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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고향옥 옮김 / 양철북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 길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 가장 단순하지만 인상적인 말이다. 우리들의 삶을 길에 비유하는 일이 많은데 한 사람의 길이 끝났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개인적인 일이 일단락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학교를 졸업했다는 뜻이기도 하며 직업을 바꿨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막다른 길은 없다. 모든 길은 이어지고 끊임없이 길들이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결국 인간이 걸어야 할 길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한 사람 두 사람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길이 만들어진다는 노신의 말은 삶의 방법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남들이 가는 길만 걸어가는 것은 재미도 없고 즐겁지도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새로운 길만 만들어 걸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미 만들어진 길을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때가 많다. 우리는 걷고 또 걸으며 길에 대해 생각하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삶이라고 부른다.
그 중에서도 가족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길이다.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형제나 친척을 선택할 수도 없다. 일본작가 시게마츠 기요시의 <졸업>은 우리의 삶에서 가족이 가지는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소설집이다. 네 편의 중편을 모아놓은 이 책은 가깝고도 먼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와 위안을 주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씻을 수 없는 가장 큰 상처와 고통을 주는 존재이기도 한 가족 이야기는 진한 눈물과 잔잔한 미소를 선사한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졸업’은 한 인간의 성장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살한 아버지의 유복자로 태어나 14네 살이 된 아야는 죽은 아버지의 친구 와타나베를 찾아온다. 와타나베의 시각으로 서술되는 이 소설은 오래된 기억을 더듬으며 친구 딸의 아버지 찾기에 동참한다. 새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별탈 없이 성장했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얼굴조차 본 적이 없는 생물학적 아버지에 대한 호기심과 애틋함은 사춘기 소녀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실존적 고민이다. 결국 아버지가 자살한 시간과 장소에서 유년기를 졸업한다는 내용이다. 우리에게 졸업은 학교를 마치는 일이 아니라 한 개인의 인생에서 어떤 시기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 소설 ‘행진곡’은 어머니의 죽음을 앞둔 한 남자의 기억을 더듬는다. 어린 시절 끊임없이 노래를 불러 문제아가 된 여동생과 어머니의 관계를 통해 일류 중학교에 입학하고 ‘히키코모리’가 된 아들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내용이다. 잊혀진 유년의 기억과 가족 간의 관계를 깨닫는 과정은 부모가 자신에게 쏟았던 사랑만큼 자식에게 그 사랑을 물려주는 일과 다름없다. 물이 흐르듯 그렇게 사랑은 세대를 넘어 관계와 존재의 단단한 연결고리가 된다.
‘아버지의 마지막 수업’은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아버지의 죽음을 앞둔 중학교 교사인 아들이 서술자이다. 아버지 세대가 아이들을 다뤘던 방식에 대한 잔잔한 술회, 죽음과 시체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한 아이를 통해 아버지가 남긴 것은 무엇이고 아버지의 죽음의 의미는 아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본다.
마지막 단편 ‘추신’은 여섯 살에 어머니를 잃은 소설가의 이야기다. 어머니가 병상에서 남긴 노트를 중심으로 새엄마와의 해묵은 갈등과 화해를 다루고 있다. 새 어머니의 아들인 동생을 통해 인정할 수 없는 어머니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늘에 계신 어머니만을 인정했던 시간들을 돌아본다. 상상속의 어머니를 실존인물처럼 잡지에 연재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존재를 다시 생각한다. 이제 늙어버린 어머니의 잠든 모습을 보며 소설가가 된 어린 아들은 두 명의 어머니를 받아들이게 된다.
네 편에 등장하는 소설의 주인공은 공교롭게도 마흔 살 먹은 남자다.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해 있지만 가족이라는 연결 고리 안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하고 생의 진부함을 확인한다. 우리의 삶은 무엇이라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다. 때로는 안개 속을 헤매듯 방향을 알 수 없이 달려가다가 문득 주변을 돌아보면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끝없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존재의 출발점과 종착역은 가족일지도 모른다.
먼 여행을 하고 돌아와 편히 쉴 수 있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다. 생의 순간순간을 ‘졸업’하며 우리는 그 의미를 되새기고 다음 생을 준비한다. 시게마츠 기요시의 소설은 평온하고 잔잔한 음악처럼 낮은 목소리로 현대인의 삶에서 가족이 주는 의미를 묻고 있는 듯하다. 네 편의 소설을 통해 나는 가족이 아니라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090924-0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