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노래, 짧은 시
이시영 지음, 김정환 외 엮음 / 창비 / 200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눈이 부신 날에

가로수 잎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습니다
길을 걸으며 나는 문득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그 옛날 우리가 새로 태어났던 날의 초록잎새처럼
아직은 푸르름이 채 가시지 않았을
당신의 맑은 얼굴을

  아득한 꿈을 꾸던 날들이 있었다. 벌써(?) 지난 시간을 돌아보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간들을 생각하면 세상은 온통 초록빛이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들이었다. 지나간 모든 시간은 아름다움으로 채색되기 마련이니 무엇이라 말해도, 모든 사람의 당신은 푸른 얼굴이고 물처럼 맑은 얼굴일 게다.

  이시영의 등단 40주년 시선집 <긴 노래, 짧은 시>는 지나온 시간에 대한 보고서처럼 읽힌다. 한 시인의 시력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독자들이 살아온 시간들도 조용히 반추하게 한다. 동일한 경험을 공유하지 않았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온 시인의 감성은 내것처럼 잔잔하기만 하다. 긴 노래를 불렀지만 돌아보면 짧은 몇 편의 시만 남은 듯한 것이 삶이다. 누구에게나 그렇게 소중한 시간은 흘러가고 한 시대를 살았던 흔적은 조용히 사라지게 마련이다. 이시영은 자신의 시를 통해 한 세월을 정리하고 있는 듯하다. 네 명의 시인이 엮은 이 책은 웅숭깊은 생각의 편린들이다.

공사장 끝에

“지금 부셔버릴까”
“안돼, 오늘밤은 자게 하고 내일 아침에……”
“안돼, 오늘밤은 오늘밤은이 벌써 며칠째야? 소장이 알면……”
“그래도 안돼……”
두런두런 인부들 목소리 꿈결처럼 섞이어 들려오는
루핑집 단칸 벽에 기대어 그 여자
작은 발이 삐져나온 어린것들을
불빛인 듯 덮어주고는
가만히 일어나 앉아
칠흑처럼 깜깜한 밖을 내다본다

  용산참사의 상흔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우리가 외면하는 동안 우리의 이웃들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이 100쇄를 넘겨 여전히 이 시대에도 읽히는 것은 과거의 시대상황을 읽을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개발과 발전이라는 미명아래 삶의 터전을 잃고 절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 있을까?

  이 한편의 시에는 처절한 분노도 성난 목소리도 드러나지 않지만 철거민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공사장 끝에는 작은 발이 삐져나온 어린 것들이 잠들어 있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법과 질서를 내세우는 권력은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가 돌아볼 시간이다. 시인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오늘을 반성하게 한다.



화살 하나가 공중을 가르고 과녁에 박혀
전신을 떨 듯이
나는 나의 언어가
바람 속을 뚫고 누군가의 가슴에 닿아
마구 떨리면서 깊어졌으면 좋겠다
불씨처럼
아니 온몸의 사랑의 첫 발성처럼


  이시영은 누군가의 가슴에 닿아 떨림이 깊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의 시는 큰 울림으로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시가 존재하는 이유는 머리가 아닌 우리의 가슴으로부터 진한 감동을 자아내는 데 있다. 그의 바람은 성공한 듯 보인다.

  온몸으로 사랑하는 일은 시인의 시가 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가 원하는 삶이다. 그 사랑이 어떤 것인가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여전히 사랑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간다. 이시영의 시를 통해 언어가 전해주는 깊은 감동을 맛볼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삶이 여전히 따뜻한 희망과 기쁨으로 충만해야함을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다.

나무에게

어느날 내게 바람 불어와
잎새들이 끄떡끄떡하는구나
내가 네 발밑에 오줌을 누고 돌아설 때
수많은 정다운 얼굴로 알은체를 하는구나
그러나 오늘은 돌아서자
수많은 오늘 같은 내일의 날이 지난 뒤
내가 불현듯 참다운 네가 되어 돌아오마


  하루를 살고 한 평생을 지내면서 나무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잎새들이 끄떡이는 모습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참다운 삶에 대한 깨달음이며 정다운 얼굴들에 대한 그리움이다. 시인은 나무가 아닌 우리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수많은 오늘같은 내일이 지난 뒤에도 거기 그렇게 서 있는 나무처럼 살아가자고.


090902-0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