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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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위험에 대한 경고는 언제나 실제로 닥쳐오는 위험보다 많지만 막상 위험이 닥칠 때는 어떤 경고도 없는 법이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불길한 예감을 전해준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걱정 중에서 30%는 일어나지 않고 45%는 사소한 것이며 25%는 과거의 것이라는 심리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불안이 기실 쓸데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거나 준비할 수 없는 위험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하는 것은 인생을 불행하게 사는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막상 위험이 닥칠 때 우리는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된다.

  소설은 현실에서 가능한 모든 이야기뿐만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거기에 일어날 수 없는 일들까지 상상하는 것은 물론이다. 작가의 상상력은 한계가 없어야 하며 간접 경험의 즐거움은 예상할 수 없을수록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정해진 순서와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보다 우리는 때때로 황당하고 기괴하지만 딱히 불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들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는다. 바로 편혜영의 『재와 빨강』같은 소설 속에서 말이다.

  삶의 아이러니에 대해 생각해 본다. 한 순간도 빈틈없이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한가? 아니면 게으르게 하고 싶은대로 적당히 즐기면서 사는 사람이 행복한가? 물론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쪽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치열하게 욕망할수록 불행해지고 포기한 듯 절망하는 편이 더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생의 아이러니다. 삶이 부조리하지 않고 정해진 규칙과 룰에 따라 움직이는 순간 모든 예술은 사라진다. 말할 수 없고 해석되지 않는 영역에 대해 보여줄 것이 없다면 소설가는 무엇을 쓸 수 있단 말인가.

  편혜영의 장편 소설 『재와 빨강』은 위험한 상상과 불온한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불가능한 상황 설정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미리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경계선 너머의 인생에 대한 불안을 표현하는 것이다. 사건은 단순하다. 제약회사에서 약품을 개발하던 주인공은  C국에 파견된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C국에 도착하자마자 불행은 시작된다. 이혼한 아내가 칼에 찔려 죽었다는 동창생 유진의 말을 믿을 수 없으나 출국하기 전날 그의 기억은 흐릿하기만 하다. 혼란스런 그는 감금생활을 해야하는 아파트에 낯선 사람들의 방문을 받고 쓰레가 더미로 뛰어 내린다. 부랑자 생활을 거쳐 방역업체에서 쥐를 잡게 된다. C국에 파견된 것도 쥐를 잡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독자들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주인공은 결국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채 소설은 끝이 난다.

  어둠과 파괴 그리고 동물적 상상력의 세계가 재로 표현된 것 같다. 눈부신 빛과 인간의 생명을 상징하는 빨강으로 나타낸 것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재와 빨강은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이미지로 주인공 사내의 아이러니한 삶을 극적으로 대비시켜 보여주는 듯하다. 기괴한 이미지와 칙칙한 분위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헤어날 수 없는 수렁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아내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동일시된 자아를 발견한다.

  조금씩 상황만 다를 뿐 이보다 더 지독한 반전과 생의 아이러니를 경험하기는 힘들 것 같다. 전혀 낯선 세계에서 살인자가 되어 쫓기는 주인공은 전염병과 낯선 언어와 사람들 속에서 오로지 치열하게 생존을 위해 버틴다. 멀쩡한 직장과 평범한 일상이 있는 곳에서 전혀 다른 세계로 진입한 주인공은 자신의 선택과 타인들의 보이지 않는 손길 때문에 극적 반전을 경험한다. 우리의 삶도 이러하지 않은가? 최선을 다해 노력했고 치열하게 욕망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불행의 시작이 되는 모순. 이것이 아마 모든 인간의 운명은 아닐까?

  편혜영은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는지 모르겠으나 신종플루의 공포가 전세계를 뒤덮던 시기에 인간의 삶은 언제든 극적 반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것 같다. 독자들의 입장에서 불편하게 읽히지만 새롭고 낯선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 그로테스크한 세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소설도 우리에겐 언제든 필요하다. 생경한 방식으로 인간과 삶의 방식을 통찰하고 있는 작가의 다음 소설도 기다려진다. 조금 더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로 우리를 안내 줄 것만 같기 때문이다.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지만 나는 언제나 소설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며 작가들의 애정만큼 가열차게 욕망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것이 헛된 욕망이며 오히려 불행을 경고하는 빨간 신호등일지라도 말이다.


100413-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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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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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을 돌아보면 아득한 느낌이 든다. 1980년대 폭압적 정치현실과 사회적 혼란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많다. 최승호의 「대설주의보」는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우회적으로 ‘백색 계엄령’을 선포했다. 곽재구의 ‘은행나무’, 이성부의 ‘벼’ 같은 시와 함께 최승호의 ‘대설주의보’는 한 시대를 상징하는 시가 되었다.

  윤대녕의 신작 소설집 『대설주의보』의 제목은 곧바로 최승호를 연상시켰다. 윤대녕은 작가의 말에서 최승호에게 제목을 허락받았다는 내용을 적고 있어 연상작용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시와 소설의 내용은 무관하다.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를 읽고 임철우가 ‘사평역’이라는 소설을 쓴 것과는 거리가 좀 있다. 제목이 같다고 해서 상징적 의미가 동일하지는 않다. 다만 대설주의보라는 말이 주는 눈의 중량감, 백색의 공포와 혼란 등의 이미지는 윤대녕의 소설에서도 그대로 차용된다.

  일곱 편의 단편이 묶인 이번 소설집은 『제비꽃』 이후 그를 기다린 많은 독자들에게 단비처럼 충분하게 갈증을 풀어준다. 책장을 덮는 순간 다음 책을 기다리게 하는 작가를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윤대녕의 소설은 늘상 변함없는 것처럼 읽히지만 조금씩 변하고 있다. 『은어낚시통신』으로 80년대 소설의 문을 닫았던 그는 이제 아이러니하게도 80년대를 대표하는 시와 동일한 제목인 『대설주의보』로 2010년대의 문을 열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평론가의 말대로 ‘존재의 시원’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일에 지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작업을 줄기차게 해 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평단과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으며 꾸준히 자기 세계를 구축해가는 행복한(?) 작가 윤대녕의 앞으로도 계속 기다릴 필요가 있다. 

  『제비꽃』이 출간됐을 때 예스 24 독자와의 대담에서 그를 만났던 기억이 새롭다. 이대 후문 북카페에서 어느 독자가 ‘소설이 되지 않는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쓴 리뷰였음을 작가는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두 시간 이상 이어진 대담으로 가까이서 본 그의 모습은 소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작가의 소설 속 주인공들을 만나고 있다는 생각은 나만의 착각이겠지만 즐거운 추억이다.

  이 책에 수록된 일곱 편의 소설들은 단편이면서 장편으로 읽힌다. 유사한 인물들 혹은 비슷한 사건들이 중첩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 상황, 마음의 갈피들이 끊어진 듯 보이지 않게 이어져 있는 것 같다. ‘보리’는 ‘정희’를 연상시키고, ‘수연’이는 ‘은주’를 떠올리게 한다. ‘해란’이가 ‘연미’고, ‘혜경’이 울산 화장품점 아가씨로 보인다. 이렇게 주인공들이 선명하면서도 중첩되는 것은 이 소설집이 단순한 단편 모음이 아니라 유기적인 구조물로 보이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보통 한 작가의 소설집을 읽다보면 파편화된 단편들이 뒤섞여 인상적인 한 두 편을 제외하고는 기억조차 희미해진다. 그런데 『대설주의보』는 한 편 한 편이 선명하게 각인된다. 그렇게 윤대녕의 문체와 감각이 오롯이 전달되는 것은 개인적인 취향 뿐만 아니라 그의 소설이 가진 진정성의 힘은 아닐까? 결국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일상에 대한 환멸 속에서 길어 올리는 필연적 구멍 같은 것은 아닐까? 현실에서 모든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 버리는 힘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간극 때문인지도 모른다. 메울 수 없는 그곳에 대한 미련과 그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려는 간절함이 팽팽한 긴장을 만들고 그 긴장의 끈을 조율하는 솜씨는 윤대녕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다.

늘 그리워하지는 않아도 언젠가 서로를 다시 찾게 되고 그때마다 헤어지는 것조차 무의미한 관계가 있다. - ‘대설주의보’, 101쪽

  표지를 벗겨내고 소설을 읽다가 처음 밑줄 그은 문장이다. 나중에 표지 카피로 썼음을 확인하고 편집자를 떠올려 보았다. 윤대녕이 말하는 그 관계는 말해지는 순간 그것이 아닌 관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가 맺는 수많은 관계 속에 그 말의 진실이 숨어 있다. 확언할 수 없는 미래, 불투명한 현재, 아득한 과거 속에서 서로 상처 받는 인간 군상의 모습들을 객관적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내면의 문제로 몰아가는 작가의 태도는 오히려 절실함에서 독자들을 압도한다. 비현실적 인물들을 보는 거리감이 아니라 나사가 하나씩 빠져버린 사람들의 무감함이 오히려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상처는 대개 스스로 받는다는 사실을.

“뭐 꼭 또래를 사귀라는 법은 없지. 하지만 모쪼록 상처에 대비하거라. 상처라는건 대개 스스로 받는거니까.” - ‘대설주의보’, 136쪽

  가끔 윤대녕의 소설을 읽다가 현실 속의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아니 내 주변 사람들을, 그들과의 관계를 돌아본다. 그래서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문장에 혹은 관계의 잔인함에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 서로를, 자신을 속이며 살아가는 우리를 위하여!

도대체 우리는 무슨 일을 하며 나이를 먹어가고 또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일까. 사는 게 모두 어리석고 잔인한 속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 윤대녕, ‘도비도에서 생긴 일’, 234쪽

  거대한 서사도, 기막힌 사건도, 처음 듣는 이야기도, 특별한 인물도, 가고 싶은 배경도, 자극적인 표현도, 없다, 윤대녕의 소설에는. 하지만 여전히 그의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평론가 신형철의 말대로 “시를 엿보는 소설도 있지만 시를 통과한 소설도 있다는 것을, 남자와 여자는 완전히 만날 수도 완전히 헤어질 수도 없다는 것을 나는 그의 소설에서 배웠다.”

세상 모든 이들이 저기 언덕 너머에 숨어 있는 달리아 밭처럼 뜨거운 마음으로 생을 살아가기를 바라며, 삼가 두 손 모음. - 윤대녕, ‘여름, 여행’, 276쪽

오늘도 삼가 두 손을 모으고 하루의 생을 마감한다.


100407-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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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 사랑, 결혼, 가족, 아이들의 새로운 미래를 향한 근원적 성찰
울리히 벡.벡-게른스하임 지음, 강수영 외 옮김 / 새물결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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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건 아니면 눈이건 또는 대양이건
한때 활짝 피었던 모든 것은 이제는 져버리고
오직 두 가지만 남았다네. 공허
그리고 상처입은 자아만이.

사랑의 열정은 처음부터 서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게 하거나 그 사람에 대해 진정으로 공감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 자신 속으로 가장 깊숙이 파고들어가는 것이며, 천 번, 만 번 접힌 외로움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 자신의 외로움으로 하여금 만물을 포용하는 세계로 뻗어나가 나래를 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천 개의 빛나는 거울에 둘러싸인 듯이


  한 때, 사랑이 생의 전부이던 시절 - 그 미망에 사로잡혀 온통 전 존재를 불태울 수 있다고 믿었던 순간이 누구에게나 존재하리라.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산업화와 근대화의 자본주의 사회가 ‘위험사회’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한 저명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아내 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과 함께 ‘사랑’에 대한 주목할 만한 저서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을 남겼다. 이 책은 사랑과 결혼 그리고 가족과 아이들의 새로운 미래를 성찰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과 사랑의 근본적 구조에 대해 조망함으로써 인간 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물론 미래를 통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사랑’에서 시작된다.

  인생은 어느 시인의 시처럼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 ‘사랑’의 의미와 역할은 개인에 따르지만 이것 또한 사회화 과정에서 빚어진 남녀 간의 차이와 전통적 가족관계와 분리될 수 없다. 사랑은 결혼으로 열매 맺는다는 고정관념은 많은 사람을 불행에 이르게 한다. 가족과 아이들의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과연 ‘사랑’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있는가.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과 그의 아내는 다양한 측면에서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성 간의 사랑도 역사적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고 사회적 관점에 따라 다르게 반응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사랑은 무엇일까?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자본의 결합에 다름 아니다. 아니, 결혼에 대해 조금만 냉정하게 살펴보자. 소설가 정이현은 『낭만적 사랑과 사회』, 『달콤한 나의 도시』 등을 통해 이미 사랑과 결혼에 대한 속물적 욕망에 대해 냉소를 날린 바 있다. 어느 사회든 경제적 기반과 결혼의 상관 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순수한 ‘사랑’에 대한 열망에서 한 순간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 인간이다.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 그 낯선 열정과 들림[憑]의 상태는 정상에서 벗어난 열기에서 비롯된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까?

사람들이 사랑에 더 많은 희망을 걸면 갈수록 사랑은 그만큼 더 빨리, 모든 사회적 결속을 잃어버린 채 허공 속으로 사라져 간다. - P. 23

딜레마의 양측면, 즉 자기자신이 되는 것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 이 둘이 모두 뚜렷이 나타나고 제각기 주목해 달라고 아우성쳐대는 곳이 바로 이 오래된 결혼이기 때문이다. - P. 135


  저자들은 이 책에서 개인화가 초래한 삶과 사랑의 여러 가지 방식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예속적이고 관계 지향적이던 결혼제도가 개인화되는 과정에서 어떤 의미와 역할을 가지게 되는지 살펴보면 사회의 진화 과정이 한 눈에 들어온다. 결국 근대화는 자아의 발견과 결혼제도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는 지난한 과정과 다름없다. 사랑이냐 자유나 그것이 문제로다. 함께 사는 과정에 벌어지는 문제들은 고스란히 사회 문제와 연결된다. 교육과 취업, 가사노동이 산업혁명과 맞물려 남녀의 성별 투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개인화, 파편화 된 것 같은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더 중요해진다. 끈끈하고 1차적인 관계가 사회의 기본 구조와 바탕이었던 전근대 사회보다 역설적으로 사랑의 중요성이 커진 이유는 전통적 결속보다 개인적 안정성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자유로운 사랑과 이혼 과정에서 자유는 증대됐지만 안전은 감소했다. 시대가 변해도 절대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능은 자식 사랑이다. 아이에게 모든 사랑을 쏟는다는 것은 아이를 자신의 아바타로 생각하는 부모들이 늘어간다는 뜻이다. 타자로서,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자신의 종속변수가 된다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저자들은 이 책의 말미에서 사랑을 신흥종교에 비유하고 있다. 우리의 세속적 종교인 사랑이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고 현실의 도피처가 될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사랑은 수많은 역설을 내포한 감정의 물결이다. 아무리 사회적 의미를 고찰한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 해석할 수 없는 불가해한 영역이 사랑은 아닐까?

사랑을 위한 결혼은 겨우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나서야 존재하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산업혁명의 발명품이었다. 그러나 사회 현실과는 정반대로 사랑을 위한 결혼은 가장 바람직한 목표로 간주되고 있다. - P. 296

  2010년의 사랑이 산업혁명의 발명품이든 신자유주의의 고통이든 사회 현실의 우울한 자화상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안에서 꿈을 꾸고 의미를 찾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소박한 생각들은 변함없이 계속된다.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조차 사회 변화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랑은 자본주의 안에 있는 공산주의이다’라는 말을 믿고 싶다.

사랑은 자본주의 안에 있는 공산주의이다. 노랭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주며, 이는 그를 한없이 기쁘게 한다. - P. 303


100405-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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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한 개비의 시간 - 제3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문진영 지음 / 창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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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여전히 흔들렸고, 버스 손잡이가 아닌 그의 팔을 잡았을 뿐인데 나는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았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내 옆에서 함께 흔들려주었기 때문인지도.

  그렇게 흔들리는 인생에서 단 하나 흔들리지 않는 무엇인가를 갖고 싶어 한다, 우리는. 아니, 흔들려도 좋으니 옆에서 함께 흔들려주는 누군가를 원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불안하고 곁에 있는 사람조차 나와 다른 리듬으로 흔들릴 때 고독을 절감한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다. 혼자라서 느끼는 외로움과 다른 내 실존의 깊이. 사춘기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근원적 자아와 마주한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자아정체성이 형성될 무렵에 낯설과 자신과 대면하지 못한 사람은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조차 불안하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죽도록 달려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알 수 없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드디어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진 후에도 고독하기는 마찬가지다.

  신인작가 문진영의 『담배 한 개비의 시간』은 2010년 청년들의 그로테스크한 초상화이다. 제3회 창비장편소설상을 받았으니 한 젊은이는 구원을 받았으나 그가 현실에서 만났던 혹은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청춘들은 결코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이 소설은 그만큼 우울하게 읽혔다. 소설은 어차피 읽는 독자들의 수만큼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고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면 나는 이 소설에서 미래의 희망이나 그래도 다시 한 번 따위의 안일한 현실 인식을 읽어내지는 못했다. 이 소설은 그만큼 참담한 현실을 건조한 목소리로 담아내고 있다.

  문진영은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는 스물넷 대학생이다. 여자 대학생이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모래바람이 서걱이는 메마른 목소리로 담아내고 있어 독자들에겐 출구 없는 미로처럼 답답하게 읽힌다. 단순하게 소설을 쓰기 위해 오랜 시간 습작 과정을 거친 문학 소녀의 글이 아니라 감수성 예민한 대학생의 고백처럼 읽히는 것은 문진영의 문장이 가진 매력이거나 현실의 아득한 거리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니체가 말했다.
한낮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찌 할 수 있으랴. - P. 36


  소설은 네 명의 주인공이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이다. 보잘 것 없는 비정규직 혹은 예비 직장인의 생활에 대단한 사건은 없다. 물이 흐르듯 시간 속에 스며드는 청춘들의 하릴없음이 아프게 느껴진다. 미친 듯한 열정과 미래의 꿈에 대한 도전이 피 끓는 젊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부박한 현실에서 길어올릴 수 있는 작은 희망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 소설에서는 그것을 찾을 수가 없다.

  대한민국 자본주의 본산 강남의 한 편의점에서 일하는 주인공은 희망도 미래도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좌절과 슬픔 속에서 우울하게 살아가는 청춘도 아니다. 그가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M이나 편의점에서 교대로 일하는 J 또한 마찬가지다. 건너편 카페에서 일하는 물고기도 나와 비슷하다. 네 명의 등장인물은 성별과 상황만 다를 뿐 표정 없이 떠도는 미라처럼 감정이 배제된 것 같다. 익명성의 천박한 자본주의 중심에 서있는 주인공은 일회용으로 가득한 편의점처럼 조용하고 시원하게 그렇지만 환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 흑백필름 같은 현실을 문진영은 결코 우울하게 그려내지 않는다. 한낮의 빛이 어둠의 깊이를 알 수 없다는 듯 네 명의 청춘들은 그들만의 깊이와 넓이로 하루하루를 견뎌낸다. 밝고 경쾌할 정도는 아니지만 잔잔한 미소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의 유머와 감각적인 문장들은 이 소설의 장점이다. 높고 큰 목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어딘지 꾹꾹 힘주어 눌러 쓴 초등학생의 공책처럼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할 것 같은 진지함이 묻어난다.

게다가, 딱 한 판만 더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거든. 한 판만 더, 한 판만 더…… 그러다가 막상 성공하고 나면, 그때는 최단기록을 내고 싶어지는 거야, 젠장. 사는 게 그런 거지. - P. 121

  사랑조차 돈에 저당잡힌 88만원 세대의 세태소설로 읽는다면 이 시대의 청춘이 너무 비참하다. 이 소설은 그렇게 통속적으로 읽을 수도 있겠으나 ‘꽃들에게 희망을’ 외치는 양치기 소년처럼 아이들에게 젊은이들에게 끝없이 경쟁을 강요하고 1등만 독려하는 사회의 어른들이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만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가르친 어들들에게 묻고 싶어졌다. 눈높이를 낮추면 취직할 수 있는지 취직하고 나면 결혼해서 집사고 행복하게 애를 키우며 살 수 있는 세상인지.

  세상은 조금씩 자란다고 믿는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들이 만들어가는 바람직한 세상을 생각해 보자. 새장 속에 갇힌 새처럼 날개짓을 할 수 있는 한정된 공간만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날 수 없는 날개를 달아 준 것은 아닐까? 우리는 지금 아주 많은 위험과 시련 속에 서 있다. 교육, 환경, 정치, 사회, 문화 등 어느 것 하나 희망만으로 가득했던 시절은 없었지만 지금은 혹독한 겨울이다. 아무리 난해한 문장들로 가득 찬 책이라도 읽을 수 없는 책이 없는 것처럼 이겨내지 못할 겨울도 없는 법이다. 어쩌면, 당신이 그런 책일지도 모른다.

그래, 어쩌면 당신은 늘 내게 책장을 펼쳐 보이고 있는 한 권의 책이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언어로는 도무지 해독해낼 수 없는, 난해한 문장들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었다. - P. 135


100328-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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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지음 / 사회평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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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아니, 우리 각자가 삶의 지향점으로 삼고 있는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생의 목표와 가치관은 변할 수 있다. 또한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질 수 있고 주변 사람과의 관계와 행복의 의미가 바뀔 수도 있다. 사람들의 선택할 수 있는 폭과 범위는 각자 조금씩 다르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결정된 운명적, 태생적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한국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누구나 조금씩 다른 부모와 환경에서 태어나 자란다. 그것이 전부 일수는 없지만 완전히 달라질 수도 없다. 개인의 선택과 노력 여하에 따라 자신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느냐가 바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민주화의 척도가 아닐까?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주변을 돌아보자. 얼마 전에도 중산층이 줄어든다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20대 실업률 증가, 중산층 감소, 양극화 심화 - 이런 객관적 사회 지표들은 단순히 경제 상황에 따른 사회 변동으로만 볼 수 없다. 정치제도의 합리성, 사회제도의 민주성, 경제적 투명성이 확보되어야 건강한 사회라고 볼 수 있다. 선진국 혹은 복지사회를 만들고 싶다면 건전한 상식과 합리적 의사결정이 통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속한 집단은 그런가?

  세상 사람들의 냉소는 이제 한계를 넘어섰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 정치에 대한 냉소, 경제적 이기주의는 2010년 대한민국의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조건들이다. 학교에서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는지, 사회에 나가면 사람들이 괴물로 변하는지 가족과 친구,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만 잘 사는 사회가 지속 가능한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게 아닌가?

  김용철과 삼성, 아니 우리 모두와 삼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단순한 한국의 재벌 그룹 이 상의 상징이 되어버린 ‘삼성’은 우리에게 무엇이며 앞으로 무엇이어야 하나. 삼성그룹 구조본의 법무팀장이었던 검사출신 변호사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는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혹은 알고 싶지 않았던 우리 사회의 건강진단서를 보는 것 같았다. 설마 이 정도까지겠는가 그래서 설마 이건 아니겠지 하는 미련을 털어버리게 만든 책은 일요일 오전에 읽을 만하지 않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분량이지만 막힘없이 읽힌다. 기사문을 작성하듯 짧은 문장과 간결한 표현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래서 사실을 전달하듯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 진실을 전달하겠다는 의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양심선언을 사람들은 벌써 잊었다. 주류 신문과 방송이 외면해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통해 발표 되었던 삼성의 비자금과 불법 승계의 썩은 고리들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사회의 주류로 행사하며 세상은 이런 곳이라는 떳떳하게 밝히고 산다. 백주 대낮에 그들이 당당할 수 있는 이유, 우리가 그들이 되고 싶은 부끄러운 현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마니로 덮어 놓은 부패한 음식의 악취가 천지를 진동하지만 코는 쉽게 그 냄새에 익숙해진다. 무뎌진 후각만큼 우리 삶의 가치는 성공한 재벌에 대한 면죄부를 향해 달려간다. 좀 더 많이, 확실하게 벌고, 보다 강한 권력을 갖는 자가 살아 남는다. 영화 속 조폭의 한 마디처럼 ‘강한 놈이 살아 남는게 아니라 살아 남는 놈이 강한 놈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도 십년을 지키기 어렵다는 말이다. 진시황도 죽었고 히틀러도 죽었다. 김일성도 죽었고 박정희도 죽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재벌은 죽지 않는다. 창업자의 손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룹의 지배권을 넘겨주기 위한 상상을 초월하는 뇌물과 그 모든 비리와 불법을 인정해주는 검찰과 언론을 가진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오늘도 행복하신가?

  우리 주변에는 삼성에 다니는 가족, 친구, 선후배가 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국어교사가 된 제자와 삼성전자에 입사한 제자를 함께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을 바라보는 내 심정은 복잡했다. 김용철은 이 책을 통해 글로벌스탠다드를 지향하는 삼성의 비리를 고발하지 않는다. 이 책은 오롯이 비정상적, 비상식적 사고방식으로 우리 사회를 부패시키고 있는 이건희와 그 가신들 그리고 이재용에게 바쳐져야 한다. 그리고 그들과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부패한 검찰과 썩은 언론을 위해 쓰여졌다. 이것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우리들의 정서 문제이다. 당신은 삼성의 입장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는 삼성이 만든 제품이나 삼성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묻는 말이 아니다. 무노조 경영의 신화(?)를 창조하고 있는 삼성에 대한 태도는 바로 우리 사회의 주류의 가치관에 동의하는지 여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삼성에 대한 입장은 재벌친화적인 우리 사회 주류의 가치관에 동의하는지 여부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통한다. - P. 389

  감정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사람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삼성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이념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이대로 우리 사회가 계속 유지될 수 없다는 공포와 불안에 대해 귀 기울여야 하지 않는가. 지금 이대로의 현실을 우리 아이들에게 떳떳하게 말해줄 수 있는가. 대기업, 판검사와 변호사, 언론인이 되어 우리 사회를 이끌어 달라고 당당하게 아이들에게 권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을 닮으라고 권해줄 수 있는가. 이 땅에서 아이들을 길러야 하고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부모와 교사의 입장에서 나는 이 책을 울면서 읽었다.

나는 삼성 재판을 본 아이들이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게 정의”라는 생각을 하게 될까봐 두렵다. 그래서 이 책을 썼다. - P. 448
 

10032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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