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책도 사람처럼 언제 읽느냐가 중요하다. 열여섯의 <데미안>, 열일곱의 <새벽편지>, 열여덟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아홉의 <지와 사랑>, 스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떠오르는 것은 나이보다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일생동안 많은 책을 읽고 잊어버린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작가는 바로 그 순간에 내가 듣고 싶은 말을 건넸기 때문일 것이다.

  이윤기를 전작주의로 삼은 조희봉은 <전작주의자의 꿈>을 통해 한 작가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해석을 통해 책읽기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방법은 조금씩 다양하겠지만 많은 독자들이 이렇게 한 작가에 탐닉하다가 이별하고 또 새로운 작가를 만나고 헤어진다. 헤르만 헤세, 정호승, 오규원, 황지우, 김지하, 김남주, 황석영, 밀란 쿤데라와 함께 사춘기를 보낸 기억이 아득하기만 하다.

  <파피용> 이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에 시큰둥해지고,  <어둠의 저편> 이후로 하루키의 소설에 하품을 하듯, <행복의 건축>을 거쳐 <일의 기쁨과 슬픔>으로 보통씨와 이별할지도 모르겠다. 아주 오래 전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으로 그의 책을 거의 다 읽었지만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은 아니지만 재미도 감동도 없고 새로운 깨달음이나 지적 충격도 느껴지지 않는 책을 붙잡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슬럼프 없이 매년 4할을 넘기는 타자도 매력이 없긴 하지만, 보통씨와 이제 당분간 작별할 시간이 왔는보다. 점점 입맛만 까다로와지는 노인네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그의 신작 <일의 기쁨과 슬픔>은 한국에 대한 특별한 애정과 배려가 곳곳에 배어 있다. 책머리에 정성스럽게 쓴 ‘한국의 독자들에게’ 말미에 적은 것처럼 집을 얻는 데 한국어판 인세가 큰 보탬이 된 것에 대한 보답처럼 느껴져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의 팬이 많기 많은가보다. 어쨌든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성격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이번에 나온 그의 책은 열 개의 장의 구별된 ‘일’에 관한 에세이다. 발로 쓴 에세이는 관념적이거나 감상적인 산문과 구별된다. 정확한 관찰과 꼼꼼한 기록 그리고 현장을 따라가는 탐방 기사같은 글들이 읽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선을 제공한다. 일상에 묻혀있다 보면 주변에서 늘상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무감각해지기 쉽다. 현관 문 밖에 신문이 슬라이딩 하는 소리를 듣는 새벽처럼.

  현대인의 삶은 바쁘다. 쉬지 않고 일하고 남들보다 열심히 뛴다. 특히 한국인의 부지런함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쉬고 즐기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쉰다. ‘일’은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마치 종교와 같은 일의 숭고함을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지속되는 한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일이 어떤 일이든 무엇이든 말이다.

  알랭 드 보통은 화물선 관찰하기로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이야기한다.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로 느껴지는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은 ‘일’에 인격을 부여한다. 물류센터를 돌아보고 비스킷 공장을 찾아가며 직업 상담가를 만나고 로켓과학의 눈부신 성과를 살펴본 후 화가를 따라가기도 하고 송전탑을 따라 무작정 걸으며 회계의 필요성을 확인하고 창업자들의 고단함과 항공 산업의 놀라움을 관찰한다.

  열 개의 장으로 구성된 에세이는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면서도 조금 거리가 느껴지는 이야기들이다.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며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있지만 실감하지 못하는 일들은 얼마나 많은가. 24시간 동안 톱니바퀴처럼 일사분란하게 돌아가는 세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얼마나 흥미진진한 곳인가. 보통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책은 보통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흡인력있는 문장으로 독자들을 매혹시킬만하다. 사색적인 태도로 섬세하게 묘사하고 적절한 비유를 통해 차분하게 전달한다. 흥분하거나 강하게 밀어붙이는 일이 없고 속삭이듯 이야기하고 감각적이고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이 책도 그가 보여주는 새로운 시각과 조우할 수 있는 신선함으로 가득하다.

  ‘일’이 줄 수 있는 기쁨과 슬픔은 독자 개개인이 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든지 저자가 말하는 열 개의 범주 너머에 존재하는 수많은 ‘노동자’의 삶은 자신의 정체성을 말해줄 것이고 현재의 삶을 보여주며 미래의 작은 희망을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한다. 책표지의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갈라지고 메마른 사막에 놓인 붉은 여행 가방처럼 낯설게 내가 하는 일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책이었다.


090927-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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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2 11: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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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6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졸업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고향옥 옮김 / 양철북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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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 길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 가장 단순하지만 인상적인 말이다. 우리들의 삶을 길에 비유하는 일이 많은데 한 사람의 길이 끝났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개인적인 일이 일단락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학교를 졸업했다는 뜻이기도 하며 직업을 바꿨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막다른 길은 없다. 모든 길은 이어지고 끊임없이 길들이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결국 인간이 걸어야 할 길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한 사람 두 사람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길이 만들어진다는 노신의 말은 삶의 방법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남들이 가는 길만 걸어가는 것은 재미도 없고 즐겁지도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새로운 길만 만들어 걸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미 만들어진 길을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때가 많다. 우리는 걷고 또 걸으며 길에 대해 생각하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삶이라고 부른다.

  그 중에서도 가족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길이다.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형제나 친척을 선택할 수도 없다. 일본작가 시게마츠 기요시의 <졸업>은 우리의 삶에서 가족이 가지는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소설집이다. 네 편의 중편을 모아놓은 이 책은 가깝고도 먼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와 위안을 주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씻을 수 없는 가장 큰 상처와 고통을 주는 존재이기도 한 가족 이야기는 진한 눈물과 잔잔한 미소를 선사한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졸업’은 한 인간의 성장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살한 아버지의 유복자로 태어나 14네 살이 된 아야는 죽은 아버지의 친구 와타나베를 찾아온다. 와타나베의 시각으로 서술되는 이 소설은 오래된 기억을 더듬으며 친구 딸의 아버지 찾기에 동참한다. 새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별탈 없이 성장했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얼굴조차 본 적이 없는 생물학적 아버지에 대한 호기심과 애틋함은 사춘기 소녀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실존적 고민이다. 결국 아버지가 자살한 시간과 장소에서 유년기를 졸업한다는 내용이다. 우리에게 졸업은 학교를 마치는 일이 아니라 한 개인의 인생에서 어떤 시기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 소설 ‘행진곡’은 어머니의 죽음을 앞둔 한 남자의 기억을 더듬는다. 어린 시절 끊임없이 노래를 불러 문제아가 된 여동생과 어머니의 관계를 통해 일류 중학교에 입학하고 ‘히키코모리’가 된 아들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내용이다. 잊혀진 유년의 기억과 가족 간의 관계를 깨닫는 과정은 부모가 자신에게 쏟았던 사랑만큼 자식에게 그 사랑을 물려주는 일과 다름없다. 물이 흐르듯 그렇게 사랑은 세대를 넘어 관계와 존재의 단단한 연결고리가 된다.

  ‘아버지의 마지막 수업’은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아버지의 죽음을 앞둔 중학교 교사인 아들이 서술자이다. 아버지 세대가 아이들을 다뤘던 방식에 대한 잔잔한 술회, 죽음과 시체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한 아이를 통해 아버지가 남긴 것은 무엇이고 아버지의 죽음의 의미는 아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본다.

  마지막 단편 ‘추신’은 여섯 살에 어머니를 잃은 소설가의 이야기다. 어머니가 병상에서 남긴 노트를 중심으로 새엄마와의 해묵은 갈등과 화해를 다루고 있다. 새 어머니의 아들인 동생을 통해 인정할 수 없는 어머니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늘에 계신 어머니만을 인정했던 시간들을 돌아본다. 상상속의 어머니를 실존인물처럼 잡지에 연재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존재를 다시 생각한다. 이제 늙어버린 어머니의 잠든 모습을 보며 소설가가 된 어린 아들은 두 명의 어머니를 받아들이게 된다.

  네 편에 등장하는 소설의 주인공은 공교롭게도 마흔 살 먹은 남자다.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해 있지만 가족이라는 연결 고리 안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하고 생의 진부함을 확인한다. 우리의 삶은 무엇이라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다. 때로는 안개 속을 헤매듯 방향을 알 수 없이 달려가다가 문득 주변을 돌아보면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끝없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존재의 출발점과 종착역은 가족일지도 모른다.

  먼 여행을 하고 돌아와 편히 쉴 수 있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다. 생의 순간순간을 ‘졸업’하며 우리는 그 의미를 되새기고 다음 생을 준비한다. 시게마츠 기요시의 소설은 평온하고 잔잔한 음악처럼 낮은 목소리로 현대인의 삶에서 가족이 주는 의미를 묻고 있는 듯하다. 네 편의 소설을 통해 나는 가족이 아니라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090924-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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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생의 학교폭력 평정기
고은우 외 지음, 따돌림사회연구모임 기획 / 양철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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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에 난무하는 폭력의 밑바닥에는 어른들의 폭력이 배어있다. 한 인간의 인성을 결정하는 요인 부모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가정교육은 아이의 전인적 성장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속담은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간파한 말이다. 또래 집단에서 놀이를 통해 사회성을 기르고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해 나간다. 가족의 사랑과 보살핌을 벗어나 주체적 인간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수반한다.

  인간의 본성에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말은 물에 빠진 아이를 보면 이해관계 없이 구해주려는 마음이 든다는 본성과 맞닿아 있다. 어느 쪽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성장과정에서 혹은 교육과정에서 결정되는 성향일 뿐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런 성향은 직접적인 평화교육이나 폭력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는 차원에서 해결되지 않는다. 경쟁과 이기심을 길러 살아남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하는 환경에서 어떤 사람으로 자라게 될 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지적 발달이 정서발달보다 중요하다는 어른들의 침묵의 카르텔은 가장 위험한 폭력이다. 높은 성적과 경제적 부를 획득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은 피할 수 없다. 사회적 경쟁은 불가피하지만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와 성향은 경쟁과 효율로 길러지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인지, 어떻게 학교를 운영하며 그들을 교육해야 하는지에 대한 수많은 담론은 결국 어른들의 취향에 따라 결정되어 버린다.

  우리가 겪어 온 대입제도와 교육제도를 통해 어쩌면 우리는 아무 교훈도 얻지 못한 것은 아닌가? 아직도 끊임없이 아이들을 문제풀이 기계로 만들고 있으며, 순종적이고 단정한 아이들로 키우고 싶어한다. 조금 다른 생각과 표현, 서로 다른 머리 길이와 공부 방법을 인정하지 않는다. 네모난 틀 안에 가두어 놓고 틀 밖에 아이들은 학교 밖으로 버린다. 자퇴하는 아이들은 어디로 갈까? 그들은 과연 이 사회의 낙오자들인가?

  현직 교사들이 모여 학생생활연구회를 조직하고 현장에서 경험한 학교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이선생의 학교폭력 평정기>는 우울한 21세 대한민국 학교 교육의 진면목을 드러낸다. 교사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는 교육 정책과 학교 현실은 19세기와 넓은 의미에서 보면 달라진 것이 없다. 교육의 목표와 방향은 정치 논리나 이데올로기로 결정되지 않아야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 불법 판정을 받은 교과서를 밀어붙이는 교육부, 대학 입시에 올인하는 대한민국의 학생과 부모들,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아이들의 미래가 결정되는 교육제도 속에서 과연 폭력은 사라질 수 있을까? 논리의 비약이 아니다. 삭막한 가슴에 꽃이 피어날 수 없다는 자명한 논리 앞에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인가.

  고은우, 김경욱, 윤수연, 이소운 선생님은 초, 중,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다. 실제 현장에서 겪은 사례들은 소설이 아닌 현실이다. 필명을 사용했고 자세한 소속을 밝힐 수 없을 만큼 학교폭력은 심각하다. 몇몇 학교에서 벌어지는 소수의 아이들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자녀를 살펴보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책 없이 제도를 개선하고 처벌을 강화하는 것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대한 대책일 뿐이다. 왕따, 언어폭력, 물리적 폭행은 한 가족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아직 사라지지 않은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언론에서 주목하고 사회적 이슈가 되어야만 그 심각성을 인식하는 태도는 교육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한다. 최소 백년 후를 내다보지는 못할망정 당장 내 아이만을 위해 노력한다면 백년 후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저자들은 희생과 고통을 수반하자는 말이 아니라 학교 폭력 근절 대책을 세우자는 말이 아니라 교육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을 다시 생각하자는 외치는 것은 아닐까? 하루에 7시간의 정규수업, 보충수업, 학원, 과외, 인강, 독서실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삶은 계속되어야하는 것일까?

  이 책의 등장하는 준혁이, 한나, 경민이, 규명이, 경태, 동훈이, 기민이, 정욱이는 바로 우리들의 아들이며 딸이고 조카이며 친척이다. 그 귀한 아이들의 모습이라고 믿고 싶지 않지만 그들 뒤엔 반드시 문제적 부모와 환경이 기다리고 있다. 한 인간의 본성만을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하지 말자. 유전자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우생학적 논의는 관심 밖의 영역이다. 가만히 관찰하고 그 원인과 결과를 따라가보면 결국 기성세대의 문제가 드러난다. 학생 개인의 인성과 교사의 지도 능력으로 학교 폭력을 바라본다면 학교는 곧 지옥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090922-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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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 당신들의 대한민국 세 번째 이야기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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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선진화’ 되어 간다는 대한민국에서 과중한 학습과 시험부담, 학교와 부대 안에서의 폭력, 과로와 생계곤란, 경찰의 단속과 과잉 진압으로 목숨을 빼앗기거나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국내외 모슨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책의 서문이 숙연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은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인다. 사진을 찍을 때 높은 곳에서 아래를 조망할 때와 엎드려 낮은 각도에서 셔터를 누를 때 전혀 다른 사진이 찍히는 것처럼. 박노자는 <당신들의 대한민국 1, 2>를 통해 보여주었던 시선이 그대로 유지된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는 21세기가 시작된 후 우리들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기준이 어디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겠지만 그는 왼쪽에서 우리 사회를 바라본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사회가 나아갈 방향과 지향점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같을 수도 있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많이 다른 게 현실이다. 민주주의라는 제도적 장치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여러 사람의 생각을 모으기 위해 우리는 대의 민주주의제를 기본으로 사회를 유지한다. 지나온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더듬어 볼 수 있다. 한국사를 전공한 박노자의 시선은 항상 ‘외부자의 시선’으로 느껴진다. 뼛속까지 한국인인 경우와 귀화 한국인의 생각이 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것이 반드시 태어나고 자라온 환경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박노자는 러시아 태생으로 1991년 국내 대학에서 3개월간 유학생활을 경험한다. 1996년에 국내 대학의 러시아어과 전임강사를 거쳐 2000년부터는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의 한국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한민국에서 생활한 것은 4년 남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과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대한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과 직접 체험은 우리가 미처 자각하지 못하는 부분들까지 꼼꼼하게 진단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우리의 의식과 문화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이 왜 그의 눈에는 낯설게 보이는지 깨닫게 된다.

  <당신들의 대한민국> 세 번째 이야기에 해당한다. 앞선 그의 저작들이 보여주었던 날카로운 비판 정신과 우리 사회에 대한 애정 어린 충고는 귀담아 듣고 공론화할 만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가 이 땅에서 부대끼고 아파하며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비록 귀화한 한국인임에 틀림없지만 대한민국의 운명 공동체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개인적인 판단일까?

  저자는 이 책에서 ‘복지국가’와 ‘진보정치’라는 두 개의 화두를 제시한다. 여러 지면에 발표한 칼럼과 그의 블로그에 있는 글들을 모은 이 책은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로 돌아가고 있는 현실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으로 ‘개혁’을 외치던 대한민국은 다시 보수정권의 손을 들어주었다. 공교롭게도 두 전직 대통령이 한꺼번에 사망한 2009년에 우리는 지난 10년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을까. 무엇보다도 앞으로 대한민국이 나아갈 방향과 지표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의 삶이 상식과 보편성 측면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한국에서 대중적 진보 정당을 한다는 것은 가시밭길이지만 꼭 가야 할 가시밭길이다. 성패 여부와 무관하게, ‘의미 있는 소수’로 존재해도 좋다. 그 소수로부터의 압력마저 없다면 대한민국은 오늘날보다 더 야만적인 ‘중간급 소제국’이 될 것이다. - P. 44

‘개혁’ 담론이라는 게 한국에서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물론 제2, 제3의 노무현이 집권을 할 수야 있지만, 그 실적은 제1대 노무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이 그 무슨 ‘개혁’ 이야기를 들먹여도 ‘한국적 체제’ - 군사 ․ 안보 국가, 부동산 과열, 토건 집중, 관료들에 대한 대자본의 지배, ‘명문대’ 학벌 우대, ‘현대판 천민(비정규직)’ 과중 착취 등등 - 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 P. 55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대한민국에 진보정당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용기가 없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자본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롭고 극소수의 기득권층이 아닌 대다수의 서민들이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우리는 이제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박노자는 이 책에서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일상의 문제점과 모르고 지나쳐버리는 불편한 진실들을 토해낸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다함께 잘 살아가려는 노력이 부족한 현실은 도대체 어떻게 개선될 수 있을까? 속 시원한 대안과 해답을 한 마디로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치인과 재벌 총수에게 모든 희망을 걸어볼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다.

남과 같이 소비하지 않으면 불안과 외로움을 느끼고, 혼자 조용하게 있으면서 ‘나’의 존재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삼성공화국의 배부른 노예 대다수에게 이 이야기는 아마도 내향적 성격 때문에 사회와 어울릴 줄 모르는 낙오자의 설교로 들릴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자신들의 진정한 존재(실존)로부터도 소외되어 인간으로서의 ‘나’를 상실하고 만다. 이런 기성세대가 있기에 수만 명의 10대들이 온라인 게임의 중독자가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이미 폐인이 돼가는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텔레비전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없는 우리의 노예적 현실에 대한 반성이 절실하다. - P. 125

  우리는 미래의 희망을 먹고 산다. 기대할 내일이 없다면 현실의 고통과 불편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 하지만 그 희망이라는 괴물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는지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합의할 수 있고 기대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떠해야 하는지 잠시 생각해보자. 그리고 과연 ‘왼쪽’이 정치적 이념을 의미하는 것인지 보다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것인지 따져보자. 박노자의 목소리는 공허한 울림이 아니라 내일을 위한 방향 지시등일지도 모른다.

“청소부와 이야기하든 장관과 이야기하든 똑같이 대하기. 어조, 태도, 말이 주는 느낌으로라도 인간을 차별하면 절대 안 된다.”(티모페에프-레소프스키) - P. 184


090921-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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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시간에 옛글읽기 문학시간에 읽기
전국국어교사모임 엮음 / 나라말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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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문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 선인들의 옛글조차 원문으로 읽을 능력이 없어 안타까울 때가 많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제대로 된 번역본을 꼼꼼하게 고르는 수밖에. 옛글을 읽는 즐거움은 시간을 견뎌낸 책과의 대화로 시작된다. 대부분 조선시대로 한정되긴 하지만 당대를 살아냈던 선조들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글을 읽는 동안 우리는 시간 여행을 즐길 수 있다.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선비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 착각을 하게 된다. 마음으로 읽는 글은 지식과 교훈보다 깨달음과 지혜를 전해준다. 좋은 옛글을 읽는 것은 조상들의 지혜를 전수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전국국어교사모임에서 펴낸 <문학시간에 옛글 읽기>는 고전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는 좋은 글들이 엄선되어 있다. 책을 잘 읽지 않는 청소년들에게 옛글을 읽히는 것은 더욱 어렵다. 따분하고 지루하다는 편견 때문에 잘 읽지 않게 된다. 그 편견의 원인은 교과서다. 국정교과서로 국어를 배우고 문학교과서는 검인정 도서로 18종이나 된다. 내년부터는 중학교 1학년부터 국어교과서도 23종 검인정 시대를 맞이했다. 각급 학교에서는 교과서 선정이 한창이다. 교육과정이 바뀌고 새 교과서가 나올 때마다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검증된 작품이나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 중에 바탕글이 선정된다.

  국어시간에 문학작품만 배우는 것은 아니다.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능력이 고루 갖춰져야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대학입시를 정점으로 모든 공교육은 피라미드 구조를 이룬다. 고등학교와 중학교, 초등학교는 이제 경쟁을 내면화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운동부를 없애고 공부 못하는 아이에게 전학을 권유하고 초등학생에게 보충 수업을 시키는 당황스런 일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이제는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모두 손을 놓고 불구경하듯 서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누구의 책임이고 어떻게 바꿀 것인가?

  책을 읽는다는 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제대로 된 눈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말이다. 실천하지 않는 지식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가치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의 삶은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인지 난감하다.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아니다. 진리는 변함없이 시간을 뛰어넘는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지나간 역사에서 그리고 고전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청소년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권하는 사람부터 책을 읽어야 한다. 거실에서 TV를 보며 아이들에게 방에 들어가 공부하라고 소리지르는 부모님, 책 한 권 읽지 않으면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선생님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건방진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가르치는 사람이 책을 보지 않는다면 무엇을 가르치는지 나는 궁금하기만 하다. 능력있는 분들의 노하우를 배우고 싶을 때가 많다.

  이 책은 전체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는 사물과 현상을 통한 깨달음, 2장에는 어떤 일의 내력을 밝힌 글과 여행기, 3장은 편지글, 4장은 먼저 간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담은 글, 5장은 세상일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글, 6장은 삶과 세상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드러낸 글이 담겨있다.

나는 비로소 사람을 기르는 방도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먹을 것을 잘 먹여 기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잘 이끌어 주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나는 눈먼 암탉이 병아리들을 기르는 것을 보고 사람을 기르는 도를 깨달았다. - P. 275 할계전(瞎鷄傳)

  좋은 글들이 너무 많아 손꼽기도 어렵다. 짤막한 글들이기 때문에 짧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읽기 좋은 책이다. 그 가운데 나는 할계전의 한 토막을 적어본다. 애꾸눈이 된 어미닭이 병아리를 기르는 방식은 어쩔 수 없는 자신의 한계이지만 아이를 기르는 부모와 교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교육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

  주옥같은 옛글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가슴 깊은 감동을 느끼기도 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 먼저 읽어보고 아이들이나 학생들에게 권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 물론 옛글이라면 무조건 따분하다고 생각하는 일반인을 위해서도 일독을 권할 만한 책이다. 각 장 뒤에는 생각할 문제가 몇 가지 정리되어 있다. 사유의 깊이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닐 것이다. 물론 정답은 없다. 생각을 넓히고 함께 고민하고 토론할 수 있다면 이 책은 더없이 좋은, 살아있는 문학 교과서가 될 것이다.


090915-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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