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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책도 사람처럼 언제 읽느냐가 중요하다. 열여섯의 <데미안>, 열일곱의 <새벽편지>, 열여덟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아홉의 <지와 사랑>, 스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떠오르는 것은 나이보다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일생동안 많은 책을 읽고 잊어버린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작가는 바로 그 순간에 내가 듣고 싶은 말을 건넸기 때문일 것이다.
이윤기를 전작주의로 삼은 조희봉은 <전작주의자의 꿈>을 통해 한 작가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해석을 통해 책읽기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방법은 조금씩 다양하겠지만 많은 독자들이 이렇게 한 작가에 탐닉하다가 이별하고 또 새로운 작가를 만나고 헤어진다. 헤르만 헤세, 정호승, 오규원, 황지우, 김지하, 김남주, 황석영, 밀란 쿤데라와 함께 사춘기를 보낸 기억이 아득하기만 하다.
<파피용> 이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에 시큰둥해지고, <어둠의 저편> 이후로 하루키의 소설에 하품을 하듯, <행복의 건축>을 거쳐 <일의 기쁨과 슬픔>으로 보통씨와 이별할지도 모르겠다. 아주 오래 전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으로 그의 책을 거의 다 읽었지만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은 아니지만 재미도 감동도 없고 새로운 깨달음이나 지적 충격도 느껴지지 않는 책을 붙잡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슬럼프 없이 매년 4할을 넘기는 타자도 매력이 없긴 하지만, 보통씨와 이제 당분간 작별할 시간이 왔는보다. 점점 입맛만 까다로와지는 노인네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그의 신작 <일의 기쁨과 슬픔>은 한국에 대한 특별한 애정과 배려가 곳곳에 배어 있다. 책머리에 정성스럽게 쓴 ‘한국의 독자들에게’ 말미에 적은 것처럼 집을 얻는 데 한국어판 인세가 큰 보탬이 된 것에 대한 보답처럼 느껴져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의 팬이 많기 많은가보다. 어쨌든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성격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이번에 나온 그의 책은 열 개의 장의 구별된 ‘일’에 관한 에세이다. 발로 쓴 에세이는 관념적이거나 감상적인 산문과 구별된다. 정확한 관찰과 꼼꼼한 기록 그리고 현장을 따라가는 탐방 기사같은 글들이 읽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선을 제공한다. 일상에 묻혀있다 보면 주변에서 늘상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무감각해지기 쉽다. 현관 문 밖에 신문이 슬라이딩 하는 소리를 듣는 새벽처럼.
현대인의 삶은 바쁘다. 쉬지 않고 일하고 남들보다 열심히 뛴다. 특히 한국인의 부지런함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쉬고 즐기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쉰다. ‘일’은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마치 종교와 같은 일의 숭고함을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지속되는 한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일이 어떤 일이든 무엇이든 말이다.
알랭 드 보통은 화물선 관찰하기로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이야기한다.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로 느껴지는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은 ‘일’에 인격을 부여한다. 물류센터를 돌아보고 비스킷 공장을 찾아가며 직업 상담가를 만나고 로켓과학의 눈부신 성과를 살펴본 후 화가를 따라가기도 하고 송전탑을 따라 무작정 걸으며 회계의 필요성을 확인하고 창업자들의 고단함과 항공 산업의 놀라움을 관찰한다.
열 개의 장으로 구성된 에세이는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면서도 조금 거리가 느껴지는 이야기들이다.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며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있지만 실감하지 못하는 일들은 얼마나 많은가. 24시간 동안 톱니바퀴처럼 일사분란하게 돌아가는 세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얼마나 흥미진진한 곳인가. 보통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책은 보통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흡인력있는 문장으로 독자들을 매혹시킬만하다. 사색적인 태도로 섬세하게 묘사하고 적절한 비유를 통해 차분하게 전달한다. 흥분하거나 강하게 밀어붙이는 일이 없고 속삭이듯 이야기하고 감각적이고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이 책도 그가 보여주는 새로운 시각과 조우할 수 있는 신선함으로 가득하다.
‘일’이 줄 수 있는 기쁨과 슬픔은 독자 개개인이 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든지 저자가 말하는 열 개의 범주 너머에 존재하는 수많은 ‘노동자’의 삶은 자신의 정체성을 말해줄 것이고 현재의 삶을 보여주며 미래의 작은 희망을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한다. 책표지의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갈라지고 메마른 사막에 놓인 붉은 여행 가방처럼 낯설게 내가 하는 일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책이었다.
090927-0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