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가족을 통해 여성을 지배’(K. 밀레트)하고, ‘사회는 억압과 지배의 임무를 소그룹에 떠맡긴다’(H. 르페브르)는 지적은 이제 새삼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 P. 66

‘의사소통의 구조가 뒤틀린 탓에 생활세계가 식민화되었다’(하버마스)는 식의 지적은 우선 각종 매체의 주변에서 쉽게 확인된다. - P. 109

문화의 이상은 전달(관념)과 표현(몸)이 일치되는 어느 소실점에 놓일 것이다. 마르크스적 기획 속의 이것은 계몽주의적 이상과 표현적 낭만주의가 결합하는 문화를 향한 노력이다. - P. 114

생각을 조금 멀리 이끌어 나가면, 기억에 터 잡지 못한 화해를 강하게 불신했던 까뮈, “적을 기억하면 힘이 더 난다”는 몽양, 그리고 “적들이여 나를 계속 미워하라 나도 나의 적들을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랬던 루신을 생산적으로 떠올릴 수 있다. - P. 120

까뮈의 말처럼 오직 역사에 대한 올바른 기억과 대접만이 화해를 불러올 수 있으며, 아렌트의 말처럼 시대의 어두움은 기억의 빛이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 P. 126

나는, 그렇게, 몇몇 인간들을 그리워하였고, 훈련을 통해 마침내 그리움을 끊었으며, 그 여력으로 아무런 생각 없이 찔레꽃으로 사랑하였다. - P.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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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아르에게 죽음이란(바흐친과 비슷하게) ‘다시는 내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이었다. 사르트르의 죽음을 놓고 그녀가 가장 슬퍼한 것은 물론 ‘그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 P. 17

조국은 남자의 발명품이다.

그것은 효도가 부모들의 발명품이고 우정이 약소자(弱小者)의 발명품이며 연애가 근대의 발명품이라는 사실과 다를 바 없다.

중세는 신(神 )이 있다는 듯이 사는 세상이고 근대는 조국이 있다는 듯이 살아가는 세상이며, 현대는 가족이라는 게 있다는 듯이 살아가는 세상인 것이다. - P. 21

연인의 살이 이윽고 고기[肉]로 느껴질 때에도, 그 고기를 다시 살로 되돌리는 법은 오직 말 밖에 없다.

인간의 사랑은 워낙 어리석은 짓이긴 하지만, 무릇 사랑의 현명함을 가꾸려는 이들이라면 살과 말이 섞이는 묘경(妙境)의 이치에 세심해야 한다.

지속적인 사랑의 관계에서는 말을 매개로 삼아 살 이후를 슬기롭게 대처하는 일이 누구에게나 긴요하다. - P. 42

신(神)의 시선이 특별히 나만을 주목하리라는 종교적 환상극, 애인의 관심이 오직 내게만 집중되리라는 연애 환상극, 그리고 엄마-아빠-나 사이를 잇는 완벽한 가족 삼각형의 환상극 등은 완악한 자기중심성의 존재인 인간에게 좀처럼 피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연애의 열정은 어느 무지(無知)에 근거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무지는 어느 특권적 지식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 P. 46

바타이유나 베블런 등이 종교의 본질을 낭비와 사치로 규정한 바 있지만, 종교와 더불어 인류의 양대 환상인 사랑이야말로 낭비를 위한 낭비의 방식에 다름아니다. - P. 109

동무의 길은 인정과 배려를 통해 사랑의 열정을 생산적으로 승화시키는 데에서 트인다. - P. 114

“당신(학생)이 나(스승)처럼 나이가 들면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가다머식의 해석학적, 혹은 실천적 권위가 사라진 세상, 그것이 표절과 짜깁기와 얇은 번역의 천국, 한국 지식계의 비밀이다. - P. 128

플로베르였던가, “두 연인은 동시에 똑같이 서로를 사랑할 수 없다.”고 했던 사람이? 그러나 한 순간이나마 제정신인 연인이라면 그 사실의 절절함에 절망하지 않을 자 그 누구던가? “더불어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R. 바르트)는 연애의 진실은 연인들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 만고의 고민처럼 보인다. - P. 135

예나 지금이나 글쓰기는 ‘독립하되 고립되지 않는 삶’의 양식을 조형하려는 이들에게 주어진 생산적인 삶의 가능성이다. - P. 156

호의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기껏해야 일종의 사회적 무의식이거나 생물학적 에너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가족관계만큼 극명하게 증명하는 곳도 없다. ‘호의로 포장된 지옥’이라고들 하지만, 그것은 실로 모든 가족적 관계의 별칭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 P.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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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를 ‘후배’라고 부를 때는,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사람들’, ‘같은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때로 그 ‘같은 꿈’ 때문에 ‘같은 상처’를 입는 경험을 나누어 갖기도 해서 동질감은 더욱 짙어진다. - P. 73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 지금은 희망을 키워갈 때이다. - P. 145

나는 항상 부끄러움을 통해서 배운다. - P. 166

“자신이 알고 있는 제한된 지식만을 반복적으로 사용할 것을 강요받는 삶, 그것이 노동자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 P. 180

가족이 아닌 사람을 위해 묵묵히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길을 선택하는 모습은 그것이 비록 ‘작은’ 희생일지라도 가족을 위한 ‘큰’ 희생 못지않게 감동적이다.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부당한 권력과 자본에 의한 피해가 뻔히 예상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 P. 217

그토록 어려운 처지의 장애인도 훌륭하게 성공했으니, 그보다 더 어렵지도 않은 조건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불성실하거나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은근한 조장이 그 글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의 모순된 억압 구조를 개인의 불성실로 은폐하고 싶어하는 불순한 시도가 글쓴이도 모르는 사이에 그 글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 P. 220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노종조합이란 단어가 자신의 인생과 바늘 끝만큼이라도 관계를 맺게 될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 앞에 나가 설 때마다 막막함과 무력감이 나를 짓눌러 똑바로 서 있기조차 버겁다. - P. 249

최소한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다른 많은 경험들과 함께 ‘톨스토이 예술론’을 통해 내가 깨달은 최저값이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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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을 따라 1면 머리기사가 정해지기도 하지만 신문의 머리기사에 따라 여론이 흘러가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에서 그 의미를 실감할 수 있을 터이다. - P. 16

삶의 현실과 신문 지면 사이에 불가피하게 놓이게 된 여과장치가 바로 편집인 셈이다. - P. 23

가치판단이 빠진 편집이란 애초부터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 P. 24

신문 표제란 제목과 달리 기사를 종합하는 한편 역동적이고 구체적으로 그것을 드러내주어야 한다. - P. 63

사설을, 신문을 ‘비판적 안목’으로 읽을 수 있도록 교육하는 일대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 P. 226

독자 자신이 주체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며 읽어야 한다. 독자 개개인의 입장에서 신문을 재편집할 때 지면 읽기란 신문 편집자와 한 판 장기를 두는 것과 같다. 상대방이 둔 수를 보며 그 의중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 P. 280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은 ‘언론기관’이라는 골리앗 앞에서 대단히 무기력한 존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신문을 올바르게 읽어 나간다면 독자들은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이 될 수 있다. 신문을 볼 때 편집을 읽어야 한다는 이 책의 주제도 결국 다윗이 골리앗에게 던졌던 돌멩이를 독자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 P. 283

삶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말을 대량으로 양산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에 철저히 예속될 수밖에 없다. - P.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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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케이스 스타노비치Keith Stanovich가 지적했듯, 여자는 투표를 할 수 없고 흑인은 읽는 법을 배울 수 없다는 것도 150년 전에는 상식에 속하는 문제였다. - P. 43

미디어의 맹폭격을 잘 견뎌내려면 항상 자신의 사고를 주의 깊게 성찰해야 한다. 사고에 오류가 없으면 이런 보도 내용에 휘둘릴 위험성도 적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요한 원인은 일화적인 증거에 의지하는 우리의 성향에 있다. - P. 49

연구 결과 우리는 통계수치보다 이야기에 더 의존한다고 한다. - P. 51

사고방식은 믿음에, 믿음은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내세울 만한 증거가 없을 경우, 믿음은 틀릴 가능성이 더 많다. 그리고 잘못된 믿음을 토대로 결정을 내리면, 결정도 잘못될 가능성이 더 커진다. 그러므로 믿음을 형성하고 결정을 내릴 때는 비판적인 사고력을 강도 높게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 - P. 74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의주의자를 모든 것에서 흠집만 찾으려는 냉소적인 사람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회의주의자는 이런 사람이 아니다. 회의주의자는 어떤 주장을 믿기 전에 그 증거를 평가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일 뿐이다. 회의주의는 하나의 방법이지 태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 P. 75

인간은 원인을 찾고 싶어 하는 동물이다. 인간에게는 세계 속에서 일정한 양상을 발견하려는 천부적인 욕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삼라만상의 원인을 발견한 이들은 진화의 과정에서 살아남아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할 수 있었다. - P. 132

우리에게는 믿음을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강력한 욕구가 있다. 세계가 우리의 믿음에 들어맞는다는 것을 확인할수록, 우리 믿음이 진실이라는 생각도 더욱 강해지기 때문이다. - P. 162

우리 믿음은 소유물과 같다. 우리가 물건을 사는 이유는 그것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믿음을 간직하는 이유는 흔히 이 믿음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 때문이 아니라, 이 믿음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잘못된 믿음으로 인도하는 편향적인 인식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이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1) 이 믿음이 진실이기를 바라는가?
2) 이 사건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는가?
3) 이런 바람과 기대가 없다면, 이 일을 다르게 인식할까?

그렇다는 답이 나왔다면,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해석하는 방식에 당신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 P. 179

우리는 흔히 상관관계를 잘못 파악하며, 이런 오류로 건강은 물론 경제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대가를 치른다. 그런데도 상관관계가 있으리라는 기대나 바람으로, 있지도 않은 상관관계를 믿을 때가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이런 바람과 기대가 세계를 인식하고 평가하는 방식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 P. 202

“혼돈 이론과 복합성 이론은 미래가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것임을 말해 준다. 이는 우리 경제와 주식 시장, 제품가격, 날씨,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개체 수, 이외의 여러 가지 다른 현상들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본질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 P. 240

우리에게는 확인을 받으려는 타고난 성향이 있다. 기존의 믿음과 기대를 지지해 주는 정보에만 선택적으로 주의를 기울인다는 말이다. - P. 244

실제로 면접을 통한 주관적인 평가는 해로울 수 있다. 신뢰성과 타당성이 모두 부족하기 때문이다. 많은 연구 결과를 봐도, 면접관의 주관적인 평가는 지원자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훌륭한 지표가 될 수 없으며, 면접관들의 평가도 서로 엇갈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 P. 311

외부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처럼,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과정도 구성적이다. 암시적이고 유도적인 질문들이 기억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조합해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낸다. 또 인식작용의 경우처럼 자신의 바람이나 기대에 따라 다른 기억을 끄집어낸다. - P. 343

집단이 개인보다 뛰어나지만, 집단 안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는 혼자 일할 때 집단보다 더욱 훌륭한 성과를 보여준다는 말이다. - P. 371

우리가 믿음을 원하는 이유는 삶에서 확실성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은 아주 복합적이고 예측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흑백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편이 더 편해도, 자신의 믿음을 확신하는 편이 더 마음 편해도, 우리가 모르는 것이 참으로 많다는 점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 P. 377

심리학자 톰 길로비치의 말처럼, “우리를 곤란에 빠뜨리는 것은, 흔히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인 것이다. - P. 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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