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견문록 - 에디오피아에서 브라질까지 어느 커피광이 5대륙을 누비며 쓴 커피의 문화사
스튜어트 리 앨런 지음, 이창신 옮김 / 이마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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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특정 지역이나 사회에서 습득된 가치나 기호는 개인의 선택과 무관한 문화적 취향이 된다. 어떤 곳에서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도구를 사용하며 어떤 의식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사물을 보는 태도와 관점이 달라진다. 문화는 사람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틀이며 사회를 변화방향을 예측할 수 있는 풍향계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습관적인 행동과 즐겨먹는 음식, 재밌는 놀이가 모두 문화가 된다. 그 중에서도 음식만큼 세상 곳곳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먹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음식문화는 모든 문화의 척도가 될 수 있다. 무엇을 어떻게 왜 먹느냐에 따라 기후와 풍토를 살펴볼 수 있고 사람들의 기질과 풍습을 이해하기도 한다. 어떤 음식이든 우리가 먹는 것은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그 문화는 한 사회 구성원들의 결속을 다지기도 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과 관점을 만들어가는 토대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집단 무의식은 동일한 문화현상을 기초로 한다.

  근대이후 교통수단의 발달과 통신수단의 비약적 발전은 특정 지역의 문화를 세계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지구촌이라는 말이 통용될 정도로 거대한 세계화의 물결이 21세기를 지배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더불어 자본과 금융의 세계화뿐만 아니라 문화의 세계화도 진행되고 있다. 뒤섞이고 들끓는 속성은 문화가 가진 혹은 인류가 가진 교류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통합fusion’이라는 수식어는 이제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스튜어트 리 앨런의 <커피견문록>은 시대와 공간을 넘나드는 특별한 음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커피’라는 음료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저자는 지구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약 3만 킬로미터를 여행한다. 유럽 사람들은 언제부터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으며, 커피는 어떤 음식을 대체했을까? 이 두툼한 하드커버의 커피책은 커피의 문화사라고 불러도 좋겠다.

  이 책과 함께 커피를 보고 듣고 마셔보자. 알고 마셔야하는 것이 어디 와인과 커피뿐일까만 전통 음식이 아니면서도 가장 즐겨 마시는, 생활의 일부가 된 커피에 대해 궁금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호기심이다. 자, 이제 저자와 함께 커피여행을 떠나보자.

  2,000년 전 커피가 처음 발견된 곳에서 출발하기 위해서 우리는 에디오피아로 가야한다. 아디스바바바에서 하레르 지가지가로 이어지는 여행의 출발은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혹은 가장 본질적인 형태의 커피를 확인하는 데서 출발한다. 커피는 이제 현대인의 기호품으로 생각하지만 과거에 커피는 특별한 효능을 가진 약품이었고 상류층만이 즐기는 기호식품이었다. 커피를 즐기는 자세와 맛에 대한 감각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일 즐기는 커피믹스는 엄밀한 의미에서 커피가 아니라 커피를 이용한 또 다른 신개발 음료다.

  ‘악마의 음료’라는 별명으로 출발해서 카페인으로 전 세계를 정복해버린 커피. 저자는 그 발자취를 따라 아프리카에서 예멘, 인도, 터키를 거쳐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를 거쳐 브라질을 경유한 후 미국의 뉴욕에서 캘리포니아까지 더듬어간다. 그야말로 커피의, 커피에 의한, 커피를 위한 여정이다. 곳곳에서 맛보는 독특한 커피의 역사와 문화는 물론 그 발자취를 따라가는 저자의 열정은 읽는 사람에게 색다른 즐거움과 흥미를 선사한다.

  어떤 책이든 저자의 열정과 노력 그리고 직접 체험만큼 값진 결과를 낳는 것은 없다. 한 군데 머물러 안온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일생의 꿈인 사람이라면 저자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다양한 업종을 경험하고 전 세계를 제집처럼 드나들며 살아가는 사람의 유목적 글쓰기는 생생한 현장감을 무기로 한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읽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친구와 노천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들이키며 늦은 시간까지 킬킬거리던 지난 월요일. 수많은 그 혹은 그녀와 함께 카페를 드나드는 사람들. 혼자 책을 보거나 글을 쓰거나 멍한 눈길로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들. 우리들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커피와 카페. 또 다시 월요일은 시작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거나 마무리한다. 어느 커피광처럼 5대륙을 누비며 커피를 따라 여행할 수는 없지만 ‘커피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 잠시 커피를 들고 이 책을 펼쳐보는 건 어떨까?


090913-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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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즐거워지는 사진찍기 일상이 즐거워지는 시리즈 1
최정호 지음 / 홀로그램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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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가가 찍은 훌륭한 작품 사진은 여러 사람을 감동시킨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찍은 소소한 일상의 기록들은 스스로를 감동시킨다.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찍고 내가 행복한 사진. 가끔은 덤으로 내 주위의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감동시키는 그런 사진. 그 정도면 내가 사진기를 든 보답은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한다. 내 곁에 사진기가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이제 그 행복을 당신이 느껴볼 차례다.

  ‘사진은 평범한 일상도 특별한 순간으로 재구성한다’는 저자의 말은 일상에서 우리가 찍는 사진의 의미를 규정한다. 일상은 평범할수록 빛이 나고 그 평범함은 사진으로 특별한 순간으로 간직된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하고 사진은 기록의 가장 대표적인 수단이 된다. 우리의 일상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했던 사람들과 잔잔한 웃음과 찰나의 기억 때문이다. 소중한 일상을 기억하려는 노력은 일기 혹은 사진으로 남겨진다.

  네이버 자문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함께 활동했던 저자의 책은 그 의미가 각별하다. 조용하고 순수한 미소를 지닌 최정호위원의 사진들은 열정으로 가득하다. 무엇을 보여주려는 몸짓이 아니라 순간을 기억하고 일상을 즐기기 위한 사진들이다. 그가 찍은 사진이 갖는 특별함은 아마추어의 열정을 넘어 나름의 특별한 시각과 여유를 담아낸다. <일상이 즐거워지는 사진찍기>는 그렇게 사진과 함께하는 일상의 즐거움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은 이제 특별한 도구가 아니다. 누구나 사진기를 들고 다닌다. 핸드폰에 대부분 포함된 기능이라 언제 어디서든 무엇이든 기록할 수 있다. 하지만 사진이 단순한 기록장치로 볼 수는 없다. 증명사진이나 기록필름이 아닌 일상을 담은 사진들은 희미한 기억을 선명한 추억으로 되살린다.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바쁘고 지루하며 반복적인가 돌아보자.

  오래 된 사진 속의 나를 돌아보면 박제된 시간을 들여다보는 같아 불편하다. 지금의 나와 다른 타인처럼 어색하고 생경하다. 사진은 정지된 순간을 현재화하는 특별함을 가지고 있다.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을 불연속적인 흐름으로 나열하기도 하고 과거의 기억들을 각색하기도 한다. 사진은 그렇게 우리들에게 소소한 일상을 들춰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즐거움을 말하고 있다. 일상의 즐거움, 사진의 즐거움. 한 장의 사진을 통해 찍는 방법과 그 순간의 분위기 그리고 담아내고 싶었던 의도를 말해준다.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입문서가 될 것이고 이제 막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사진의 재미와 찍고 싶은 마음을 선물한다.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조근조근 설명하는 저자의 목소리도 듣기 좋고 그가 찍은 사진과 설명은 더욱 보기 좋다.

  집에 오래된 카메라가 있거나 최신형 카메라를 사두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사진의 즐거움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일곱 개의 파트로 나눠져있다. 인물, 동물/식물, 풍경, 도시, 하늘/구름, 사물, 접사로 나뉘어 피사체에 따라 어떤 점을 유의해야 하고 또 어떤 특징이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빛과 앵글의 조화는 사진만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사진은 무엇을 담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저자의 사진들은 피사체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다. 우선 피사체를 자세히 관찰하고 프레임과 빛을 생각하며 앵글과 효과를 감안하기 때문에 한 장, 한 장이 모두 깊은 인상을 남긴다. 다른 사람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재미와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용기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우리는 반복적 자극에 무감하다. 하지만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그렇게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일상의 즐거움과 알지 못하고 지나쳐버리는 순간들을 사진을 통해 정지시켜보자. 나만의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사진기를 통해 무언가를 창조하는 재미는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다.

  낯선 곳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포착한 순간들이 내 삶을 말해준다.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어쩌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일 수도 있다. 특별한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소소한 일상과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 사진이다. 사진기로 무엇을 찍을 것인가를 고민하지 말고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먼저 생각해보자. 그렇게 찍은 사진은 피사체가 아니라 바로 나를 담은 사진이 된다.


090909-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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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란
현기영 지음 / 창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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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의 십년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다. 모두가 21세기 새시대를 구가하면서, 시대를 닮으려고 그 뒤를 좇아 달려가버렸을 때, 허무성은 자신이 해일이 쓸고 간 황량한 바닷가에 여기저기 뒹구는 잔해들 중의 하나처럼 느껴졌다. 잊혀진 시절이 남긴 초라한 잔해, 그것이 학생들의 눈에 비친 그의 존재방식이었다. 달라진 이 세상과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감정도 관념도 다른 사람이었다. - P. 91

  내가 보낸 이십대를 90년대를 작가는 이렇게 정리하고 있었다. 현기영의 소설 <누란>을 읽으면서 이 구절을 읽다가 한참 멍한 눈길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선배들을 따라 시위현장에서 발밑에 지랄탄을, 머리위에 페퍼포그 사과탄을 피해 골목길을 뛰어다니던 일은 이제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 흑백 사진처럼 남아있다. 백골단에게 끌려가 곤봉으로 두들겨 맞고 닭장차에서 대가리를 처박고 나는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허무성은 386세대의 막내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잊혀진 시절인 80년대를 기억하기 위해 허무성은 90년에도 황량한 바닷가의 잔해처럼 쓸쓸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그의 존재방식은 21세기 대학생은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비판과 저항 문화를 잃어버린,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대학생들이 허무성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안타까운 시선으로 허무성을 바라보는 작가에게 오늘의 대학생은 어떻게 비춰질까. 그 시선은 우리들의 시선과 많이 다를까.

  문단의 거목이 되어버린 현기영의 <누란>은 작심한 듯 지나간 지난 시대를 직선적으로 들여다본다. 우회적이고 상징적인 방법이 주는 나른함이 없다. 군데군데 마치 신인 작가의 치기어린 열정을 보는 것같은 착각을 하게 하는 구절들이 보인다. 십년 만에 작품이든 준비기간이 얼마가 됐든 소설 외적인 부분에 대한 사실들이 소설을 대신할 수는 없다. 작가는 현실은 과거와 다른데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지 못하는 세대와 지난 시절을 철저하게 망각한 세대에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우리가 바꾸려했던 세상이 우리를 바꿔버렸다고.

  1999년 세기말의 불안을 넘어 2002년 월드컵 축제의 붉은 악마와 노무현의 당선으로 새로운 세기는 화려하게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모든 축제가 그러하듯 들뜬 분위기와 미칠 듯 끓어오르던 열정은 한 순간에 차갑게 식어버린다. 변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에게 남은 건 없었다. IMF의 충격은 부동산 가격폭등과 개혁의지 실종으로 이어져 다시 정권이 바뀌고 그들은 잃어버린 10년을 뒤찾기 위해 교과서를 바꾸고 강바닥을 뒤집고 있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의식 없는 국민에겐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게 돼있다. 파시즘의 재림을 꿈꾸는 권력이 무슨 짓을 하든 내 앞의 밥그릇과 평화로운 일상을 꿈꾸지만 그것이 쉽게 지켜지지 않는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노동하기 힘든 나라가 된다. 당신은 기업가인가 노동자인가? 기업가와 노동자의 비율은 어떤가? 대한민국의 국민 대다수가 기업가인가 노동자인가? 서민인가 부유층인가? 이것은 이데올로기도 그 무엇도 아니다. 그저 우리 이웃들과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작은 고민일 뿐이다.

  고문과 인권 유린을 처절하게 고발하는 소설로 읽지 말자. 국가권력의 거대한 음모와 변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비판으로 읽지도 말자. 그저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가장 소박하고 인간적인 우리의 상식을 확인하는 소설로 읽는 것은 어떨까?

  소설이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아주 오래된 명제를 떠 올릴 필요도 없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위태로운 현실을 거울로 비춰준다. 눈이 부셔 찡그리지만 그것이 곧 우리들의 자화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된다면 현기영의 소설은 나름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소설의 제목은 계란을 쌓아올린 듯 위태로운 상황을 나타내는 ‘누란지세(累卵之勢)’와 중앙아시아에서 번성했던 모래사막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누란(樓蘭)’ 왕국의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일흔을 바라보는 작가의 입장에서 오랜 침묵을 깨고 발표한 소설이다. <누란>은 단순히 소설로만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지난 시대와 오늘의 우리들을 돌아보는 반성문이다.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합의할 수 있는 기본적인 가치는 이념과 무관하다. 반목과 질시,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지난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지 못한 자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불빛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의 작은 소망이다.

이 소설은 실패와 절망에 관한 기록이다.

  ‘작가의 말’의 첫 문장이다. 이 시대를 냉철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실패와 절망에 대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수많은 개인들의 실패는 그 개인 자신의 탓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인 것이고, 그 구조는 세계화가 만들어놓은 부분이 크다. 즉 개인의 실패, 개인의 불행은 일국의 문제를 넘어 세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무력감은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는 말은 현실에 대한 작가의 판단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가 아닐까?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희망을 불빛을 던지고 막연한 기대를 갖게하는 완강한 현실의 벽과는 다른 불씨를 보여주려는 것이 현기영의 <누란>은 아닐까?

절망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철저하게 절망하여 그 밑바닥에 닿으면 거기에는 새로운 정신, 새로운 자아가 탄생하고, 그때 우리는 바닥을 걷어차고 힘차게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 P. 300


090906-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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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삶
헬렌 니어링 외 지음, 류시화 옮김 / 보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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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화로운 삶이란 무엇인가? 넓고 전망 좋은 아파트, 안전하고 영양가 높은 음식, 고급 승용차, 억대 연봉이 조화를 이루면 되는 걸까? 늘어놓고 보니 돈만 있으면 가능한 삶이다. 시니컬하게 말했는지 모르지만 이런 삶이 대부분 사람들의 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인 능력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사실 이런 현실을 거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왜 사람들은 행복과 거리가 멀다고 느낄까? 욕망의 크기 때문인가? 아니면 삶의 목적과 방법 때문인가?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는 우리는 늘 자신을 돌아보며 미래를 설계하고 과거를 성찰한다.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작고 소박한 일상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아무도 불행해지기를 원하지 않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고민해봐야 바늘 하나 꽂을 곳이 없는 틀에 박힌 일상에서 한낱 공상에 불과한 생각들로 머리만 복잡하다. 이건 아닌데 싶지만 전혀 다른 삶을 꿈꿀 수도 없다. 현실과 상황은 만만치 않으니 그만 오늘과 타협하고 만다. 견고한 사회 구조 안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종류는 그리 다양하지 않다. 함께 꿈꾸고 같이 걷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우리의 삶이다.

  헬렌과 스코트 니어링이 버몬트 숲 속에서 살았던 20년간의 기록을 적은 <조화로운 삶>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머나먼 미국에서 대공황이 최악으로 치닫던 1932년, 두 사람은 뉴욕에서 버몬트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외부적인 조건이 두 사람의 삶에 변화를 가져왔지만 대학 교수였던 스코트 니어링과 그의 제자에서 아내가 된 헬렌 니어링이 전혀 다른 삶에 도전하는 과정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스코트 니어링은 1883년 펜실베니아에서 태어나 펜실베니아 대학 교수로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친다. 아동 노동을 착취하는 것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다 해직되고, 톨레도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와 예술대학장을 맡았으나, 제국주의 국가들이 세계 대전을 일으킨 것에 반대하다가 또다시 해직된다. 아내 헬렌 니어링은 1904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바이올린을 공부했으며, 명상과 우주의 질서에 관심이 많았다. 한때 크리슈나무르티의 연인이었으며 스물네 살에 스코트 니어링을 만나 삶의 길을 바꾸게 됐다. 마흔 다섯 살의 스코트 니어링은 헬렌보다 스물한 살이 많았다. 두 사람은 가난한 뉴욕 생활을 청산하고 버몬트 숲에 터를 잡고 농장을 일궈냈다. 스코트는 1983년 세상을 떠났고, 헬렌은 그로부터 8년 뒤에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썼으며, 1995년 헬렌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조용한 청교도적 삶을 살아가는 듯한 과정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인생이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엉뚱하지만 조금씩만 욕심을 덜어내고 생의 조건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생각해보고 다른 사람을 조금만 더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상적인 꿈이라고 비웃을 수 있지만 불가능한 꿈조차 없다면 현실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지 전혀 신경 쓰지 말라. 우리는 서로 잡아먹을 듯이 경쟁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지금은 우선 이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도록 하는 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내일이나 더욱 슬기롭고 사람다워질 미래에는 더욱 냉철하고, 규모 있고, 쓸모 있게, 사회를 생각하면서 살리라.”
이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우리가 지금 이러저러하게 살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가 만들어지는 것이고, 현재를 이어받아 미래의 모습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 P. 199


  누구의 말을 인용했는지 알 수 없으나, 우리는 터무니없는 이 말을 믿고 산다. 현재는 미래의 거울이다. 우리의 지금을 살펴보자. 버몬트에서 직접 집을 짓고 채식을 하며 공동체를 꾸리던 부부는 개발의 그림자가 드리우자 훗날 메인으로 보금자리를 옮긴다.

  사회를 등지고 살자는 말이 아니라 “인생의 어느 시점까지 열심히 산 사람들이 더욱 성숙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환경으로서(이것은 인생의 여러 단계에 대한 동양 사람들의 생각과 같은데, 그 사람들은 한 집안의 가장 노릇을 마치고 나면 다음 단계는 성인이나 은둔자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기 일과 취미 생활을 동시에 하면서 슬기롭고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부부의 말은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그저 특별한 20세기 미국인 부부의 삶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들여다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지 않은가. 21세기에도 사람이 산다는 것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깊은 밤 이 부부기 20년간 버몬트 생활을 마무리 하는 말을 되새겨 본다.

우리는 할 수 있다면 가장 품위 있고 친절하고 올바르고 질서 있고 짜임새 있게 살아야 한다. 어떤 처지에서도 사람은 옳게도 그르게도 행동할 수 있다. 어떤 환경이 주어지든, 미워하고 공격하고 부수고 무시하고 될 대로 되라고 내버려 두는 것 따위의 더욱 해로운 행동을 하기보다는, 사랑하고 창조하고 건설하며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는 대도시 한가운데보다는 산업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시골 마을에서 더 훌륭하게 조화로운 삶을 꾸려 갈 수 있다고 믿었다. - P. 201


090903-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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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노래, 짧은 시
이시영 지음, 김정환 외 엮음 / 창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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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신 날에

가로수 잎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습니다
길을 걸으며 나는 문득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그 옛날 우리가 새로 태어났던 날의 초록잎새처럼
아직은 푸르름이 채 가시지 않았을
당신의 맑은 얼굴을

  아득한 꿈을 꾸던 날들이 있었다. 벌써(?) 지난 시간을 돌아보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간들을 생각하면 세상은 온통 초록빛이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들이었다. 지나간 모든 시간은 아름다움으로 채색되기 마련이니 무엇이라 말해도, 모든 사람의 당신은 푸른 얼굴이고 물처럼 맑은 얼굴일 게다.

  이시영의 등단 40주년 시선집 <긴 노래, 짧은 시>는 지나온 시간에 대한 보고서처럼 읽힌다. 한 시인의 시력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독자들이 살아온 시간들도 조용히 반추하게 한다. 동일한 경험을 공유하지 않았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온 시인의 감성은 내것처럼 잔잔하기만 하다. 긴 노래를 불렀지만 돌아보면 짧은 몇 편의 시만 남은 듯한 것이 삶이다. 누구에게나 그렇게 소중한 시간은 흘러가고 한 시대를 살았던 흔적은 조용히 사라지게 마련이다. 이시영은 자신의 시를 통해 한 세월을 정리하고 있는 듯하다. 네 명의 시인이 엮은 이 책은 웅숭깊은 생각의 편린들이다.

공사장 끝에

“지금 부셔버릴까”
“안돼, 오늘밤은 자게 하고 내일 아침에……”
“안돼, 오늘밤은 오늘밤은이 벌써 며칠째야? 소장이 알면……”
“그래도 안돼……”
두런두런 인부들 목소리 꿈결처럼 섞이어 들려오는
루핑집 단칸 벽에 기대어 그 여자
작은 발이 삐져나온 어린것들을
불빛인 듯 덮어주고는
가만히 일어나 앉아
칠흑처럼 깜깜한 밖을 내다본다

  용산참사의 상흔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우리가 외면하는 동안 우리의 이웃들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이 100쇄를 넘겨 여전히 이 시대에도 읽히는 것은 과거의 시대상황을 읽을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개발과 발전이라는 미명아래 삶의 터전을 잃고 절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 있을까?

  이 한편의 시에는 처절한 분노도 성난 목소리도 드러나지 않지만 철거민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공사장 끝에는 작은 발이 삐져나온 어린 것들이 잠들어 있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법과 질서를 내세우는 권력은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가 돌아볼 시간이다. 시인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오늘을 반성하게 한다.



화살 하나가 공중을 가르고 과녁에 박혀
전신을 떨 듯이
나는 나의 언어가
바람 속을 뚫고 누군가의 가슴에 닿아
마구 떨리면서 깊어졌으면 좋겠다
불씨처럼
아니 온몸의 사랑의 첫 발성처럼


  이시영은 누군가의 가슴에 닿아 떨림이 깊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의 시는 큰 울림으로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시가 존재하는 이유는 머리가 아닌 우리의 가슴으로부터 진한 감동을 자아내는 데 있다. 그의 바람은 성공한 듯 보인다.

  온몸으로 사랑하는 일은 시인의 시가 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가 원하는 삶이다. 그 사랑이 어떤 것인가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여전히 사랑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간다. 이시영의 시를 통해 언어가 전해주는 깊은 감동을 맛볼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삶이 여전히 따뜻한 희망과 기쁨으로 충만해야함을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다.

나무에게

어느날 내게 바람 불어와
잎새들이 끄떡끄떡하는구나
내가 네 발밑에 오줌을 누고 돌아설 때
수많은 정다운 얼굴로 알은체를 하는구나
그러나 오늘은 돌아서자
수많은 오늘 같은 내일의 날이 지난 뒤
내가 불현듯 참다운 네가 되어 돌아오마


  하루를 살고 한 평생을 지내면서 나무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잎새들이 끄떡이는 모습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참다운 삶에 대한 깨달음이며 정다운 얼굴들에 대한 그리움이다. 시인은 나무가 아닌 우리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수많은 오늘같은 내일이 지난 뒤에도 거기 그렇게 서 있는 나무처럼 살아가자고.


090902-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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