다. 복서의 상황이 아니라 그가 걸어온 시간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른 상황과 시간 속에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새롭다.

주인공들은 대개가 중년 이후의 삶을 보여준다. 인생의 저물녘에 서 있는 사람들의 심리는 서늘하고 쓸쓸하기보다 공허하다. 젊은이의 열정이 보여주는 삶의 활력이 아니라 그로테스크한 삶의 비애가 주인공들을 통해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 적확한 묘사와 서술에 감정은 배제된 채 ‘개연성 있는 허구’인 소설을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그려내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모든 죽음과 이별에 ‘돈’이 개입된다. ‘언니의 폐경’, ‘강산무진’ 등에서 보여주는 죽음은 모두 ‘돈’으로 정리된다. 일상과 현실을 지나치게 세밀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그의 방법들이 오히려 불편하다. 환상과 욕망의 실현이 아니라 현실과 구체성의 철저한 보여주기에 충실하다. 김훈의 매력은 문체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미시적 관찰과 정확한 관찰에 있다.

중년 이후의 삶에서 사람들은 인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생활을 보여주고 일상을 이야기한다.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는 우리의 삶을 김훈은 ‘허무’하게 바라본다. 그 시선에는 감상도 준엄함 심판도 없다. 인생은 이것이다라는 전언도 없다. 그저 담담하게 삶의 순간들과 지루한 일상과 비루한 죽음과 인간의 본질을 담아낸다. 그것을 담아내는 김훈의 방식은 낯설고 각박하다. 소설들의 결말은 죽음이나 허무에 대한 김훈의 태도를 보여준다. 극적 반전과 긴 여운에 대한 유혹을 이겨낸 냉정하고 단호한 결말이 오히려 긴 울림을 준다.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를 통해 시간과의 대화를 시도했던 김훈이 이제 <강산무진>을 통해 ‘지금’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분명히 매혹적이거나 아름답지 않다. 생의 단면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담아내는 것이 단편의 미덕이라면 김훈은 장편 뿐만 아니라 단편에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그의 단편이 더 읽고 싶다. 다작과는 거리가 먼 작가이기 때문에 기다림에 값하는 그의 다음 작품을 또 기다린다.

걸출한 대가의 탄생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선입견을 갖지 않고 김훈을 읽는다면 참 많은 것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다음 작품을 기다릴만한 작가를 갖게 되는 것은 독자에게도 큰 기쁨이다.


06042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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